[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급하기도 하셔라 / 누가 그리 재촉했나요 / 반겨줄 임도 없고 / 차가운 눈, 비, 바람 저리 거세거늘 / 행여 / 그 고운자태 상하시면 어쩌시려고요 / 살가운 봄바람은, 아직 / 저만큼 비켜서서 눈치만 보고 있는데 / 어쩌자고 이리 불쑥 오셨는지요 / 언 땅 녹여오시느라 / 손 시리지 않으셨나요 / 잔설 밟고 오시느라 / 발 시리지 않으셨나요. ▲ 이른 봄 잔설을 밟고 와 꽃을 피우는 변산바람꽃(사진작가 산마루 제공) 이승철 시인의 시 변산바람꽃입니다. 시인의 노래처럼 변산바람꽃은 겨울의 끝에서 그 누가 재촉이라도 한 것처럼 잔설을 밟고 오십니다. 변산바람꽃은 1993년도에 변산에서 처음 발견되어서 변산바람꽃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지요. 물론 변산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더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높이 10cm 안팎의 작은 풀꽃인데, 복수초 곧 얼음새꽃과 함께 이른봄 가장 먼저 눈을 밀어내고 꽃을 피우는 들꽃이지요. 바람꽃에는 변산바람꽃 말고도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여기도 바람꽃, 저기도 바람꽃 하니까 이것저것 생김새 보고 이름 붙여주다가 나도 끼워 달라고 귀찮게
▲ 《체게바라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책 표지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혁명을 논하는 자들의 입에선 체 게바라 얘기가 끊임없다. 그가 누구일까? 남미를 구한 혁명가? 그 정도 알 뿐이다. 그렇다고 쉽게 쿠바를 가 볼 수도 없다. 그런데 마침 그 궁금증을 풀어줄 책이 나왔다. 배재대학교 이규봉 교수가 푸른역사를 통해 펴낸 《체 게바라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이 바로 그것이다. 6세우세만 제시했어도 못 이기는 척하고 타려고 했는데, 1세우세를 양보하지 않은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우리는 약 40분 정도 산길을 걸어 내려와야 하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했다. 택시를 타고 올라오면서 봐서 그런가, 가까이 있을 거라 생각한 버스 정류장은 실제로 꽤 멀리 있었다. 이렇게 지은이는 쿠바를 여행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진솔하게 재미있게 털어 놓는다. 심지어는 알콜 알레르기가 있는 부인이 비행기에서 포도주 한 잔 마셨다가 거의 실신 상태에 이르러 지은이가 화장실에서 30분 동안이나 마사지를 해야 했기에 혹시나 하는 다른 승객들의 눈총을 받아야 했던 일까지 솔직하게 털어 놓는다. 남의 나라에 처음 가서야 좌충우돌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혹시 따분할 수도 있는 남
[우리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돈헌 임병찬 선생(1851~1916)은 1906년 전남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경술국치 후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고 전국적 규모의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의병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에 체포되어 거문도에 유배되었으며 고초를 겪던 중 순국했다. ▲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앞에 우뚝 선 임병찬 선생 동상 명성황후 시해 후 원수 갚으려 가산정리‧노복 해방 돈헌 선생은 집안이 궁핍한 가운데서도 1888년 전라도에 큰 흉년이 들자 돈 4000냥과 조 70석을 내어 구휼하고 1석에 25전의 저리를 받아 백성을 구하였다. 이듬해 봄 도내 유림의 천거로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의 직첩을 받았다. 그 뒤로도 구휼을 잘한 공로로 7월에 낙안군수(樂安郡守)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백성에 대한 관아 벼슬아치들의 행패를 막았음은 물론 한 대의 매일지라도 억울하게 맞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감독했다. 그뿐만 아니라 체납된 세금 6만 7000량과 쌀 1800여 섬을 추징하여 문란했던 세정을 바로잡는 개가도 올렸다. 그러나 39세 때인 1890년 교육의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백두산이 아빠되어 단군겨레 이루었고 한라산이 엄마되어 단일기백 이루었네 만세만세 만만세는 단군겨레 만만세요 만세만세 억만세는 우리겨레 억만세라. ▲ 백용성 스님(왼쪽), 대각사 앞 용성 스님의 거주터라는 표지석 위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분인 백용성스님(1864~1940)의 유고시 온 겨레의 노래입니다. 