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한복에는 원래 옷 자체에 물건을 넣을 수 있는 호주머니가 없기 때문에 실용적인 면에서 따로 주머니를 만들어 썼는데, 이것은 또한 장식품으로도 쓰였습니다. 주머니는 작지만 만드는 정성이 크고 복을 부른다는 뜻에서 귀한 선물로 여겼지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는데 각이 진 귀주머니(다른 말로 줌치)와 아래는 둥글고, 위는 모가 진 모양의 두루주머니(다른 말로 염낭)의 두 종류입니다. 주머니를 만드는 재료로 겉감은 비단이나 무명을 쓰고 안감은 무명이나 질이 낮은 비단을 썼습니다. ▲ 영친왕비가 찼던 진주장식 두루주머니(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장식용 주머니로는 영친왕비가 쓰던 진주장식 두루주머니가 화려하고 예쁩니다. 꽃무늬마다 잎과 술에 여러 개의 진주를 붙이고, 주머니둘레는 수십 개의 자연 진주로 화사하게 장식하였습니다. 생일이나 명절 때 또는 혼례 때나 새해 첫 돼지날과 쥐날에 왕실 어른들에게 바치거나 종친과 대신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지요. 콩을 볶아 붉은 종이에 싸서 주머니에 넣었는데 이것을 차면 액운을 물리치고, 한 해 동안 평안하다고 믿었습니다. 이 두루주머니는 영친왕비의 유품으로 영친왕 내외가 1922년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전국 판소리 명창들이 그를 찾기 시작하였음은 물론 가야금 산조를 비롯하여 거문고나 대금, 해금 등 문화재급 연주자들이나 대학 교수들이 앞 다투어 그에게 장고 반주를 청하기 시작하였으며 민요창이나 무용음악 공연무대에도 그의 반주는 빠지지 않았다. 그가 반주한 음반이 200여장을 넘고 있기 때문에 국악 FM방송에서는 ‘고수에 김청만’, ‘반주에 김청만’이라는 식으로 그의 이름이 자주 소개되었기에 ‘왜 맨 날 그 사람 것만 내 주느냐?’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 김영길 명인의 아쟁산조에 반주를 하는 김청만 명인(오른쪽) 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 회장의 증언이다. 그렇게 이 시대 최고의 판소리고법 명인인 김청만의 공개발표회가 어제(11월 23일) 저녁 5시 서울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 민속극장 풍류에서 있었다. 공연은 역시 그의 명성이 말해주듯 지정좌석이 아닌 임시의자를 수십 석 마련해야 할 정도로 성황이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했던가? 국악계에서 “ 김청만, 김청만!”하는 까닭이 여실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또한 “1고수 2명창”이 괜한 소리가 아님을 명실 공히 확인해주는 공연이었다. 연주자들이 김청만 명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요즘 길거리 간판이나 광고는 온통 영어 일색입니다. 그들이 언제부터 영어를 그렇게 잘하고 영어로만 살아 왔는지 모르지만 광고 대상자가 주로 한말글을 쓰는 이들인데도 영어 일색인 것은 마케팅 기법에도 맞지 않는 어리석은 짓이 아닐까요? 그런데 인덕대학교는 아주 신선하게 우리말로만 된 신문광고를 냈습니다. 영화배우 신현준(인덕대 방송연예과 교수)를 앞세운 광고는 맨 위 누리집 주소 말고는 영어를 전혀 쓰지 았았지요. 그뿐만 아니라광고의 제목까지도 <인덕앓이>라함은 물론"인덕대에 빠지다" 따위의 말을 써서 순우리말 광고의 모범을 보입니다. 인덕 관계자들의 우리말 사랑이 돋보이는 순간이지요. 영어광고의 홍수 속에 이런 우리말 광고는 오히려 대상자들에게 신선한 그리고 깊은 인상을 심어줄 것입니다. 어쩌면 같은 광고비를 들이고도 효과는 몇 배 더 거둘 수 있지 않을까요? ▲ 인덕대학교와 상대적으로 온통 영어투성이인 에이스침대 광고
[그림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무째로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입니다. 이때는 겨울에 접어들었지만 그나마 따뜻한 햇살은 남아 있어 ‘소춘(小春)’이라고도 하는데 "초순의 홑바지가 하순의 솜바지로 바뀐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역시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소설 즈음에는 겨울나기 준비에 여념이 없지요. 겨울을 따뜻하게 나기 위해서는 이불도 다시 손보고 솜옷도 만들어야 합니다. 특히 백로 즈음부터 거둬들이기 시작해 모아 놓은 하얀 목화로 어른들의 새 이불도 만들고, 나이가 찬 딸의 혼수이불도 장만해야 하지요. 목화는 두 번 꽃을 피웁니다. 여름철에 꽃을 피웠다가 가을에 접어들면 꽃이 피었던 자리에 다시 하얀 솜꽃을 피워내는 것입니다. 