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신문광고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눈길을 끌어야 한다지만 사기업도 아니고 지방자치단체가전북쌀을 광고하면서 米스코리아라고 합니다. 세종대왕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지요. 오늘 서울 국립국악원에서는 국무총리까지 참여하여 아름다운 우리말 쓰기 위한 단체 해오름식까지 했다는데 그런 번드름한 행사를 하면 뭐하나요? 이렇게 지자체부터 우리말을 해치고 있는데 말입니다. 전북도민들이 부끄러울 일입니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며칠 전 한국방송(KBS) 제1텔레비전 진품명품에서는 모두 7권의 고서적이 출품되었습니다. 표지에 《고사신서(攷事新書)》라고 적힌 책은 조선 후기의 문신 서명응(1716 1787)이 쓴 백과사전입니다. 이 《고사신서》는 어숙권(魚叔權)의 ≪고사촬요 攷事撮要≫를 손을 보고 보태 새롭게 쓴 것으로 사대부로부터 관리 그리고 일반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늘 억해 두어야 할 내용들이 적혀 있지요. ▲ 서명응의 백과사전 《고사신서(攷事新書)》 특히 책 1권에는 각 지역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는데, 경기라는 글자 아래에 양평고양 따위의 경기도 지역 길 이름, 명산과 큰 강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또 5권에는 점후(占候)라 하여 날씨에 따른 길흉을 점쳐 놓은 것은 물론 김치와 부의주(浮蟻酒,동동주) 따위 음식을 만드는 법도 적혀있다는 사실이 흥미롭지요. 1771년에 쓰인 책이지만, 당시 설명을 따라 지금 음식을 만들어 보아도 어려운 점이 없을 정도로 쉽게 쓰였습니다. 이밖에도 조선시대에는 많은 백과사전이 나왔는데 1614년(광해군 6)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시작하여 1644년(인조 22)에는 김육의 《유원총보(類苑叢寶)》, 1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김용환 선생, 노름판 파락호 위장 종가 전답 팔아 만주독립군 자금 보내 할일 했을 뿐 아무 말 말라, 외동딸도 몰라 ▲ 현 15대 종손 김종길 선생 (앞줄임) 마평 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뒷줄임) 학봉 김성일 선생의 13대 종손 김용환(金龍煥, 18871946년) 선생의 외동딸은 파락호로 알고 평생을 원망했던 아버지가 건국훈장을 추서 받던 날, 존경과 회한을 담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제목의 위와 같은 편지글을 남겼다. 시집간 날 외동딸이 그렇게 원망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김용환 선생은 안동에서 악명 높은 파락호였다. 당시 학봉 집안은 사방 십리 땅을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우리는 어렸을 적 양은도시락에 밥을 싸가지고 학교에 갔습니다. 그러나 예전 사람들에게는 양은도시락이 있을 턱이 없지요.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은 일하러 갈 때 동고량이라 부르는 밥을 담는 고리짝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 동고랑은 조그맣고 예쁘게 만든 것이고, 조금 큰 것은 설기라고 불렀지요. 지역에 따라 동고령, 동고리, 밥당석, 방장석, 밥차반지, 밥장석라고도 했습니다. ▲ 제주 사람들이 도시락으로 쓰던 동고량(오른쪽), 동고량을 넣은 약돌기 특히 동고량은 주로 소와 말을 돌보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쓰던 것입니다. 동고량은 옷을 담아 보관하거나 짊어지고 옮기는 데 썼던 네모다란 고리에서 모양을 따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대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제주처럼 날씨가 무더운 곳에서 물기가 많고 변하기 쉬운 보리밥을 보관하는 데는 대나무로 만든 동고량이 아주 좋았을 것입니다. 동고량은 주로 약돌기에 넣어 짊어지고 다녔지요. 약돌기는 물건을 담아 메거나 걸 수 있도록 된 망태기 같은 것을 말합니다. 야생 모시인 진이나 볏짚, 억새 잎 따위로 가늘게 노끈을 꼬아 얽었는데 약돌기를 도슬기착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동고량은 플라스틱이나 스테인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1993년 12월 12일 저녁 날이 어두워지는 때 충남 부여 능산리에서는 발굴단이 논바닥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물체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밤을 새워서라도 발굴할 것인가 아니면 날이 밝은 다음 다시 발굴할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논쟁이 벌여졌습니다. 그때 신광섭 국립부여박물관장은 밤을 지새우더라도 발굴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독려합니다. ▲ 진흙 속에 파묻혀 있던 백제금동대향로 이에 발굴단은 어둠을 불로 밝히며 차가운 논바닥 진흙탕 속에 엎드려 커피를 마시던 일회용 종이컵으로 조심조심 물을 퍼냅니다. 이윽고 진흙탕 속에서는 무령왕릉 발굴 이래 백제 고고학이 거둔 가장 큰 성과로 손꼽히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됩니다. 1천 4백여 년이나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대향로는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되었는데 아마도 진흙 속에 묻혀있었던 것이 공기를 차단한 때문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대향로는 맨 위의 봉황과 용 받침대까지 모두 네 부분으로 구성됐으며, 신선계, 인간계, 저승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뚜껑 꼭대기에는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 있게 서 있으며,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어떤 이는 한국 문화를 중국의 아류쯤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한복의 기원은 중국에 있다고도 말하며, 거문고도 중국에서 들어왔으니 중국 악기라 한다. 또 문인화가 중국에서 전래했으니 중국 그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과 중국 문화의 차이를 모르는 소치다. 1909년부터 1928년까지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왔던 독일인 안드레 에카르트는 고국으로 돌아가 1929년 ≪조선미술사≫를 펴냈다. 