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1934년 무렵 서울시청에서 동쪽에 문명상회라는 고미술품 가게가 있었는데 이 문명상회의 주인은 이희섭이었습니다. 그는 청자오리모양연적를 들고 온 사람을 꼬드겨서 기와집 한 채 값인 1천6백 원에 산 다음 미야자키라는 일본인에게 2만원을 받아 엄청난 이득을 챙겼지요. 이렇게 사기 수준으로 고미술품 장사를 하던 이희섭은 1941년 천인공노할 일을 저질렀습니다. ▲ 국보 제74호 청자오리모양연적 동경 한복판 다카시마야[高島屋] 백회점에서 낙랑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고미술품 3천여 점을 모아놓고 전시회를 엽니다. 미나미지로 총독이 뒤를 봐주는 덕에 전시회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전시품들은 경매를 통해 고가에 팔려 이희섭은 조선에서 몇 째 안 가는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돈 욕심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우리 겨레의 소중한 유물들을 거두어 일본인에게 팔아치운 것입니다. 여기서 더 큰 욕심을 부린 이희섭은 잘 알지도 못했던 자철광산에 전 재산을 투자했다가 알거지가 되고 맙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빚까지 얻어 계속 투자금은 늘려갔지만 기대하던 자철광은 나오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 뒤 이희섭은 625 때 인민군에게 악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넉넉지 못한 살님에 금음날 밤까지 사정 업는 지주놈의 빗 졸님에 죽을 지경임니다. 새해 첫날 아침에 차레를 지내고는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업시 모혀 안저 고향 생각에 일장 우름판이 터짐이다. 「친구 생각도 나고 친척도 보고 십구나! 우리가 왜 천리 타국으로 왓단 말인가.」「이 사람 울지 말게. 우리도 어서 돈을 모아 고향으로 가세.」... ... 이것이 서간도(西間島) 과세(過歲)의 1막(一幕)임니다. 그저 조와하는 것은 어린이들임니다. 고흔 옷을 닙고 설날 새벽부터 깁버 뛰놈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아해들아 너희는 오날부터 한 살식 더 먹엇다. 어서어서 자라서 고국을 차저 가자.」 이럿케 축복할 뿐임니다. 위는 잡지 《별건곤》 제25호(1930,1,1)에 나오는 서간도 정월 풍경입니다. 일제강점기 낯선 타향에서 설날을 맞은 설움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그렇다고 당시 국내 사정이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1935년 2월 3일치 동아일보 기사에는 서울 장안에서 설을 앞두고 구세군과 동사무소 직원들이 따뜻한 밥 한 끼를 위한 구제쌀(救濟米)를 나눠주었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 가난한 이에게 쌀을 나눠주는 장면(동아일보 1935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오매불망 우리 사랑 규중심처 감출 장, 부용작약의 세우 중에 왕안옥태 부를 윤, 저러한 고운태도 일생 보아도 남을 여, 이 몸이 훨훨 날아 천사만사 이룰 성, 이리저리 노니다가 부지세월 해 세, 조강지처는 박대 못 허느니 대전통편의 법중 율, 춘향과 날과 단둘이 앉어 법중 여, 자로 놀아보자. 이는 김세종제 춘향가 사설 가운데 천자 뒤풀이 대목입니다. 원래 《천자문(千字文)》은 중국 양(梁)나라 때 주흥사(周興嗣)가 1구 4자로 250구, 모두 1,000자로 지은 책이지요. 하룻밤 사이에 이 글을 만들고 머리가 허옇게 세었다고 하여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천자문》이 한자(漢字)를 배우는 입문 서로 널리 쓰여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천자문이 나왔는데 특히 한호 석봉이 지은 《석봉천자문》이 가장 유명한 책입니다. ▲ 한석봉이 지은 석봉천자문 초간본 그런데 위 춘향가 사설을 보면 이도령이 원래의 천자문을 읽을 정신이 없습니다. 광한루에서 춘향을 보고 한눈에 반한 이도령이 방자를 보내 만날 것을 청하지만 춘향이 꽃이 어찌 나비를 찾느냐면서 자신을 찾아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한국 경제 다시 한 번 도약을 신년 메시지로 내놓았다. 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시장과 기술의 한계 돌파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기술개발에 역량 집중, 구본무 LG그룹 회장 사회와 함께 호흡하는 기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한마음으로 뭉쳐 위기 극복, 신격호 롯데 총괄 회장은 내실 경영과 혁신경영,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준비된 기업에 더 많은 기회라고 새해 인사를 했다. ▲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의 새해 화두 한국 경제 다시 한 번 도약 작품 이러한 재계 수장들의 새해 인사는 청농 문관효 작가의 붓글씨로 재탄생했다. 