한여름 뜨거웠던 양기를 가득 머금고 다시 피어나는 이 꽃은 자신은 몸은 삐쩍 말라 가면서도 남은 기운을 모두 바쳐 피워낸 것이지요. 예전 춥고 배고픈 백성에게 모진 겨울을 나게 해 주었던 고마운 꽃이기에 "꽃은 목화가 제일이다."라는 속담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 소설이 되면 목화솜으로 새이불을 만든다(양주목화잔치에서) 여기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조선 초 원나라에서 목화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19세기말 기근으로 아사자들 늘자 고향서 구휼미 조달 홍주의병 거병 땐 239두 곡식 군량미로 아낌없이 쾌척 일제 눈치보지 않고 이순신장군 묘역 성역화에 성금 내놔 나눔없이 어찌 종가(宗家)가 이어지겠나 베풂의 역사 이어와 한글 조리서 '음식방문니라' 펴낸 분은 종손의 증조할머니 밤색두루마기 차림의 단아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은 조환웅(63) 선생의 집은 야트막한 학성산 아래 고즈넉한 모습으로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요란하지 않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툇마루가 기다란 본채가 이어졌고 다시 중문으로 들어서서야 선생이 손님을 맞이하는 방이 나온다. 안채 마루에는 벽면 가득히 찻잔을 진열해 둔 것으로 보아 예사로운 집이 아님을 느꼈는데 고운 백자 잔에 내놓는 씁쓰름하면서도 향이 그윽한 차를 마시며 무슨 차인가 생각하고 있는데 개똥쑥으로 만든 특별한 차입니다. 라고 운을 뗀다. 나눔의 철학을 취재하신다고 하셨죠? 정말 그렇습니다. 종가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려면 나눔을 실천하지 않고서야 가능할까요? 크든 작든 간에 이웃과 더불어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우리 종가는 특히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나는 50이 넘어서야 명주옷이나 모시옷을 처음 입었는데, 시골 있을 때 네가 명주옷을 입은 것을 보고 몹시 불쾌했었다. 대체로 이 두 종류의 옷은 대부(大夫, 종1품에서 종4품까지 벼슬한 이를 일컫는다)가 입는 옷으로서 대부(大夫)들도 입지 않은 이가 많은데, 더구나 평민으로서 대부(大夫)의 옷을 입어서야 되겠느냐? 이런 복식(服飾)은 모름지기 물리쳐 가까이 말고 검소한 덕을 숭상하도록 하여라.” ▲ 고산 윤선도 선생이 유배지에서 맏아들에게 보낸 편지, 고산 4대손이 "충헌공가훈"이라는 표지를 붙였다. 위 글은 충헌공 고산 윤선도 선생이 아들에게 내려준 가훈의 일부입니다. 50이 넘어서야 명주옷을 입었다니 선생의 성품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로 익히 잘 알려졌으며,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歌人)으로 일컬어진 문인이지요. 하지만, 고산 선생은 강직한 성품으로 간신배 이이첨 따위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유배되었고, 서인 우두머리 송시열에 맞섰다가 또다시 유배되었습니다. 이렇게 20년 동안의 유배생활이 이어졌지만 선생은 봉림대군(鳳林大君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요즘 언론에는 의사나 영양사들이 나와 온통 소금 유해론을 펼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소금 탓에 고혈압이나 동맥경화 등 성인병이 온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소금기(염분)가 많다며 세계 5대 건강식품으로 뽑힌 김치도 요주의 먹거리인 것처럼 말하는 이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한국인이 즐겨먹는 된장찌개를 포함한 온갖 찌개들까지 소금 투성이어서 문제 있는 먹거리처럼 말한다. 과연 그 말이 진실일까?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우리 겨레는 예부터 아무 탈 없이 김치와 같은 절임 반찬과 된장, 고추장 같은 음식을 오랫동안 먹어왔다. 요즘 언론에 나와서 소금 부정을 말하는 사람들 주장대로라면 우리 겨레는 이런저런 병들로 멸종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멀쩡하다. 아니 싱겁게 먹는다는 현대에 훨씬 더 성인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텐가? 자, 여기서 생각해보자. 사람은 소금물 속에서 태어난다. 아기가 자라는 엄마 뱃속의 양수는 바닷물과 같다고 한다. 또 사람의 몸 안에는 소금이 들어있는데 피 속의 소금기는 0.9%이고 세포의 소금기 역시 0.9%다. 