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그대들은 다투지 말라. 나도 잠깐 공을 말하리라. 미누비 세누비 누구로 하여 젓가락같이 고우며, 혼솔(홈질한 옷의 솔기)이 나 아니면 어찌 풀로 붙인 듯이 고우리요. 바느질 솜씨가 그다지 좋지 못하여 들락날락 바르지 못한 것도 나의 손바닥을 한번 씻으면 잘못한 흔적이 감추어져 세요의 공이 나로 하여금 광채 나니라. 이는 규방의 부인이 바느질(침선)에 사용하는 자, 바늘, 가위, 실, 골무, 인두, 다리미를 의인화하여 인간 세상을 풍자한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한글 수필의 인두(인화낭자) 부분입니다. ▲ 바느질에 꼭 필요했던 인화낭자(인두) 이젠 잊혔지만 예전 어머니들이 바느질할 때 쓰던 도구 가운데 화롯불에 묻어 놓고 달구어 가며 옷감의 구김살을 눌러 펴거나 솔기를 꺾어 누르는 데 쓰던 인두를 기억하시나요? 인두는 무쇠로 만들며 바닥이 반반하고 긴 손잡이가 달렸지요. 형태는 인두머리의 끝이 뾰족한 것, 모진 것, 둥근 것 따위가 있는데 특히 인두머리가 뾰족한 것은 저고리의 깃섶코버선코배래도련 등의 정교한 곡선을 만드는 데 썼습니다. 또 마름질을 할 때 재단선을 표시하려고 금을 긋는 데에도 썼는데 지금은 그 역할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누룽지를 새까만 가마솥에서 닥닥 긁을 때부터 퍼져 나오는 구수한 냄새는 가히 일품이었다. 그것은 분명 우리만의 냄새요, 우리만의 맛이 아닐까? 또 누룽지에 물을 붓고 끓여 나오는 숭늉은 어쩌면 최고의 마실거리리라. 그래서인지 한 수필가도 “우리는 누룽지를 잃었습니다. 대신 라면과 일회용 반짝 문화를 얻었습니다.”라고 탄식한다. 정말 우리는 누룽지를 잃어간다. 우리의 고향을, 우리의 정서를, 우리의 문화를 잃어간다. 정말 누룽지가 우리에게 소중할까? 허준의 책 동의보감에는 <누룽지>가 음식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못하거나 넘어가도 위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이내 토하는 병증으로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는 병을 치료한다고 되어 있다. 누룽지는 알다시피 쌀로 만든다. 그렇다면 쌀은 현대인이 즐기는 인스턴트음식의 주재료인 밀가루와 어떻게 다를까? 쌀은 밀에 견주어 일반성분, 무기질, 비타민 등의 영양성분 함량이 조금 적지만 필수아미노산 함량은 높다. 특히 성장기 어린이에게 좋은 라이신 함량은 밀의 2배 정도나 많다. 또 쌀이 밀보다 아미노산가와 단백가가 높아 소화흡수율과 체내 이용률이 좋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식품영양학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경북 영덕군 창수면에 있는 마을 인량리는 앞에 넓은 평야를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 “만괴헌”이라는 평산신씨 인량문중 종택이 있다. 이 종가는 고려초의 대표적개국공신 신숭겸장군의 후손들이 충효 사상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만괴헌(晩槐軒)이란 이름은 1798년에 태어나 1855년 세상을 뜬 신재수(申在洙) 선생의 호다. ▲ 만괴헌 전경 두해의 흉년, 가난한 이들 구제에 4천 냥을 쓰다 1836(병신)과 1837(정유)년 두 해에 거듭된 흉년으로 온 나라가 기근에 허덕일 때 만괴헌 선생은 병신년 겨울부터 이듬해 정유년 봄까지 4번에 걸쳐 곳간을 활짝 열고 굶주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당시 영해지방은 흉년에 대비한 식량 비축도 없었고, 경상감영이나 나라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괴헌 선생이 고을 사람들이게 나눠준 구휼미는 당시 가치로도 무려 4천 냥에 이르렀다. 이에 굶어죽는 것을 모면한 사람들은 그 고마움을 알리기 위해에 앞 다투어 부사와 관찰사에게 등장(等狀, 여러 사람이 이름을 잇대어 써서 관청에 올려 하소연하는 문서)과 의송(議訟, 조선시대 백성이 관찰사에게 올리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본도의 민정은 거듭 흉년이 든 끝에다 또 춘궁기까지 당하였으니, 배불리 먹지 못하고 몹시 굶주린 모습이 눈에 선하다. 구제하는 방법은 오로지 진휼을 하는 것과 곡물을 나누어 주는 두 가지 일에 의지하고 있는데, 수령들이 진휼할 때 곡물을 줄여서 몰래 자기의 호주머니를 채우고 곡물의 대여를 오로지 하리들에게 위임하여 농간을 부리게 놔두고 있으니, 아! 