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망망대해 달려온 바람 / 파도 하얗게 부수며 / 거친 숨 몰아쉬는 곳 태고에 연모하던 그 누구 있어 / 화산으로 뜨겁게 솟아올라 즈믄해 끝없이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가? 이는 이종수 시인의 도리코지입니다. 도리코지는 제주시 내도동 알작지 해변 가까운 곳에 형성되어 있는데 지하 깊숙한 곳에서 지표를 향해 올라오던 마그마가 지표 근처에서 굳어진 다음 바닷물의 차별침식작용에 의해 현재의 암맥군으로 자리 잡은 곳입니다. 이 도리코지 암맥군을 제주환경운동연합 현원학 공동대표는 바다를 연모하여 줄지어 서 있다라고 말합니다. 180만 년 전부터 1,000년 전까지의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섬 제주도는 화산지형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지구과학적 가치가 크고 경관이 아름답고 신비로움을 간직한 섬입니다. 코지란 육지가 바다로 돌출한 지형을 말하는 곶'의 제주도 사투리로 제주도에는 서귀포시 성산읍 신양리에 섭지코지도 있습니다. 또한 육지의 곶으로는 울산의 간절곶, 황해도 장연의 장산곶, 포항의 호미곶들이 있지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신비한 형상의 '코지'는 자연이 선물한 또 하나의 볼거리입니다.(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2012-09-12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10여 년 전 충북 괴산 시골마을의 추수감사제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마을 아주머니들은 양동이에 막걸리를 담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막걸리를 한 잔씩 마시게 했다. 한 서너 순배쯤 돌자 사람들은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고 흥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다가오더니 내게 징채를 쥐여 주며 징을 쳐보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그때까지 한 번도 풍물 악기를 제대로 만져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무가내였다. 누구나 쉽게 칠 수 있으니 한번 쳐보란다. 할 수 없이, 사실은 적당히 취기가 오른 나의 객기에 결국은 엉겁결에 징채를 잡았다. 꽹과리, 장구 등 치배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연신 징을 울려댔다. 정말 흥겨웠다. 일생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적도 별로 없었던 듯하다. 만일 이것이 서양 음악이었다면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풍물굿은 가능하다. 풍물굿은 연주자가 관객이 되기도 하고, 관객이 즉석에서 연주자가 되기도 한다. 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한마음 되어 즐기면 그뿐인 것이 우리풀물의 멋이요 특징이다. ▲ 풍물굿 가운데 상모놀이 1) 풍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제주시 내도동은 반질반질하고 색이 다양한 조약돌로 이루어진 바닷가(알작지)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돌로 탑을 쌓아 큰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거욱대[防邪塔]”가 있는데 사람 키보다 높은 크기로 돌탑을 쌓아 올린 곳에 언뜻 보면 남성의 상징물 같은 뾰족탑이 서 있다. 이 거욱대는 마을 어느 한 방향으로 불길한 징조가 비치거나, 풍수지리설에 따라 기운이 허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액운을 막으려고 세웠는데 거기에 더하여 마을의 안녕을 지키며 전염병과 화재예방, 바닷일에서의 안전과 아이를 잘 낳게 한다는 속설까지 섞여 있어 섬지방인 제주의 고유신앙을 엿볼 수 있다. 내도동 거욱대는 제주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밖에도 제주시 이호동, 북제주군 한경면 용수리, 남제주군 대정읍 무릉리 등에 38기의 거욱대가 남아 있으며, 그 가운데 17기가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이 거욱대는 뭍의 솟대와 비슷한 구실을 하며 장승이나 미륵신앙의 흔적도 보인다. 이러한 거욱대를 비롯한 민속유물들을 마을에서 만나면 그냥 지나치기보다는 가만히 귀 기울여 옛 사람들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이동안 선생의 제자 이승희 명인의 진쇠춤 ▲ 이승희 명인의 진쇠춤 진쇠춤은 경기도 도당굿의 진쇠장단에 맞추어 추는 춤이다. 