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이번엔 전통춤을 추는 명인 후보를 소개한다. 한국무용의 정제된 멋과 함께 계곡 물 흐르듯 요동치는 춤사위로 한국무용의 참맛을 보여 온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보유자 후보(준인간문화재) 정명숙 명인이 추천하는 박지혜 씨다. 박지혜 씨는 고등학교 때 이미 한양대 콩쿨 최우수상을 받았고, 지난해 임방울 국악제 최우수상(장관상)을 받아 차세대 명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 춤은 어떻게 추게 되었나요? 어머니께서 춤을 무척이나 좋아하셨어요. 아마도 본인이 좋아하셨지만 외할머니의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을 딸인 제가 이루어주기를 원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7살 때 어머니께서 리틀앤젤스 비디오를 가져오셔서 보여주시고는 해보라고 하셨어요. 이후 잘 한다고 어머니나 어른들이 칭찬해주시는 게 신나서 학원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병원에서 퇴원한 날 춤 공부하러 갔을 정도로 우리춤을 좋아하셨습니다. - 정명숙 선성님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요? 영남대학교 국악과에 정재(궁중무용) 전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대구시립국악단 공연에 선생님께서 특별출연하셨어요. 이때 저는 선생님의 춤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금옥(金玉)같은 우리 민족 적의 노예(奴隸) 되단말가 용봉(龍鳳)같은 당당사부(堂堂士夫) 적의 압제(壓制) 받단말가” 위 시는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 선생이 쓴 <분통가(憤痛歌)> 의 일부로 민족의 자존심을 갖고 당당히 살던 우리 겨레가 왜놈들 아래서 압제와 핍박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한 통한의 느낌을 써 내려간 시다. 조선의 당당한 선비였던 백하 김대락 선생의 후손 김시중 어르신을 찾아가던 날은 내앞마을 콩밭이 누렇게 익어가던 늦가을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었다. 전에 한번 찾아뵌 적이 있는 김시중 선생은 경북 안동 내앞마을(川前里) <백하구려(白下舊廬)>에 살고 계시다. ▲ 백하구려 전경 <백하구려(白下舊廬)>는 대한제국 시절과 일제강점기 초에 국민계몽과 광복운동에 몸 바친 백하 김대락(1845∼1915)선생의 고택으로 사랑채를 확장하여 1907년 이 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개교했던 역사적인 유래를 간직한 집이다. 당시 협동학교의 교사로 쓰던 건물은 광복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처분되어 사라졌지만 지금도 건물이 서 있던 축대와 초석 일부가 사랑채 앞에 남아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아홉째인 입동입니다. 이날부터 겨울이 시작된다고 하여 입동(立冬)이라고 하지요. 이제 황소바람이 우리 마음까지 얼어붙게 하는 엄동설한이 눈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름다운 풍속에는 겨울이 드는 이때 나이 드신 어르신들을 위한 치계미(雉鷄米)라고 하는 것이 있지요. “치계미”란 입동(立冬), 동지(冬至), 섣달그믐날에 정한 나이 이상의 노인들을 모시고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는 풍속입니다. 밭뙈기 한 자락 없는 사람이라도 이날은 한해에 한 차례 이상 치계미를 위해 돈이나 곡식을 냈다고 하지요. 그마저도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입동 무렵 미꾸라지들이 겨울잠을 자기 위해 도랑에 숨는데 이때 도랑을 파면 누렇게 살이 찐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었고 이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끓여 노인들을 대접하는 도랑탕 잔치로 대신 했지요. 또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10월부터 정월까지의 풍속으로 기로소(耆老所, 조선 때, 일흔 살이 넘은 정이품 이상의 문관 노인을 예우하기 위해 세운 기구)에서도 나이 많은 신하들에게 우유를 마시게 했다고 합니다. ▲ 입동 즈음, 조선의 마음은 저렇게 까치를 위해 홍시를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조선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백과사전격인 책들이 나왔습니다. 