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을 지킨 사람들, 김슬옹, 아이세움》 표지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세종대왕은 오랜 연구 끝에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를 창제했다. 그리고 훈민정음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위대한 훈민정음, 28개의 글자만 익히면 소리 나는 대로 글자를 적을 수 있지만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은 명나라를받들었던 사대부 양반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사대부들은 조선을 세우는 데 아주 큰 공을 세운 데다 조선의 지배계층을 이룬 집단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뜻을 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글이 스러지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아주 편하게 쓰는 우리글이 된 것은 한글을 지켜 낸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글을 직접 만들고 널리 펴기 위해 노력한 세종대왕부터, 선왕의 뜻을 받들고자 한 세조와 성종, 최초의 한글 소설을 쓴 허균, 한글 문법의 뼈대를 세운 주시경 등이 있다. 《한글을 지킨 사람들》을 통해 한글이 왜 위대한 글자인지, 한글을 만들고 지켜 온 과정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다. 세종대왕은 왜 한글을 만들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한글로 글을 적고, 읽으며 세상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1931년 1월 8일 한 한국인 청년은 일왕이 사는 황거로 들어가는 사쿠라다몽(櫻田門)이란 문 앞에서 서성입니다. 조금 있자 일왕(日王)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했다가 마차를 타고 옵니다. 이때 32살의 한국인 청년 이봉창은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일왕의 마차를 향해 힘껏 던집니다. 그러나 궁내대신(宮內大臣)의 마차만 뒤집어 졌을뿐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지요. ▲ 의거 전 태극기 앞에서 선서하는 이봉창 의사(왼쪽), 이봉창 의사 의거를 "대역사건'이라 보도한 기사 ▲ 일왕 황거로 들어가는 사쿠라다몽(櫻田門), 여기서 이봉창 의사는 수류탄을 던졌다. 하지만,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본 왕의 행차에, 그것도 일본의 수도인 도쿄 더구나 일왕의 황거 앞에서 폭탄을 던져 죽이려 했던 일은 한국 독립 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또 다른 이야기로는 사쿠라다몽 앞이 아니라 그곳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경시청 앞에서 터뜨렸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경시청이 망신스러워서 수류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1월 12일 시민청 귀빠진 날이랍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신문을 보다가 확 끌리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서울시에서 한 광고인데 시민청이 개관한 생일날인데 이날 잔치를 하나 봅니다. 그런데 흔히 영어 아니면 한자말 쓰기를 예사로 하는관공서들인데 서울시만은 달랐습니다. 무슨 탄생일이나 Birthday가 아닌 토박이말로 귀빠진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돌잔치, 쫑긋 같은 토박이말로 더욱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아마도 시민과 마음을 잇고 싶은 시청 공무원들의 따뜻한 생각이 빚은 것 아닐까요? 크게 손뼉을쳐드립니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은 라운지, 토크, 프로젝트 같은 외래어가 숨어 있네요. 앞으로는 반빡반짝 빛나는 옥에 티도 없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 하루에도 한 갑 두 갑 일 년에 열두 갑 / 치마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설 때 치마 밑에 불이 붙어 지금 나이 지긋한 분들이 군대에서 배웠음직한 노래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란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불러댔지만 그 뒤안에는 근대사의 아픈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 성냥공장에서 어린 소녀들이 일하는 모습(인천근대박물관에서 찍음) 우리나라 성냥 전래는 1880년 개화스님 이동인이 일본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것이 처음이었다고 하지요. 그러나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18년 일본인들이 인천 제물포에 조선인촌회사(朝鮮燐寸會社)를 세운 이후였습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에겐 기술도 가르쳐주지 않고 공장도 세우지 못하게 하여 성냥 생산을 독점했습니다. 전기가 일상화되기 이전 성냥은 생활필수품이었기에 날개 돋친 듯 팔렸고, 이 회사의 직원이 5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성냥은 주로 수작업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서 노동자들이 많이 필요했는데 가난한 집안의 생활비나 학비 따위를 벌려는 10대 어린 소녀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하지요. 그러나 어린 소녀들은 하루 13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881715)는 시서화에 두루 능했고, 유학에도 밝았습니다. 공재는 옛 그림을 배우려면 공재로부터 시작하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림에 뛰어났는데 대표적 작품으로는 현재 그의 종손가 녹우당 유물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제240호 공재 자화상이 있습니다. 그밖에 공재의 그림을 보면 나물캐기, 짚신삼기, 목기깎기, 돌깨기 같은 풍속화를 많이 그렸는데 어려운 삶을 사는 백성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그림들입니다. 그런데 공재의 그림 가운데 또 유독 눈에 띄는 작품은 보물 제481-3호 해남윤씨가전고화첩 중 동국여지도(東國與地圖)이지요. 이 지도는 공재가 숙종 36년(1710)에 그린 조선의 지도로 종이 위에 채색하여 그린 그림인데 크기는 가로 72.5㎝, 세로 112㎝입니다. 