경기도 남부지방의 무당이나 재인청(才人廳) 출신의 광대들에 의하여 전해온다. 전해짐에 다르면 나라에 경사가 났을 때, 또는 풍년이 들었을 때 임금이 각 지방의 원님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원님들에게 춤을 추게 하였는데, 이 춤이 진쇠춤이었다고 한다. 이승희 명인의 춤에선 한국전통춤의 진수를 보는 듯하다. 멈춘 듯 춤추고 춤 추는듯 춤추는 정중동의 미가 온전하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사람들의 옷은 바지저고리 위에 두루마기 또는 도포차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신는 신들은 무엇이었을까요? 백성과 검소한 선비는 짚신을 주로 신었습니다. 그러나 양반들은 갖바치(가죽장인)들이 보통 가죽으로 만드는 갖신을 신었는데 갖신은 우선 그 형태에 따라 발목이 보이는 이(履)와 발목 위까지 올라오는 화(靴)로 나뉩니다. 특히 비단이나 가죽으로 만든 고급 신인 혜(鞋)를 신는 것이 보통이었지요. ▲ 조선시대 태사혜, 운혜, 흑혜, 당혜(왼쪽 사진 시계방향), 요즘 시판되는 갖신 혜(鞋)는 무늬에 따라 코와 뒤축 부분에 흰 줄무늬를 새긴 태사혜(太史鞋)가 있는데 이는 남자들이 주로 신던 신입니다. 그리고 여자신으로는 앞코에 구름무늬를 놓은 운혜(雲鞋), 코와 뒤꿈치에 당초무늬를 넣은 당혜(唐鞋)가 있으며, 검정빛 융으로 만든 흑혜(黑鞋) 따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른 땅에서는 이런 태사혜, 흑혜, 운혜, 당혜를 신었지만, 진땅에서는 물이 스며들지 않게 들기름에 절은 가죽으로 만든 진신을 신었지요. 한편, 사슴 가죽으로 만든 녹피혜(鹿皮鞋)와 궁중용 신인 궁혜(宮鞋)는 아무나 신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근 어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조선 중기의 학자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15341591) 선생은 선조 22년 백과사전 초고본을 썼습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의 역대 역사, 문화 나아가서는 흥망성쇠에 이르기까지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알지만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알지 못한다. 이것은 눈앞의 사물은 보지 않고 천리 바깥 것에만 눈을 돌리는 것과 같다.고 개탄하여 지은 책이 《대동운부군옥》으로 여기에는 단군 이래 조선의 역사, 지리, 문학, 철학, 예술, 풍속, 인물에 대해 조선 명종 임금 때까지의 사항이 20권 20책에 조목조목 정리되어 있습니다. 권문해 선생은 1560년 스물여섯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대구 부사와 공주목사 등을 지낸 분으로 퇴계 이황에게서 학문을 배워 이름을 날렸고, 특히 역사에 정통하였습니다. 《대동운부군옥》은 중국 송나라 음시부의 《운부군옥》의 체제를 빌어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각 분야별로 정리 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역사와 문화 따위를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지요. 질적으로도 뛰어날뿐더러 양적으로도 방대한 이 책을 권문해 선생 개인이 집필했다는 것은 어지간한 역사의식의 소유자가 아니고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일로 이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갓이 비록 낡았더라도 그것을 바르게 정제하려 해야 하고 옷이 비록 거칠더라도 그것을 모두 갖추려 해야 한다” 이는 선비의 윤리와 행실을 밝힌 《사소절(士小節)》을 쓴 규장각 검서관(檢書官)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한 말입니다. 이를 달리 말한다면 바로 격식을 갖추어 두루마기(또는 도포)를 입고 갓을 쓰거나 사모관대를 차려 입고 옷매무시를 바르게 하는 “의관정제(衣冠整齊)”가 되겠지요. ▲ 선비의 윤리와 행실을 밝힌 이덕무의《사소절(士小節)》, 갓집(오른쪽) 실제로 조선 사람들은 의관정제를 모든 일의 근본으로 보았고 그것이 곧 한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는 바탕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은 갓과 함께 갓을 보관하는 “갓집”을 정말 소중히 생각했지요. 