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얼레빗=김영조기자] 경북 예천 송곡리의 사고(沙皐) 이덕창(李德昌‧1569~1616) 별좌공 종택을 찾아 가던 날은 함박눈이 펑펑 내려 자동차들이 설설 기던 날이었다. 평소 예천은 갈 기회가 없었는데 벼르고 별러 찾아 나선 길이 빙판길이라 조심조심 찾아 갔다. 예천군 호명면 송곡리 별좌공 종택에 이르렀을 때는 눈은 뚝 그치고 하늘은 마치 비 갠 뒤의 날씨처럼 높고 푸르렀다. 내려 와도 별로 들려 줄 이야기가 없는데.라며 찾아뵙기 전 나눈 전화 통화 너머에서 바튼 기침 소리를 내던 이의선 종손 어르신은 불편한 몸으로 기자의 방문에 대문을 활짝 열고 반겨 주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선 앞마당 위쪽에는 오래된 고택 한 채가 버티고 있었다. ▲ 별좌공(사고) 종택 전경 ▲ 이응 선생 후손 이태형 공이 지은 병인양요 당시의 의병기록 동야일기 의병장으로 적을 토벌하고 주검 못 찾아 의관 거두어 장사 지내 이유(李愈)는 자가 자흠이요 호를 매촌(梅村)이라 하는데, 연안인(延安人)인으로 예천 출생이다. 가정 임오에 형제가 함께 진사가 되고 퇴계문하가 되었다. 4개의 읍을 다스려 치적을 쌓고 임진년에 용궁(龍宮) 현감으로 부임하자 군사를 모아
[그림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이제 4346 계사년을 보내고 새롭게 4347 갑오년을 맞았다. 갑오년을 맞으면서 한국문화신문은 독자 여러분께 새해 덕담이 될 말들을 소개한다. 물론 우리의 설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지만 한해가 바뀐 시점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으로 정리해 본다. 설날의 말밑,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한해를 시작하라 설날은 왜 설이라고 부를까? “설”이란 말의 말밑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설을 신일(愼日)이라 한다.”라는 것이 가장 종요로운 얘기일 듯하다. 이 말 뜻은 새해가 되면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한해를 시작하라는 것이다. 또 설은 새해라는 정신ㆍ문화적 낯섦의 의미로 생각되어 ‘낯 설은 날'로 생각되었고, '설은 날'이 '설날'로 바뀌었다거나 한 해가 지남으로써 점차 늙어 가는 처지를 서글퍼 한다는 "섧다"의 “섧”이 변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설날에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야 말로 한해를 잘 사는 바탕이 아닐까? 참고로 설날 아침에는 누구나 떡국 한 그릇을 먹는다. 여기서 떡국은 꿩고기를 넣고 끓이는 것이 제격이지만 꿩고기가 없는 경우에는 닭고기를 넣고 끓였다. 그래서 '꿩 대신 닭'이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밝아온 2014년은 갑오년 말띠해입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타난 기록에 따르면 말은 모두 신령스러운 동물이지요. 금와왕, 혁거세, 주몽과 같은 국조(國祖)가 탄생할 때에 말은 상서로운 징조로 나타나고, 백제가 망할 때는 말이 흉조를 예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특히 박혁거세 신화와 천마도의 백마는 최고 지위인 조상신이 타는 말로 인식되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고대 소설, 시조, 민요 따위에서는 신랑, 소년, 애인, 선구자, 장수가 타고 오는 것으로 나타나지요. ▲ 경주 황남동 천마총에서 출토된 국보 제207호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 중국 고대 지리서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천마는 날 수 있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천마가 나타나면 풍년이 들 징조라고 쓰여 있습니다. 또 천마는 하늘의 신령한 짐승으로 사슴 머리에 용의 몸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천마도 처음은 아마도 덕흥리 벽화고분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랜 세월 풍상을 겪어 선명하지 못하지만 천정에 나타난 말 옆에 천마지상(天馬之像)이라고 쓰여 있어 천마도임이 분명하지요. 세시풍속에서는 말을 여섯 가축의 하나로 생각하고 정월 상오일, 10월 말날에 특별히 말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얼마 전 인덕대는 참 멋진 광고를 했습니다. 영어나 한자말 없이 앓이라는 토박이말만 쓰고 영화배우면서 인덕대 교수인 신현준 씨가 환한 웃음을 웃고 있는 모습입니다. 결국 이렇게 멋진 광고는2013 경향광고대상 대학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인덕대는 말합니다. 이 광고가 의미하는 것이 인덕대를 알면 그 매력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라구요. 저희 한국문화신문 얼레빗은 지난해에 이어 올 갑오년도 안덕대처럼 한국문화앓이를 외칩니다. 한국문화신문 얼레빗을 통해 한국문화에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 문화 행복한 한국문화앓이를 시작해볼까요?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오늘은 양력 섣달그믐입니다. 전통적인 섣달그믐이야 음력으로 따져야하겠지만, 일단 섣달그믐을 달리 이르는 말로 궁랍(窮臘), 납미(臘尾), 눈썹세는날, 세경(歲竟), 세말(歲末), 세모(歲暮), 세밑(歲-), 세제(歲除), 세종(歲終), 세진(歲盡), 세흘(歲訖), 연말(年末), 연모(年暮), 연종(年終), 제석(除夕), 제야(除夜), 제일(除日) 같이 참 많은 별명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재미난 것은 “눈썹세는날”입니다. ▲ 섣달그믐날의 별명 “눈썹세는날”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예전 우리 겨레는 음력 섣달그믐날 밤에는 방이나 마루, 부엌, 다락, 뒷간, 외양간에 불을 밝게 밝히고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그 유래는 도교(道敎) 장생법의 하나인 경신수세(庚申守歲)에서 왔습니다. 도교에서는 60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경신일이 되면 사람 몸에 기생하던 삼시충(三尸蟲)이 사람이 잠든 사이에 몸을 빠져나와서 옥황상제에게 지난 60일 동안의 잘못을 고해 바쳐 수명을 단축시킨다고 하지요. 