저 백성의 목숨을 어떻게 구제한단 말인가? 위는 《정조실록》 7년(1783) 6월 8일의 기록 영남 어사 심기태에게 암행어사의 조건에 대해 알려주다의 일부입니다. 수령과 그 수하들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에 대해 아! 저 백성의 목숨을 어떻게 구제한단 말인가?라며 가슴 아파 했던 백성사랑의 임금입니다. 정조의 백성사랑은 그의 치세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특히 수원 화성을 쌓을 때의 일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 정조 백성사랑이 만든 꼬불탕한 수원 화성 정조임금은 영의정 체재공에게 화성을 쌓을 때 그곳에 살던 백성을 쫓아내지 말라고 하여 성곽을 꾸불텅하게 쌓게 했던 임금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성을 쌓는 과정에서 생긴 부상자는 팔달산 서쪽 임시 병원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어음은 일정한 돈을 일정한 날짜에 치르기로 약속하는 유가증권입니다. 그 어음과 관련된 이야기가 황현(黃玹)이 쓴 편년체의 역사책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있습니다. “이덕유는 서울의 중인이다. 나라에서 으뜸가는 부자로 민영준과 견주어도 더 앞선다. 젊었을 때 북경으로 들어가다가 요동에서 한 죄수를 보았다. 돈 천금만 있으면 죽음을 모면할 수 있다고 하기에 이덕유가 전대를 풀어 그에게 주었다.” 이후 다시 이덕유가 중국에 갔을 때 돈을 주었던 죄수가 그 돈을 갚으려고 기다렸다가 오지 않자 그 돈을 불려 밭을 사고 큰 농장을 만들어 소작료로 만석을 받는 재산을 만들어 놓았다며 바쳤지요. 그 뒤 이덕유는 집에 마제은(청나라 때의 말발굽 모양 돈)이 여러 곳간에 그득할 정도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널리 중국에까지 알려지자 임금이 중국에 재물을 쓸 일이 있으면 이덕유에게 어음을 받아 보냈고, 청나라 장사꾼들도 임금의 옥쇄보다 이덕유의 어음을 더 믿었지요. ▲ 조선시대의 어음(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시대의 어음은 어험(魚驗) 또는 음표(音票)라고도 하였는데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상평통보가 교환수단으로 널리 유통하게 된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 경북 영덕 괴시마을의 한 대문에는 “神茶鬱壘(신다울루)”라는 입춘축이 붙어있다. 천문, 지리, 측후를 맡아 보던 관청인 관상감(觀象監)에서는 붉은 물감(경명주사)으로 귀신을 쫓는 글인 “神茶鬱壘(신다울루)”를 써서 궁중의 문설주에 붙여 두었다. 신다와 울루, 이 두 신은 귀신들이 다니는 문의 양쪽에 서서 모든 귀신을 검열하는데 남을 해치는 귀신이 있으면, 갈대로 꼰 새끼로 묶어 호랑이에게 먹인다고 믿었다. 입춘축에는 수여산 부여해(壽如山 富如海)“로 ”산처럼 오래 살고 바다처럼 부자가 되어라“, ”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 곧 “마당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만복이 들어온다”라는 것도 있는데 괴시마을에도 드물게 보는 것으로 "유비무환(有備無患)",애친경장(愛親敬長,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함)이란 것도 있었다.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가 시작하는 입춘(立春)입니다. 선비들이 동지 때부터 그린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가 완성되면서 드디어 기다렸던 봄이 오는 때지요. 입춘 무렵의 세시풍속으로는 “적선공덕행”과 “아홉차리” 따위가 있지만 특히 봄이 온 것을 기리어 축원하는 입춘축(立春祝)을 집 대문이나 대들보·천장 따위에 붙입니다. 입춘축을 다른 말로는 춘축(春祝), 입춘첩(立春帖), 입춘방(立春榜), 춘련(春聯), 문대(門對), 춘첩자(春帖子), 춘방(春榜), 대련(對聯), 춘첩(春帖)이라고도 합니다. ▲ 영덕 괴시마을 한 대문에는 관상감에나 붙는 “神茶鬱壘(신다울루)”가 붙어 있다. 입춘축 가운데 가장 많이 쓰는 것은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으로 “입춘이 되니 크게 길 할 것이요, 만 가지 일들이 형통하라”라는 뜻이 담겨 있지요. 