갓집의 형태는 보통 두 가지인데 하나는 겉모습이 갓과 비슷한 형태로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추형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사진에 보이는 갓집은 덮개가 갓과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밑바닥은 동그란 모양과 네모, 팔각, 12각형도 있지요. 1866년 한국에서 순교한 프랑스인 드브뤼 신부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조선 사람 방에 들어가면 윗자리와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연기자의 일부 또는 전원이 얼굴에 가면을 쓰고 등장하여 연출하는 극을 가면극, 가면희 또는 탈놀음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탈놀음의 종류에는 하회별신굿, 봉산탈춤, 강령탈춤, 강릉탈놀이, 양주별산대놀이, 수영야류, 동래야류, 통영오광대, 고성오광대, 진주오광대, 가산오광대가 있는데 특히 서울 송파구에 송파산대놀이도 있다. 송파는 조선후기 전국 15대 향시 중의 하나로 서울, 경기 땅의 중요한 장터였다. 한강을 따라 강원도까지 배가 다니는 나루터가 있었고 말 행상, 보부상들이 온 나라에서 송파장으로 모여들어 1925년 대홍수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270여 호의 객주집이 성시를 이룰 정도였다. 따라서 장날뿐만 아니라 그 앞뒤 사흘 동안은 사람들로 붐비며 서울로 보내지는 경기미, 숯, 푸성귀, 곡식 등이 모두 송파나루터를 건넜다. 심지어는 임금님께 진상하는 꿀단지도 송파를 거친다.라는 속담이 생길 정도로 서울의 상업적 관문이었다. 이리하여 되쟁이, 말쟁이, 임방꾼(부두작업부), 잡심부름꾼, 뱃사람으로 넘쳐났으며, 주막, 운송점(창고 및 주문처), 우시장들로 흥청댔는데 그들이 추렴하는 기부금으로 크고 작은 명절과 장날에 놀이판을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은 1670년(현종 11년)무렵에 정부인 장계향 선생이 궁체로 쓴 필사본 조리서입니다. 이 ≪음식디미방≫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이 쓴 조리서이며,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이기도 하지요. ≪음식디미방≫ 은 예부터 전해오거나 장계향 선생이 스스로 개발한 음식과, 양반가에서 먹는 각종 특별한 음식들의 조리법을 자세하게 소개했지요. 경북 영양 장계향 선생 생가에는 음식디미방체험관이 있으며 여기서 ≪음식디미방≫을 계승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반도 동쪽에 ≪음식디미방≫이 있다면 그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서쪽 충남 홍성에는 《음식방문(飮食方文)니라》가 있고, 중심이랄 수 있는 충북 청주에는 《반찬등속》이 있지요. ▲ 장계향 선생의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표지엔 규곤시의방으로 되어 있다. / 숙부인 전의이씨의 《음식방문(飮食方文)니라》, 충북 청주의 《반찬등속》- 왼쪽부터 《음식방문(飮食方文)니라》곧 음식을 만드는 법을 적은 글이란 책은 신묘년(1891년) '문동(文洞)'이라는 호(또는 택호)를 가졌던 사운종택의 숙부인 전의이씨가 필사한 것입니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화향입주법, 두견주법,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동화란 무엇일까? 말 그대로 어린이를 위하여 동심을 바탕 으로 해서 지은 이야기다. 그런데 동화를 쓰는 작가들이 어른들이다 보니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쓰지 않는 작품들이 많다는 지적이 종종 나온다. 그렇게 동화를 책상 위에서 머리로 써내는 작가들이 많은 세상에 온 몸으로 체험하여 쓴 동화책이 최근에 나와 화제를 모으고 있다. 동화작가 이수옥 씨가 도서출판 얼레빗을 통해서 내놓은 《고향으로 돌아온 까치네》가 바로 그 책이다. 이 동화에 실린 10편의 이야기는 격동의 20 세기를 살아 낸 할머니가 손녀에게 조근 조근 들려주는 이야기다. 어쩌면 정보화 시대, 21 세기를 사는 요즘 어린이들에게 낯설게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낯설기로 치면 이 책을 쓴 동화작가 할머니 이수옥 씨도 하늘과 땅과 물이 옛날 같지 않아서 낯설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고 고백한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머리 위로 은하수 작은 별이 우수수 떨어질 것 같은 맑은 하늘을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꽃이 곱게 피던 고향 마을이 아파트 숲으로 변했고 가재를 잡고, 송사리를 잡으며 멱을 감던 맑은 시냇물도 감쪽같이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