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지금은 서울의 번화가가 강남과 강북으로 나뉘어 각기 으뜸가는 번화가였습니다. 말 그대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는 운종가는 양쪽으로 조정에서 관리하는 시전(市廛)이 자리하였는데 요즈음으로 치자면 상설시장인 셈이지요. 시전에서는 상점을 빌려주고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과 난전을 금지하는 특권을 주는 대신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바칠 의무를 지게 했습니다. 운종가에는 한해 내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기에 임금도 가끔 들려 민심을 살피기도 했습니다. 《정조실록(1783년)》11월 29일치에는 임금이 운종가에서 저자(시장) 사람과 나이가 많은 이들을 불러 민간의 병폐를 묻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또한 실학자 박지원도 운종가 탑골 언저리에 살면서 종로 상인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는가 하면 탑골 뒤편에 사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같은 제자들과 운종가에서 자주 만나곤 했지요. ▲ 서울역사박물관 전기수 그림 찍음 ▲ 서울역사박물관 저자(시장) 재현 모습 찍음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는 으레 이야깃거리가 넘쳐나게 마련인지라 전문 이야기꾼인 전기수(傳奇)와 재주꾼들이 저마다의 솜씨를 뽐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여리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지난 주 금요일(12월 6일)은 24절기 가운데 스물한 번째 대설(大雪)이었다. 24절기 가운데 봄 절기는 입춘부터 시작하여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가 된다. 또 여름 절기는 입하부터 소만, 망종, 하지, 대서, 소서까지다. 이어서 가을 절기는 입추를 비롯하여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이며, 겨울 절기는 입동과 함께 소설, 대설, 동지, 소한을 지나 대한으로 끝나게 된다. 그래서 대설이 지났다면 이미 겨울 속에 깊숙이 들어왔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러한 절기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농경사회에서는 농사를 지으려고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하기에 가장 좋은 날씨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계절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해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절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예부터 사람들이 쓰던 달력에는 태음력(太陰曆), 태양력(太陽曆), 태음태양력(太陰太陽歷) 따위가 있다. 태음력은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을 기준으로 만든 역법이다. 1년을 열두 달로 하고, 열두 달은 29일의 작은 달과 30일의 큰 달로 만들었다. 태양력은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1년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농암바위와 나, 누가 더 귀 먹었는가 / 기보도 오히려 총명하지 않음을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네 / 세월 흘러 흰머리만 남았는데 / 살림살이 졸렬하여 팔자에 맡겼다네 이는 안동의 이름난 효자인 농암 이현보(1467~1555) 선생이 지은 시입니다. 1512년 농암은 효를 실천하고자 애일당(愛日堂)이라는 정자를 지었는데 애일이란 날을 아낀다는 뜻으로 곧 부모님이 살아계신 나날을 아낀다는 뜻이지요. ▲ 《애일당구경첩 愛日堂具慶帖》 농암은 여기서 아버지를 포함한 아홉 노인들을 모시고 중국의 이름난 효자인 노래자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면서 부모를 모셨는데 농암 자신도 이미 70을 넘긴 노인이었습니다. 이를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라 했습니다. 농암의 이런 효행은 조정에 알려져 정사룡, 이장곤 같은 당대 명현 47명이 축하 시를 보내오고 김안국, 이언적, 주세붕, 이황 같은 선비들이 찾아와서 그의 효성스러움을 함께 칭송하게 됩니다. 또한 농암의 효행을 보고 선조임금은 농암가문에 적선積善이라는 글씨를 하사하지요. 지극한 효성 덕인지 농암집에는 94살의 아버지와 92살의 숙부, 82살의 외숙부처럼 장수 한 분들이 많았고 이들을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전주 사람들은 약속을 정할 때 마땅한 장소가 생각나지 않으면 전주 한복판에 자리 잡은 전주객사 (全州客舍)를 만남의 장소로 쓰고 있는데 지금 이곳 전주객사는 풍패지관(豊沛之館)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전주역 관광안내소에 따르면 전주객사로 소개되던 각종 홍보물이 풍패지관으로 바뀐 것은 2012년의 일이라고 하는데 오랫동안 불러오던 전주객사를 풍패지관으로 부르려니 낯설기는 할 것입니다. ▲ 전주 전주객사는 풍패지관으로 바뀌었다.