먼저 이수광이 펴낸 《지봉유설(芝峰類說)》이 시작이고, 영조임금의 명으로 1770(영조 46)년에 나온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성호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따위가 그것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더하여 조선 후기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서유구(徐有, 1764 ~ 1845)가 홍만선의《산림경제》를 바탕으로 한국과 중국의 책 900여 종을 참고로 하고 시골 마을에서 보거나 수집한 문헌 자료를 정리해서 1827년(순조 27)에 엮어낸《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도 백과사전의 하나입니다. ▲ 백과사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임원경제지》를 쓴 서유규 《임원경제지》의 ‘임원’이란 전원, 곧 농촌을 말하고 ‘경제’는 삶의 물질적 기반을 뜻합니다. 곧 이 책은 사대부가 시골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은 것이지요. 이 책은 모두 113권 52책 250여 만 자에 달하는데 전체를 16부분으로 나누었기에 《임원십육지》 또는 《임원경제십육지》라고도 합니다. 《임원경제지》는 농업 일반을 다룬 본리지, 푸성귀를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어떤 이가 공을 세우려고 순검을 데리고 가서 순검들에게 면암 최익현 선생의 머리를 자르라고 하였다. 이에 순검들은 깜짝 놀라 ‘우리들이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대감의 머리에 칼을 대겠는가?’라며 꾸짖었다. 순검들이 크게 욕하고 가버리니 그의 흉계가 수포로 돌아갔다. 선생이 이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이름이 선비면서 처신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금수만도 못하다.’라고 했다.” ▲ 조선 말기의 학자며 애국지사인 면암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책 《면암집(勉庵集)》 이는 조선 말기의 학자며 애국지사인 면암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책 《면암집(勉庵集)》에 나와 있는 1895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당시는 단발령이 내려진 상태지만 선생의 머리는 그 누구도 자를 수 없었습니다. 또 한 일화를 보면 1906년 홍주(洪州) 의병 80명이 먼저 갇혀 있었는데 왜놈 헌병이 칼을 가지고 와서 머리를 자르려고 하다가 면암 선생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며 모두 달아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당시 선생의 기개는 그 누구도 짓누를 수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생은 다른 이 같으면 쉽게 올리지 못할 서슬 퍼런 상소를 여러 차례 했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구월 한달 드는 액은 시월 무시루로 막으시고 시월 한 달 드는 액은 동짓팥죽으로 막어내고 동짓달 한달 드는 액은 흰떡으로 막어내고 ▲ 남이장군 12거리 가운데 부군맞이거리(명성황후 옷을 입고 태평성대를 비는 의식) 위는 남이장군사당굿 가운데 부정청배 내용 중 일부이다. 부정청배란 굿마당의 부정한 것을 막고 참석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신을 청해오는 굿이다. 한 달 동안 드는 액을 다음 달의 떡이나 팥죽으로 막는다는 내용이 재미나다. 남이장군사당굿에 대해 하효길, 홍태한, 하을란 씨 등이 펴낸 책에서는 남이장군사당굿은 서울특별시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로 서울을 대표하는 마을굿이다. 걸립부터 시작하여 꽃받기, 장군출진, 유식제의, 사당굿, 사례제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매우 다채로운 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적극 참가하는 살아있는 축제의 현장이다. 과거의 전통을 오늘 어떻게 되살려야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이다.라고 설명한다. ▲ 남이장군 12거리 가운데 사당에서 용기를 모셔야 위용을 떨친다 ▲ 남이장군 12거리 가운데 신장거리(오방신장기를 들고 만인들의 기를 좋게 하여 그해의 운수대통을 비는 행사)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충북 충주에 가면 우리나라 한 가운데 자리 잡았다고 하여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국보 제6호 중원탑평리칠층석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이 있습니다. 