그밖에 쓰는 말로는 수여산 부여해(壽如山 富如海)“로 ”산처럼 오래 살고 바다처럼 부자가 되어라“, ”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 곧 “마당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만복이 들어온다”라는 것도 있는데 온갖 좋은 말은 다 가져다 붙여놓습니다. 특히 궁궐에서는 문신들이 지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각사의 서리배와 각영의 장교와 군졸들은 종이에 이름을 적어 관원과 선생의 집에 들인다. 문 안에는 옻칠한 소반을 놓고 이를 받아두는데, 이를 세함(歲銜)이라 하며, 지방의 아문에서도 이러하였다. ; 各司胥隸 各營校卒 摺紙列名 來呈單子於官員及先生家 門內置盤受之曰歲銜 外道衙門亦然“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 세함((歲銜)), 정초에 손님은 대문 안에 마련된 지필묵으로 자신을 이름을 쓰고 돌아간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또 한양(漢陽)의 세시기를 쓴 책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따르면, 설날부터 정월 초사흗날까지는 승정원과 모든 관청이 쉬며, 시전(市廛) 곧 시장도 문을 닫고 감옥도 비웠다고 합니다. 이때는 서울 도성 안의 모든 남녀들이 울긋불긋한 옷차림으로 왕래하느라고 떠들썩했다 하며, 이 사흘 동안은 정승, 판서와 같은 고위관원들 집에서는 세함만 받아들이되 이를 문 안으로 들이지 않고 사흘 동안 그대로 모아 두었다고 하지요. 세함은 지금의 방명록(芳名錄) 또는 명함과 비슷합니다. 흰종이로 만든 책과 붓·벼루만 책상 위에 놓아두면 하례객이 와서 이름을 적었습니다. 설이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우리 고유의 설인 갑오년 새해가 밝았다. 이날을 맞아 그동안의 시름을 잊고 오랜만에 식구들이 모여 새배를 하고 성묘를 하며, 정을 다지는 하루다. 또 온 겨레는 “온보기”를 하기 위해 민족대이동을 하느라 길은 북새통이다. “온보기”라 한 것은 예전엔 만나기가 어렵던 친정어머니와 시집 간 딸이 명절 뒤에 중간에서 만나 회포를 풀었던 “반보기”에 견주어 지금은 중간이 아니라 친정 또는 고향에 가서 만나기에 온보기인 것이다. 설날의 말밑들 ▲ 설날의 해돋이(여수 향일암) 그러면 “설날”이란 말에는 무슨 뜻이 들어 있을까? “설”은 먼저 "서럽다"라는 뜻이 있는데 한 해가 지남으로써 점차 늙어 가는 처지를 서글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리다', 삼가다.'의 `살'에서 비롯했다는 설도 있다. 여러 세시기(歲時記)에는 설을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표현하고 있는데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해를 시작하라는 뜻으로 본다. 또 '설다. 낯설다'의 '설'이라는 말에서 나왔다고도 이야기도 한다. 처음 가보는 곳은 낯선 곳이며, 처음 만나는 사람은 낯선 사람이다. 따라서 새해는 정신적, 문화적으로 낯설다고 생각하여 ‘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오늘은 까치설날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소지왕 때 왕후가 한 스님과 내통하여 임금을 해치려 하였는데 까치(까마귀)와 쥐, 돼지와 용의 인도로 이를 모면하였습니다. 그런데 쥐, 돼지, 용은 모두 12지에 드는 동물이라 기리는 날이 있지만 까치를 기릴 날이 없어 설 바로 전날을 까치를 기리려고 까치설이라 했다고 하지요. 그런가 하면 옛날 섣달그믐을 작은설이라 하여 “아치설” 또는 “아찬설”이라 했는데 이 “아치”가 경기지방에서“까치”로 바뀌었다고도 합니다. 음력 22일 조금을 다도해 지방에서는 “아치조금”이라 하지만 경기만 지방에서는 “까치조금”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그믐 전날, 어린이 수십 명을 모아서 붉은 옷과 두건을 씌워 궁중에 들여보내면 그믐날 새벽에 관상감에서 북과 피리를 갖추고 방상씨(方相氏, 탈을 쓰고 잡귀를 쫓는사람)와 함께 쫓아내는 놀이 곧 나례(儺禮, 나희儺戱를 했습니다. 또 그믐날 이른 새벽에 처용(處容), 각귀(角鬼), 수성노인(壽星老人), 닭, 호랑이 등과 같은 그림을 궁궐문과 집 문에 붙여, 잡귀를 쫓는다고 하는데, 이것을 문배(門排) 또는 세화(歲畵)라고 부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