(문화재청 제공) 각 고을마다 있던 객사는 객관이라고도 하며, 고려와 조선시대에 왕명으로 지어 벼슬아치들을 접대하고 묶게 한 일종의 관사를 말하지만 특히 전주의 객사는 다른 지역과 다릅니다. 풍패란 중국의 한나라를 세웠던 유방(劉邦)의 고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건국자의 본향을 일컫는 것이지요.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예부터 풍패지향이라 했고 전주객사는 풍패지관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풍패지관(전주객사)은 1473년(성종 4)에 전주서고를 짓고 남은 재료로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원래 주관(主館)과 그 좌우에 동익헌(東翼軒)서익헌(西翼軒)맹청(盲聽)무신사(武神祠)등의 건물이 있었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삼가 생각건대,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어서 넘어져도 부축할 길이 없고 위태로워도 붙잡아 낼 길이 없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중략) 사사로운 법 집행이 심하여 공정성이 씻은 듯이 사라져버린 것이 이때만큼 심한 적이 없을 것이며, 모든 일이 이리저리 찢겨 무너지고 있는데도 대소가 안일에 젖어 있는 것이 이때만큼 심한 적이 없을 것이며, 정치는 피폐되고 백성이 원망하며 재앙과 이변이 번갈아 나타나는 것이 이때만큼 심한 적이 없을 것입니다.이는 《효종실록》 19권 (1657년) 9월 21일치에 나온 지평 허목이 임금에게 상소 올린 글입니다.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 문화재청 제공 백성사랑 정신이 남달랐던 미수(眉) 허목(許穆 15951682) 선생은 1660년 10월부터 2년 동안 삼척부사로 재직하게 되는데 삼척이 동해에 가까워 해일이 자주 밀려와 백성의 피해가 커지자 해일 조수를 물리치고자하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세웠습니다. 이 비를 세우자 거짓말처럼 해일피해가 줄어들었다고 하지요. 척주동해비는 강원도 삼척시 정라동 육향산 산마루에 있는 높이 175㎝,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한째로 눈이 많이 온다는 대설(大雪)입니다. 그러나 24절기가 중국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꼭 눈이 많이 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대설 때 눈이 많이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제주에서 지난 11월 2일에 큰 바람과 큰 눈이 한꺼번에 사납게 일어 쌓인 눈이 한 길이나 되었다. 산에 올라가 열매를 줍던 자가 미처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길이 막혀 얼어 죽은 자가 91인이었으며, 기근 중에 여역이 치열하게 발생하여 죽은 자도 많았다. 현종실록 12년(1671) 2월 3일 ▲ 그림 운곡 강장원 화백 이때는 겨울이 깊어가는 즈음이며, 농사일이 한가한 시기이지만 가장 중요한 메주쑤기를 해야만 합니다. 부네야 네 할 일 메주 쑬 일 남았도다. 익게 삶고 매우 찧어 띄워서 재워두소 농가월령가 십일월령에 있는 노래입니다. 농사일이 끝나고 한가해지면 콩을 쑤어 메주를 만듭니다. 우리의 먹거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왔던 된장을 만드는 메주. 예전에 서양인들은 메주에 발암물질인 아플라톡신이 있다고 비웃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메주로 만든 된장을 훌륭한 항암식품으로 평가합니다. 씻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양풍에 휘말리어 습속마저 바꿔지니 / 머리 깎고 갓 없애고 이 무슨 재변이냐 / 방원(方圓)의 옛 제도를 모멸할 자 누구인가 / 이제부터 행동은 의식을 갖추누나 / 늘그막에 섬 구경 생각조차 못했거니 / 서울로 돌아갈 날 죽기 전엔 없을 것인 가/ 한 가닥 노래하고 오랫동안 서성대니 / 첩첩 싸인 저 봉우리에 석양이 비껴 있다 ▲ 면암 최익현 초상 위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유형시(流刑時) 일부입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7)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보고 제자들과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다가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면암 선생은 나라가 기울자 을사오적의 죄가 아비나 임금을 죽인 것 보다 더 크다는 상소를 올려 나라를 팔아먹은 이들을 처단 할 것을 상소하면서 1906년 2월 면암은 가묘(家廟)에 하직을 고하고 호남으로 떠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는데 이때 나이가 74살의 고령이었습니다. 면암 선생은 1833년에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스물 두 살 되던 해인 185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고 관직을 삭탈당