그 0.9%의 소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일제가 조선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서울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朝鮮神宮]이라는 신사가 있었다. 그 신궁은 1925년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오카미), 명치왕 등 일본이 가장 큰 신으로 여기는 신들을 받들었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6월 현재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건립된 작은 규모의 신사 1,062곳을 세웠다. 그런데 종교시설물인 이 조선신궁 안에는 본전, 중문, 사무소 등과 함께 경찰관출장소도 있었다. 그 종교시설물 안에 경찰관출장소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일본 홍문당에서 펴낸 《일본통치하의 해외신사》란 책을 보면 일본 헌병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신사로 데려가 강제로 신사참배 시켰는데 이에 반발하여 온 나라에서 신사를 습격하여 부수고 불을 지르는 사건이 잇달았다고 한다. 조선신궁은 일제가 건국신화의 주신 천조대신과 조선을 강제 병합한 명치왕을 제신으로 삼고 조선 사람들에게 강제로 믿게 한 장소이다. 조선신궁이 있던 곳은 한양공원(구 남산식물원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도서관 터) 자리이다. ▲ 서울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 ※ 조선땅 곳곳에 신사를 만들어라! 신사로 조선인의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요즘 우리는 연예인들이 노름(도박)에 빠져 경찰 수사를 받는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 노름은 또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에 한국 쪽에서 조약에 찬성한 다섯 대신 곧 을사오적은 일제가 들여온 화투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그 일부는 패가망신한 것은 물론 심지어는 조선통독부가 경고를 내리기도 했다지요. 일제가 화투를 들여오기 전 조선은 노름으로 골패와 마작이 유행했습니다. 문헌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면 18세기 후반 한양 풍속을 자세히 묘사한 106수의 한시 한경사(漢京詞)에 다음처럼 골패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 김득신의 밀희투전 “길게 자른 종이에 날아갈 듯 꽃 모양 그려 / 둘러친 장막 속에 밤도 낮도 모를레라. / 판맛을 거듭 보자 어느새 고수되어 / 한마디 말도 없이 천금을 던지누나. / 네 사람 마주앉아 도박판을 열고서 / 골패 여덟 짝 나누어 쥐었네 / 그 중 한 놈 좌중 향해 제 끗발 자랑하며 / 1전으로 10전을 한꺼번에 따오네.” 또 김득신의 풍속화 밀희투전(密戱鬪錢)은 노름판의 긴박한 상황과 심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입니다. 안경 속으로 보이는 눈동자, 두 손으로 골패를 감추는 자세, 허리춤에 찬 두툼한
[그림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침수는 자다 깨다 하였는데 대체로 안온하였습니다. 밤새도록 묽은 죽을 모두 5차례 먹었으며, 활혈차(活血茶)는 음료가 생각날 때 마셨으며, 신기 등의 여러 증상은 한결같이 평순하였습니다. 의관들이 지금은 굳이 탕제를 복용할 필요가 없고 단지 활혈차를 간간이 마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뜻을 황공한 마음으로 감히 아룁니다. 이는 영조실록 37년(1761) 11월 28일 치 기록으로 세자의 병에 대한 의관의 소견입니다. 영조실록에는 활혈차 말고도 홍화자차(紅花子茶)같은 차가 나오는 데 이들 차가 치료제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따뜻한 겨울나기, 한방차가 좋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날씨가 차츰 추워져가는 이때에 건강도 지키고 마음도 따뜻하게 해주는 차로는 역시 한방차가 좋습니다. 한방차에는 단방약차(單方藥茶)라고 해서 감잎차, 모과차, 산약차, 생강차와 같은 한 가지 약초를 끓여 마시는 방법과 복방약차(複方藥茶)라 해서 여러 종류의 약초를 끓여 마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복방약초에는 질경감초차, 당귀금강차, 산약산수유차, 오미구기차, 오수유정향차, 생강대추차 같은 것이 있지요. 겨울철에 흔히 마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