지난 20일부터 오는 29일까지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청농 문관효 작가의 붓글씨전 갑오년 나라ㆍ기업ㆍ가족경영은 이런 새해 인사들의 화두를 더욱 생명력 있게 살려낸 것이다. 이번 작품은 짙은 빛깔의 농묵(濃墨)과 옅은 빛깔의 담묵(淡墨) 기법은 물론 파묵(破墨, 엷은 먹으로 대강 그리고 그 위에 짙은 먹을 더하여 짙거나 옅음에 따라 입체감이나 생동감을 표현하는 기법) 등을 써서 보는 이들에게 짙은 묵향 속에 감싸이게 한다. 전시는 재계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할멍 어멍 단물샘에 나와 / 목욕하고 빨래하며 노닐던 섯물 / 밤이면 다정한 오누이별 노래하고 / 멀리 밤바다 오징어배 불 밝히던 밤 / 외로운 하늘 선녀 짝 찾아 오늘도 내려 왔을까? - 김순이 제주 어영 마을 섯물 - ▲ 제주도 어영마을의 섯물, 그 안은 세칸으로 나뉘어 있다.(윤지영 찍음) 제주 어영마을 해안가에 있는 수근연대(바닷가의 봉수대,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3-8호) 옆에는 용천수가 나는 곳이 있는데 짠 바닷물 속에서 용솟음치는 용천수는 제주인들에게는 더 없는 복덩어리였지요. 어영마을 용천수 가운데 북쪽 해안가에 있는 용천수를 동물이라 하여 남성들이 썼고, 서쪽에 자리 한 것을 섯물이라 하는데 여성들이 썼습니다. 특히 섯물은 세 칸 계단식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위쪽은 먹는 물, 가운데 칸은 푸성귀 씻는 물 그리고 맨 아래 칸은 목욕이나 빨래를 하는 곳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용천수는 대수층(땅에 내린 비와 눈의 일부가 땅 속에 스며들어 된 지하수)을 따라 흐르는 물이 바위나 땅 속 틈을 통해 땅 위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곳을 용천이라 하고 여기서 나온 물을 용천수라 합니다. 어영마을 섯물은 용두암에서
[그린경제/얼레빗 =김영조 기자] 오래 전 한 시골마을의 추수감사제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마을 아주머니들은 양동이에 막걸리를 담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막걸리를 한 잔씩 마시게 했다. 한 서너 순배쯤 돌자 사람들은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고 흥이 나 시끌벅적한 마당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다가오더니 내게 징채를 쥐여 주며 징을 쳐보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그때까지 한 번도 풍물 악기를 제대로 만져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무가내였다. 누구나 쉽게 칠 수 있으니 한번 쳐보란다. 할 수 없이, 사실은 적당히 취기가 오른 나의 객기에 결국은 엉겁결에 징채를 잡았다. 아마도 술기운이 아니었으면 그때 징채를 잡는 일은 상상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꽹과리, 장구 등 치배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연신 징을 울려댔다. 정말 흥겨웠다. 평생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던 적도 별로 없었던 듯하다. 만일 이것이 서양 음악이었다면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풍물굿은 가능하다. 풍물굿은 연주자가 관객이 되기도 하고, 관객이 즉석에서 연주자가 되기도 한다. 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한마음 되어 즐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종가의 역사는 짧을지 몰라도 백산 안희제 종가를 빠뜨리면 안 됩니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서 백산 선생이 차지하는 부분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나라 안에서 모은 독립운동자금의 많은 부분은 선생의 손을 통해서 상해임시정부에 건네졌으니 선생을 빼놓고는 독립운동을 이야기할 수 없지요.”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증손자인 이항증 광복회 경북지부장은 종가 취재에 백산종가를 빼놓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백산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차린 뒤 비밀리에 상해로 돈을 빼돌려 독립자금을 댄 백산 선생이야말로 조선의 독립운동에 크게 이바지한 분이었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 백산 안희제 선생 ▲ 백산 선생 생가 양정의숙 재학 때 민족교육 운동을 시작, 여러 학교를 설립하며 교육운동 “새는 한가로움을 좋아하여 골짜기만 찾아드는데(鳥欲有閑尋僻谷) 해는 편벽되기를 싫어하여 중천에서 광채를 더한다.