이 시는 최영섭 씨가 곡을 붙여 지난 2006년 제87주년 삼일절 기념식장에서 불렸지요. 백용성 스님은 한국 현대불교 기반을 닦은 선지식으로 종로 한복판에 대각사를 지어 불교를 도심으로 내려오게 해 생활불교, 바른불교의 기풍을 마련했습니다. 특히 스님은 불교계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등 우리민족을 독립케 하는 것이 중생을 구제하는 길이라며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했지요. 종로구 봉익동 1번지(종묘 옆)에 독립운동의 성지 대각사를 세운 스님은 1940년 이후 입적하실 때까지 조선독립을 위해 온 몸을 바치신 분입니다. 특히 백범 김구 선생은 용성스님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스님은 상해로 망명한 김구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전달하곤 하였습니다. 불교계 또 한 분의 독립지사 만해 한용운 선사와 함께 거사를 도모했지요. 이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이제 봄이 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꽁꽁 얼어 생명이 모두 죽었을 것 같던 자연은 이제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이때 시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은 여인들이 나물을 캐는 모습입니다. 특히 이른 봄철에 나오는 달래, 냉이, 씀바귀, 쑥 같은 것들은 겨우내 모자란 영양분을 보충해주기 충분합니다. 더구나 조선시대 굶기를 밥 먹듯 하던 백성들은 봄철의 나물은 끼니를 때우는 중요한 구황식품이었지요. ▲ 공재 윤두서의 나물캐기[採艾圖] 전남 해남군 녹우당(綠雨堂)에 소장돼 있는 채애도(採艾圖) 곧 나물캐기는 이른 봄날 나물 캐는 아낙네를 그린 작품입니다. 가파르게 대각선으로 그려진 언덕과 산은 어쩌면 이 아낙네들의 팍팍한 삶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 여인은 한 손에 망태기, 한 손에 칼을 든 채 허리를 굽혀 나물을 캐고, 또 한 여인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두리번 거립니다. 이 그림을 그린 조선시대의 선비화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는 자신이 양반임에도 헐벗은 백성의 삶을 돌볼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 조선시대 선비화가 공재 윤두서 자화상(국보 제240호, 해남 녹우당 소장) 그래서 공재의 그림을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서울 지하철 3호선에는 독립문역이 있습니다. 이 역에서 내리면 곧바로 갈 수 있는 곳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입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숱한 독립투사들을 잡아넣고 고문하던 곳으로 유관순 열사 같은 분이 숨져 간 곳입니다. 2012년 서울 서대문구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여옥사 전시 설계 및 전시물 제작, 설치 용역 중 서대문형무소 수감 여성독립운동가 자료조사》라는 다소 긴 보고서를 한 권 냈습니다. ▲ 《서대문형무소 수감 여성독립운동가 자료조사》보고서 표지 당시 악명 높던 형무소는 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이곳에 수감되었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조사 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는 2013년 4월 1일 여옥사(女獄舍)복원과 더불어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는 의지로 보여 기쁜 마음입니다. 그간 이곳을 거쳐 간 여성독립운동가가 누구이며 그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의문조차 갖지 못한 채 지내온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인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만 이제라도 서대문구에서 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연구를 한다니 다행입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91년~1993년 까지 국사편찬위원에서 간행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성옹(醒翁) 김덕함(1562)1636)은 대사헌까지 지낸 조선 중기의 문신입니다. 《인조실록》14년(1636) 12월 10일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전 대사헌 김덕함의 졸기 곧 죽음의 기록이 나오는데 그의 성품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전 대사헌 김덕함이 죽었다. 덕함은 배천(白川) 사람으로 강직하고 청렴했으며 지조가 있었다. 