그래서 밤에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으면 삼시충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못함으로써 옥황상제께 자신의 죄가 알려지지 않아 오래살 수 있다고 믿은 것입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1895년(고종 32) 오늘 김홍집내각은 성년남자의 상투를 자르도록 단발령(斷髮令)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8월 20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처참하게 시해되어 반일의식이 한층 높아진 상태에서의 단발령은 백성 사이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습니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불감훼상(不敢毁傷) 효지시야(孝之始也)라는 공자(孔子)가 제자인 증자(曾子)에게 해 준 말로 너의 몸과 터럭(털), 그리고 살갗은 모두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감히 손상시키지 않게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니라.라는 윤리의식이 뿌리 깊었던 유생들에게는 목숨을 내놓으라 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지요. ▲ 1895년 12월 30일에 내린 단발령' 공문(왼쪽), 단발령이 내려지자 상투를 자르는 모습 고종과 태자가 압력에 못 이겨 상투를 자른 뒤 학부대신 이도재(李道宰)는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상소하고는 대신직을 사임하였고, 정계에서 은퇴한 원로 특진관 김병시(金炳始)도 단발령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하였습니다. 한편, 유길준이 당대 유림의 거두 최익현(崔益鉉) 선생을 포천에서 잡아와 상투를 자르려 하자, 그는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방송대학교가 학생을 뽑는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말을 마구 짓밟아도 되는가요? 도대체 "취UP"은 뭐고 "학UP"은 뭔가요? 그런 광고를 보고 입학원서를 내는 학생들은 뭔가요? 세종대왕이 지하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열세 살에 국악 공부 국악 교육자 연주‧지휘자로, 학자로 인재 양성 청주‧충남국악단 창단 주도 역할 中‧美서 공연 국악세계화 앞장서 [그린경제=김영조기자] 지난 12월 18일, 서울시 신청사 다목적홀에서는 ‘서울문화상’ 시상식이 열렸다. 이날 수상자로 서한범 등 7개 분야 7명이 서울의 문화예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수상자 가운데 서한범 한국전통음악학회장(단국대 명예교수‧68)은 특히 한국음악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것을 많은 이가 함께 누리는 데에 온 정성을 쏟은 국악인이다. 서 교수는 열세 살에 국악공부를 시작한 이래, 연주자로, 교사로, 교수로, 학자로 국악계의 수많은 인재들을 양성해 왔으며, 특히 국악교육과 학술활동, 해외교류 활동을 통해 국악의 저변을 확대해 온 공적이 큰 국악인이다. 또한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현재까지도 강의나 저술활동을 통해 꾸준히 이어오고 있으며, 이러한 서 교수의 노력 결과 서울 시민은 물론, 전국적으로 국악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의식수준은 과거와 달리 크게 향상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인 그의 공로를 살펴본다. 먼저 그는 국악 중흥을 위한 전문인 교육에 평생 앞장서 온 국악교육자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예전 50~70년대에는 세계여성백과가 집에 한질 정도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전해 내려오는 여성백과가 있었지요. 1809년(순조 9)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가 엮은 가정살림에 관한 내용의 책 《규합총서》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책은 언제 누가 지었는지 모르는 채 필사본 또는 목판본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1939년에 발견된 《빙허각전서(憑虛閣全書)》가 이 책의 제1부작으로 밝혀져 지은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가 엮은 가정살림에 관한 내용의 책 《규합총서》와 내용 가운대 봉임측(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규합총서》는 지은이가 서문에서 이 모두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해서 오래 살기 위해 먼저 힘써야 할 것이요, 집안을 다스리는 방법이라 진실로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요, 부녀가 마땅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삶에서 꼭 필요한 슬기를 적어 모은 것입니다. 《규합총서》는 주사의(酒食議)봉임측(縫則)산가락(山家樂)청낭결(靑囊訣)술수략(術數略)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주사의에는 장담그기, 술빚기, 밥떡과줄반찬만들기가 들어있고, 봉임측에는 옷 만드는 법, 물들이는 법, 길쌈,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지난 12월 3일 서울 종로구는 신문로 1가에 있었던 원각사를 옛 모습 그대로 되살릴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원각사(圓覺社)는 서울 종로구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었던 한국 최초의 서양식 사설극장입니다. 원래 이곳은 1902년 세운 협률사라는 국립극장이 있었는데 1906년 폐지령이 내려지자 1908년 친일파 이인직이 나라의 인가를 받아 이름을 원각사로 바꾸고 연극 전용극장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 원각사는 1914년 불이 나기 전까지 이인직의 장편소설 혈의누, 신세계 등 신극과 판소리, 무용, 영화 등을 공연한 근대식 공연문화의 요람이었지요. ▲ 근대 공연문화 요람이었던 원각사의 옛 모습(종로구 제공) 그런데 서울에는 이 원각사 말고 절 원각사(圓覺寺)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원각사가 그것인데 세조 때 지었고 보신각종을 보관했던 서울에서 가장 큰 절이었지요. 그런데 《중종실록》 9년 8월조에 보면 연산군 때 이 원각사는 운명을 다했습니다. 호조에서 원각사가 장차 쓰러지게 될 터인즉, 그 재목을 나라에서 영선(營繕, 건축물 따위를 새로 짓거나 수리함)하는 데 썼으면 한다.라고 아뢰자, 임금이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