(日慊偏照到中天)“ 위 시는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 8. 4∼1943. 8. 3) 선생이 17살 때 의령군아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지은 시다. 선생은 가장 먼저 시를 써내 군수로부터 칭찬를 받고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임금이 유모의 공을 중하게 여겨 옛 제도를 자세히 살펴 법을 세우게 하였더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삼가 예전 제도를 자세히 살펴보니 제왕(帝王)이 유모에게 벼슬을 주는 것이 한나라에서 시작하여 진나라를 거쳐 당나라까지 모두 그러하였으니, 마땅히 예전 제도에 따라 이제부터 유모의 벼슬을 아름다운 이름을 써서 봉보부인이라 칭하고, 품계는 종2품과 비슷하게 하소서” 위는 《세종실록》 17년(1435) 6월 15일 기록으로 임금 유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왕비나 후궁이 아이를 낳으면 유모가 젖을 먹여 키웠는데, 이들은 아이의 양육에 정성을 쏟았고 자연스럽게 임금은 자신의 유모를 아주 가깝게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임금은 유모에게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고 하는 종1품 품계로 예우해주었지요. 오늘날 장관격인 판서가 정2품이니 판서보다도 더 높은 품계이며 정승과 비슷한 반열의 자리로 대우한 것입니다. 또 임금이 된 뒤에도 늘 임금과 가까이 있으므로 함부로 대하기도 어려워, 이쪽에 줄을 대고 출세하려고 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 봉보부인 얘기가 나오는 《세종실록》(왼쪽)과 《연산군일기》 그래서 봉보
[그린경제/얼레빗= 김영조 기자] 자연에 가장 가깝다는 그릇, 옹기는 우리 겨레가 삼국시대 이전부터 만들어 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옹기는 지역의 환경과 기후조건에 따라 다르게 만들었기 때문에 옹기의 모양새가 여러 가지입니다. 중부 이북에서 주로 사용되는 옹기는 보통 입 (口徑)과 키가 크고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이는 일조량이 작고 기온이 높지 않기 때문에 장을 담글 때 자외선을 충분히 쪼이기 위한 것입니다. 이에 견주어 기온이 높고 일조량이 많은 남부지방은 수분증발이 많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입을 좁게 만들고 대신 어깨를 넓게 함으로써 옹기 표면으로 복사열을 보다 많이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 김치와 장을 발효시켰던 옹기, 그 곳엔 과학이 있다 그러나 옹기가 김치나 장이 발효되는데 뛰어난 것은 옹기가 숨을 쉰다는데 있습니다. 옹기는 겉에 아주 작은 구멍이 나도록 만들고, 어머니가 아침저녁으로 항아리를 닦아주어 옹기가 숨을 잘 쉬도록 했기에 공기 중에서 젖산균(유산균)이나 대장균을 억제하는 기공을 끌어들여 김치를 오래 저장할 수 있도록 하고, 장이 잘 발효되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세계문화유산이 된 우리의 김장문화도 옹기 속에 담긴 과학이 바탕이 되었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전 참판(參判) 김정희(金正喜)가 죽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金魯敬)의 아들로서 똑똑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金石文)과 도사(圖史, 옛 그림을 모아놓은 책)에 깊이 통달하여 초서(草書)·해서(楷書)·전서(篆書)·예서(隷書)에 있어서 참다운 경지(境地)를 신기하게 깨달았었다. (중간 줄임) 젊었을 때는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간에 화를 만나서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귀양가서 온갖 풍상(風霜)을 다 겪었으니, 세상에 쓰이고 혹은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고 또는 물러갔음을 세상에서 간혹 송(宋)나라의 소식(蘇軾, 소동파, 중국 북송 때 최고의 시인)에게 견주기도 하였다.” ▲ 이한철 <김정희초상>, 간송미술관 위는 《철종실록》 8권, 7년(1856) 10월 10일 기록입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년) 선생은 이렇게 죽음에 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오를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중국 북송 때 최고의 시인이었던 소동파와 견줬을 정도로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났고 금석문에도 대단한 경지에 오른 사람이었지요. 그런 선생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던 초의선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