이 탑은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돌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돌탑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지요. ▲ 충북 충주에 있는 중원탑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했습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추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날렵한 기운을 불어넣습니다. 탑 꼭대기는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 아닌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줍니다. 이 탑에는 몇 가지 전설이 내려옵니다. 먼저 통일신라시대 이곳에서 보랏빛 연기가 나 왕기가 있으니 이를 제압해야 한다고 해서 세웠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 신라 선덕여왕 때 금가면 반송산에 절을 세웠다가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이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1908년 경성감옥으로 개소되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수난처로, 해방 이후 독재정권에 항거한 민주화운동가들의 고난처였던 우리나라 독립과 민주화 역사의 현장 서대문형무소. 이 서대문형무소는 1998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관장 박경목)으로 재탄생했다. 독립운동가들과 민주화운동가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심도 있는 역사물 전시ㆍ교육ㆍ체험 학습을 통해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개관 15돌 기념 학술심포지엄 모습 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개관 15돌을 맞아 뜻 깊은 심포지엄을 열었다. 11월 2일 늦은 2시부터 서대문공원 안 독립관 무궁화홀에서 서대문구 주최, 서대문도시관리공단 주관의 4ㆍ19혁명기 서대문형무소가 그것이다. 먼저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정일택 이사장의 인사말씀이 있었고,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의 환영사가 있었다. 문 구청장은 환영사에서 프랑스는 우리보다 짧은 피지배 역사였지만 5만의 나치협력자를 처단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친일과 단절했는지 반성해봐야 한다. 역사는 가르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1. 임금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환구단 ▲ 일제에 철거되기 이전의 환구단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환구단(圜丘壇)에 올라 제사를 지내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호천 상제위(昊天上帝位)황지기위(皇地祇位) 및 태조위(太祖位)에는 임금이 친히 삼헌(三獻)을 행하고, 대명위(大明位) 및 풍운뢰우위(風雲雷雨位)에는 세자가 삼헌(三獻)을 행하고, 야명위(夜明位) 및 동남북서해(東南北西海), 악독산천위(岳瀆山川位)에는 영의정 정인지가 삼헌을 행하였는데. 위는 세조실록 6권, 3년(1457)에 나오는 기록으로 세조가 면복을 갖추고 환구단에 제사를 올렸다는 내용이다. 환구단이 맨 처음 설치되어 제사를 드렸던 것은 고려 성종 2년(983) 정월이었는데 이후 설치와 폐지를 계속 되풀이하다가 세조 2년(1456)에는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이후 세조 10년(1464)의 제사를 마지막으로 환구단에서의 제사는 중단되었다. 그러다 환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이다. ▲ 현재 조선호텔
[그림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달이 맨 먼저 뜬다하여 달동네라 이름이 붙은 마을에서 살아 보셨나요? 사실은 맨 먼저 뜨는 것이 아니라 마을이 높은 지대에 있어 맨 먼저 보이는 것이겠지요? 한여름 불볕더위가 내려쬐는 때와 한겨울 칼바람이 가슴 팍으로 파고들 때 그리고 눈이 한 길이나 쌓인 때는 오르내리기가 엄청 힘들었던 마을입니다. 한국전쟁이 이후 피난 온 사람들이, 그리고 농촌에서 살던 사람들이 산업화 이후 단봇짐 하나 지고 쫓기듯 도시로 와 오갈 데 없어 높은 지대에 이른바 일본말로 하꼬방이라 불렀던 허름한 판잣집을 다닥다닥 짓고 살던 바로 그 마을입니다. ▲ 달이 맨 먼저 뜬다는 달동네. 사람 사는 곳이었다. (선녀와나무꾼에서 찍음) 달동네는 공동변소 하나로 수십 가구가 살던 곳이라 아침만 되면 먼저 똥을 누기 위해 달리기를 하며 전쟁을 치르던 곳이었습니다. 이웃집과는 지붕이 다닥다닥 맞닿아 있고, 수도가 올라오지 않아 펌프 하나로 수십 가구가 먹을 물과 씻고 빨래할 물을 감당해야 했지요. 쌀밥은 구경할 수 없는 대신 정부에서 나눠주는 옥수수 가루로 죽을 쑤어 먹고, 누런 코를 질질 흘리는 아이들은 굶어서 부항이 드는 일이 많았던 그런 마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