어초은 윤효정 선생 '삼개옥문적선지가(三開獄門積善之家)' 가문 최고 덕목으로 기려 고산 윤선도, 죽기 전 84세 때 극빈 이웃들 돕기 위해 '의장(義庄)' 마련 공재 윤두서는 가난한 이들 기근서 벗어나게 자활의 길 열어줘 후손들도 '대대로 나눔 실천' 속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종가' 만들어가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녹우당 취재를 위해 종손 윤형식 선생께 전화를 드렸다. 나눔을 실천한 종가를 취재하려고 한다는 말에 선생은 “전화 잘 주셨습니다. 녹우당은 대대로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집안의 내력입니다. 그래서 녹우당 유물전시관에도 그 점을 강조하고 있지요.” 한국에 종택과 고색찬란한 고택은 많지만 특별히 ‘나눔’이라는 주제에 맞는 집을 찾느라 매회 어려움을 겪던 가운데 윤형식 선생의 전화는 무척 반가운 목소리였다.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 듯 기자는 상쾌한 마음으로 전남 해남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은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종부가 우려내온 따뜻한 전통차도 맛볼 수 있었다. ▲ 종손 윤형식 선생 ▲ 녹우당 전경 대담 도중 걸려온 전화는 '한국 최고의 정원'으로 평가받고 있는 고산 윤선도의 금쇄동 관리인으로부터였다. “자네가 고생이 참 많네. 그렇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광화문을 지나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흥례문을 들어서면 작은 개울 곧 금천(禁川)이 나옵니다. 그러면 작은 다리 영제교(永濟橋)를 건너야 하는데 이 영제교 좌우로 얼핏 보면 호랑이 같기도 하고 해태 같기도 한 동물석상이 양옆으로 두 마리씩 마주보면서 엎드려 있습니다. 이덕무(李德懋, 1741 ~ 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비늘과 갈기가 꿈틀거리는 듯이 완연하게 잘 조각되어 있다"고 묘사된 이 석수는 무엇일까요? ▲ 영제교 양쪽에서 궁궐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천록상 매섭게 바닥을 노려보고 있는 듯 하지만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이 짐승들은 혹시라도 물길을 타고 들어올지 모르는 사악한 것들을 물리쳐 궁궐과 임금을 지키는 임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용머리, 말의 몸, 기린 다리, 사자를 닮은 회백색의 털의 모양인 이 동물을 유본예의 《한경지략》에 실린 “경복궁 유관기”에는 “천록(天祿)”이라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천록은 물론 해태 그리고 근정전 지붕 위의 잡상 따위는 원래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중국 황실의 거대하고 위압적인 석상들과 달리 우리나라의 석상들은 해학적이고 친근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우리나라 종가 가운데 해남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를 배출한 걸출한 종가입니다. 그 녹우당에 가면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여기서 눈에 띄는 것 하나는 한글 필사본인 한 여인의 수기 규한록(閨恨錄)입니다. 이 규한록은 1834년(순조 34) 윤선도(尹善道)의 8대 종부(宗婦)인 광주이씨가 지은 수기지요. 광주이씨는 종손 남편이 혼례를 치르자마자 죽는 기구한 운명에 처합니다. 더구나 가세가 기운 때에 대를 잇지 못할 위기에 맞닥뜨린 종손 없는 홀로된 종부였지요. 그러나 남편과 지낸 날이 사흘에 지나지 않았지만, 기구한 운명에 넋을 놓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 녹우당 종가의 종부 광주이씨가 쓴 규한록(閨恨錄) 멀리 충남 서천에 가서 공재 윤두서 3째 아들 덕훈의 5대손을 양자로 데려옵니다. 이후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냈음은 물론 침체해 가던 녹우당가를 다시 일으키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종부 광주이씨는 명문사대부가의 딸로서 규범과 예의범절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순종적이고 연약한 여인이 아닌 대쪽 같은 그리고 여장부다운 성격에 비상한 기억력과 슬기로움까지 갖춘 여인이었지요. 이 규한록은 광주이씨가 잠시 친정집에 가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