독일어로 된 이 책은 815 광복 이전 한국 미술을 일본어가 아닌 외국어로 맨 처음 소개한 책이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한국 미술의 특성을 서구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함으로써 해방 전까지 세계인들이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조선 미술을 다음처럼 평가했다. ▲ 열화당에서 번역해서 펴낸 안드레 에카르트가 쓰고 권영필이 뒤친 ≪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 조선 사람들은 동양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 고전적인 미술품을 만들었다.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과장하거나 왜곡된 것이 많은 중국의 미술이나, 감상으로 치닫거나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이는 일본 미술과는 다르다. 그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국악계는 전통예술을 총체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대중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다각적인 노력을 하고 있으며, 다양한 공연활동을 펼쳐 보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새로운 한 장르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단연 소리극이라 할 수 있다. 요즘 마당놀이라는 연희예술형태가 우뚝 서가면서 경기민요와 서도민요계에서도 새로운 가.무.악 형태로 소리극이라는 연희극을 창작 공연하고 있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민요인 서도소리는 한과 슬픔이 묻어나 있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구성지고 구슬픈 가락, 익살과 해학, 그리고 능청거림의 신명도 있다. 태조 이성계가 벼슬을 주지 않아 생겨난 설움에 탄생한 수심가, 이수일과 심순애의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 장한몽, 농촌계원들의 따뜻한 정과 마음을 나누었던 향두계 따위가 그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 청중들의 사람을 받아오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추풍감별곡도 있다. 이 추풍감별곡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전수조교인 유지숙 명창을 중심으로 2009년부터 국립국악원 예악당, 남산국악당 등에서 꾸준히 공연되어 왔으며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올해도 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우리의 가장 걸출한 위인 세종은 우리에게 엄청난 유산을 안겨주었다. 그 세종이 통치하던 당시 실제론 얼마만한 과학과 문화의 발전이 이루어졌을까? 어제 12월 13일 늦은 1시 30분에 세종대왕기념관 강당에서는 (사)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교육부와 한글재단이 후원하는 세종시대 과학문화의 재조명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첫 주제발표는 연세대 나일성 명예교수의 세종시대의 천문기상학이었다. 발표에서 나 교수는 세계적으로 아무 것도 없었던 15세기에 엄청난 천문학적 성과를 이룩한 것이 세종시대였다. 특히 세종은 오목해시계(앙부일구)를 만들어 백성에게 시간을 준 위대한 인물이었다.라고 진단했다. ▲ 발표자들 나일성, 한영호, 정호완(윗줄 왼쪽부터), 정우영, 이경록, 박종국(아랫줄 왼쪽부터) 이어진 발표는 건국대학교 한영호 교수의 기록 재구성을 통해 살펴본 《칠정산》의 감춰진 모습이었다. 그런데 청중들의 눈길을 끈 것은 다음 발표인 정호완 대구대 명예교수의 신기전의 체험학습 모색이었다. 정 교수는 임진왜란 3대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을 보통 알기로는 행주치마에 돌을 날랐던 부녀자들 덕에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지난 여름 철학이 있는 종가를 찾아서 취재를 위해 경북 의성의 만취당을 찾았었다. 그런데 만취당 이 있는 마을에는 인공숲이 있는데 이름이 사촌가로숲이었다. 사촌은 마을 이름이지만 가로는 한자말 街路가 아니고 토박이말 '가로세로 할 때의 가로였다. 다시 말해 가로숲'이란 마을을 가로지르는 숲이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었다. 흔히 이름은 한자말로 지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을 깬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한자로 해서 횡림(橫林)이라 했다면...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조선의 임금 가운데서 의학에 가장 관심 많았던 왕은 세조였습니다. 아버지 세종대왕이 늘 아팠던 것을 보아왔기에 의학의 중요성을 깨달은 탓으로 보입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임금이 신하들로부터 공부하는 경연(經筵)에서 경서 말고도 내의원 의원을 불러 의학에 대한 공부를 했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세조는 직접 《의약론醫藥論》도 썼는데, 여기에 의원을 8 등급으로 나눈 팔의론(八醫論)이 나옵니다. ▲ 궁중수라간 재현(한국문화재보호재단) 그런데 팔의 가운데 으뜸은 심의(心醫)지요. 환자의 마음부터 안정시켜서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치료의 근본임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다음이 식의(食醫)인데, 예부터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 하여 평소에 먹는 음식을 잘 조절하면 병이 생기지 않게 마련임은 물론 음식으로 치료도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드라마에서 중종 임금의 치료를 맡았던 대장금이 바로 식의인 게지요. 장금은 특히 보양식에 조예가 깊었고, 과로와 스트레스에 지친 임금을 위해 적합한 음식으로 기력을 보충해 주었던 것입니다. ▲ 궁중 보양식의 하나, 타락죽과 잣죽 아무리 좋은 약이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좋은 음식으로 다스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