강줄기와 산맥을 정확하고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섬들도 자세히 그렸으며 섬과 육지의 연결수로까지 표시하였지요. 이 동국여지도는 우리가 익히 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151년 정도 앞서 그린 것입니다. ▲ 보물 제481-3호 윤두서 동국여지도 ▲ 숙종의 명으로 윤두서가 그린 보물 2ㅔ481-4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셋째 절기로 작은 추위라는 뜻의 소한(小寒)이다. 이름으로 보자면 물론 대한(大寒)이 더 추울 것 같지만 보통은 대한보다는 소한이 더 춥다. 절기를 중국 화북지방에 맞추어 만든 것이라 우리나라와 약간 다른 면도 있는 탓이다. 그래서 이때 전해지는 속담을 보면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 소한 추위는 꾸어다가도 한다., 소한에 얼어 죽은 사람은 있어도 대한에 얼어 죽은 사람은 없다. 같은 것들이 있다. ▲ 소한 추위 /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예전 이때쯤이면 추위가 절정에 달했다. 아침에 세수하고 방에 들어가려고 문고리를 당기면 손에 문고리가 짝 달라붙어 손이 찢어지는 듯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뿐만 아니다. 저녁에 구들장이 설설 끓을 정도로 아궁이에 불을 때두었지만 새벽이면 구들장이 싸늘하게 식는다. 그러면 문틈으로 들어오는 황소바람에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자게 된다. 이때 일어나 보면 자릿끼로 떠다 놓은 물사발이 꽁꽁 얼어있고 윗목에 있던 걸레는 돌덩이처럼 굳어있었다. 그렇게 추운 겨울. 지금이야 난방이 잘돼 어려움이 적지만 예전 사람들은 어떻게 견뎠을까? 조선시대 선비들은 동지가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신문에 날마다 광고가 올라옵니다. 그런데 영어광고에 정신파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우리말 광고로 얼을 지키는 기업도 있습니다.롯데백화점과 현대백화점은 다투어 영어광고를 해서 꾸중을 듣습니다만 SK는 우리말광고로 우리를 기분 좋게 합니다. 건물을 지을 때도 "정초 (定礎)"라고 어려운 한자말을 쓴느 곳이많은데 이렇게 "주출돌" 또는 "머릿돌"이라고 쓰면 좋을 일입니다. 아쉬운 것은 앞으로 기업 이름도 SK가 아닌 우리말을 활용해 다시 지어달라 하면욕심일까요? ▲ 건물에 "머릿돌"이라고 우리말로 쓴 곳이 있는가 하면 "定礎"라고 한자로 쓴 곳이 있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김후신은 대쾌도(大快圖)를 그렸는데 만취한 선비가 흐느적거리면서 갈 지(之) 자로 걷고 친구들이 부축하는 그림이다. 어쩌면 대쾌도는 술 취한 그림이지만 이는 술 취한 사회를 비웃는 김후신의 뜻이 담겨 있음이 아닐까? 당시는 살벌한 금주령이 내려진 영조임금 시대였다. ▲ 김후신 대쾌도(大快圖), 자본담채, 33.7 x 28.2 cm, 간송미술관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술을 빚거나 마시는 것을 엄하게 다스리던 시절, 하지만 금주령 앞에 희생당하는 건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이었다.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하는 백성은 술을 빚어 팔았다고 잡혀가고, 몰래 술 마셨다고 잡혀가지만 금주령이 내려진 대낮에도 양반들은 거리낌 없이 술을 마셨던 것이다. 양반은 취하고 처벌은 백성이 받고, 그림 속 배경인 나무들이 이런 광경을 흘겨보는 양 묘사한 김후신의 번득이는 재치다. 이름을 날렸던 조선의 많은 유명 화가들이 이렇게 술에 빠졌던 까닭은 무엇일까? 술이 아니고는 붓을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일까? 술독에 빠진 화가들은 어쩌면 의식과 무의식 중 어느 한 쪽에서도 예술에 대한 영감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 이경윤 수하취면도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일제강점기 독립투사 가운데 김지섭 의사를 아시나요? 안동 출신 추강 김지섭 의사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의열단에 가입해 상하이,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벌였습니다. 이후 김 의사는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일제의 조선인 학살을 보복하기 위해 일본 정부요인을 암살하기로 마음먹고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석탄운반선에 몸을 숨긴 김지섭 의사는 열흘간의 고된 항해 끝에 1923년 12월 30일 후쿠오카에 도착합니다. ▲ 도쿄 황거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왼쪽), 김지섭의사가 재판과정에서 당당히 임했다는 동아일보 1924년 10월 15일 기사 일본에 간 목적이 제국의회에 참석하는 일본 총리 따위 요인을 처단하기 위해서였지만 제국의회가 무기한 연기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에 따라 거사 계획을 바꿔 일왕의 궁성 곧 황거를 폭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24년 1월 5일 관광객 틈에 몸을 숨긴 채 궁성의 이중교(니주바시, 二重橋)를 향해 폭탄 3개를 던졌습니다. 습기를 머금은 폭탄의 불발로 거사는 실패했지만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김 의사는 현장에서 붙잡혀 재판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일찍이 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옥을 오덕(五德)에 견주었습니다. 중국 고대 유가(儒家)의 경전 《예기(禮記)》는 군자의 덕(德)은 옥(玉)에 견줄 수 있으니 부드럽고 따사롭고 광채가 나는 것은 인(仁)이요, 짜임새가 고르면서 굳은 것은 지(智)요, 깨끗하면서 깎이지 않음은 의(義)요, 몸에 드리워 떨어질 듯 함은 예(禮)요, 두들기면 그 소리가 맑고 은은하게 뻗어 슬쩍 감추는 것은 낙(樂)이다.라고 말하고 있지요. 옥은 이미 고대 우리나라 전역 특히 삼국시대 유적지에서 많이 출토되었음은 물론 귀한 보석으로 여겼는데 신라에서는 임금이나 성골(聖骨)들만이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고려사≫ 김인존(金仁存) 열전을 보면 잔치에 썼던 그릇이 모두 백옥(白玉)으로 만들어졌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도 옥은 인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조선시대 중종 때에는 옥장인 박천석(朴千石)양억만(梁億萬) 같은 사람이 몰래 옥을 캐어 옥기(玉器)를 만들어 팔았으므로, 이들을 잡아 처벌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 옥에 구멍을 뚫는(투각) 옥장(玉匠) 장주원 선생 ▲ 옥장 장주원 선생 작품 - 녹옥 매화다기 주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