광해조에 적신(賊臣)이 대비(大妃)를 폐할 음모를 꾸며 백관을 협박하여 헌의(獻議, 윗사람에게 의견을 아룀)하게 했을 때에 덕함은 홀로 맞서며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상신(相臣, 3정승)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귀양을 갔는데, 처음엔 북도(北道, 온성) 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남예(南裔, 사천)로 옮겨졌으며, 반정 초에 집의(執義, 사헌부에 속한 정삼품 벼슬)로 불러들였다. 이때에 조정이 청백리(淸白吏)를 뽑았는데, 덕함이 거기에 들어서 예(例)대로 재물을 받고 대사헌이 되었다가 죽었다. 김덕함은 지극한 효자로 어머니를 아흔세 살 될 때까지 모시고 살았는데 70이 다 된 노인이 날마다 어머니를 모시고 자면서 몸소 똥오줌을 받아내는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70번이나 깨어 일어나는 일도 있었다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용(龍)은 기린(麒麟)ㆍ봉황(鳳凰)ㆍ거북(龜)과 더불어 사령(四靈)이라 불려온 상상의 동물입니다. 이 용은 임금이 입던 곤룡포에 등장하며, 임금이 앉는 평상을 용상(龍床)이라 하였고, 임금이 타는 수레를 용가(龍駕) 또는 용거(龍車), 임금이 흘리는 눈물을 용루(龍淚)라 했습니다. 그것은 용이 조화능력이 무궁무진한 동물로 거의 신처럼 여기던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 전체 높이가 182cm나 되는 황룡사터 망새(신라, 왼쪽), 익산 미륵사터 망새(백제) 용은 궁궐이나 절의 지붕에도 올라옵니다. 용마루에 세워놓은 망새 곧 치미(鴟尾)가 그것입니다. 중국 명나라 호승지가 쓴 《진주선(眞珠船)》이란 책에 따르면 용에게는 아홉 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먼 데를 바라보거나 높은 데 있기를 좋아하고, 불 끄는데 재주가 있는 이문(螭吻)의 꼬리가 바로 지붕 위의 망새가 된 것이지요. 예전 집들은 거의 나무로 지어진 것들인데 가장 무서운 것이 화재였습니다. 그 까닭에 창덕궁 인정전 앞에 화재를 막아준다는 드무를 놓아두기도 했고 해태상이나, 숭례문 앞에는 용지라는 연못이 있었지요. 바다에서 용이 꼬리를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내장은 창난젓 알은 명란젓 아가리로 만든 아가리젓 / 눈알은 굽어서 술안주하고 괴기는 국을 끓여 먹고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명태 그 기름으로도 약용으로도 쓰인데제이니 /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노래 되고 시가 되고 약이 되고 안주 되고 내가 되고 니가 되고….” 위 노래는 2002년 발표한 강산에의 7집 앨범에 있는 함경도 사투리로 맛깔나게 부르는 ‘명태’다. 그런가 하면 1952년에 발표됐던 굵직한 오현명의 바리톤 목소리로 듣는 양명문 작사, 변훈 작곡의 가곡 ‘명태’도 있다.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 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 내사랑하는 짝들과 노랑 꼬리치며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 살기 좋다는 원산구경이나 한 후 이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 헛 명태라고 음 허쯧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 국민생선 명태는 모든 이의 안주가 된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려 달라.고 유언 할 정도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제에 단호했습니다. 1936년 2월 21일 57살의 나이로 감옥에서 숨져가면서도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지요. 선생이 제국주의에 저항한 죄로 10년형을 선고 받고 출옥 1년 8개월을 남겨 놓은 시점에서 건강이 악화되자 일제는 서울의 가족에게 병보석 출감을 통보합니다. 내용인즉슨 권세 있는 친일 인사의 보증을 세우면 가출옥을 시켜주겠다는 제의였으나 선생은 자신의 몸을 친일파에게 자신을 맡길 수 없다고 한 마디로 거절합니다. ▲ 영원한 겨레의 횃불 신채호 선생 신채호 선생은 대한매일신보 사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히 비판했는데 특히 일본의 3대 충노 곧 충성스런 노예를 신랄히 꾸짖습니다. 3대 충노란 일진회의 송병준, 보부상조직을 통해 일제의 침략의도에 호응한 조중응, 국내 유림계를 일본 권력 내에 복종케 한 신기선을 꼽았습니다. 선생은 이들의 죄상을 밝히고 우리 민족이 저 무리의 속임수 가운데 빠지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선생은 이와 같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무리들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