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그때는 개찰구 쪽으로 먼저 나가는 쪽이 힘이 세다고 생각하여 한일 간에 서로 먼저 나가려고 했어요. 우리 한국 학생들 수는 적었지만 더 야물었지요. 기차 속에서 즈그들 수가 더 많은 게 까불까불해도 한국 학생들이 눈을 크게 뜨면 야코가 팩 죽어 말도 못하지라우. 나주역 현장에 있었던 댕기머리 애국소녀 이광춘 여사는 일흔의 나이가 되어 잡지 예향, 1984년 11월호, 당시 71살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은 이후 광주학생운동으로번졌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 나주역에 멈춰있던 통학열차에서 내려 개찰구를 빠져나가던 조선인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일본인 남학생이 잡아당기며 희롱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조선인 남학생들이 격분하여 일본인 학생과 난투극을 벌이게 되고 조선인 학생들은 모두 잡혀가게 됩니다. 10월 30일의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은 이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으로 번지게 되지요. 이날을 계기로 거족적 학생운동이 일어나 전국 194개 학교에서 5만 4,000여 명이 민족 차별과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를 요구했고 만주중국일본의 동포도 호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우리의 위대한 글자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지 480여년이 지나도록 표기법 체계를 갖추지 못해 사람마다 소리 나는 대로 닿소리(자음)과 홀소리(모음)을 이어 붙여서 써왔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한글학자들은 한글 바로 세우기가 자주 국가를 준비하는 일임을 깨달았지요. 그래서 이들은 조선어학회를 만들고 총칼 없는 자주독립을 꾀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든 이 《한글마춤법통일안》이 아니었다면 일제 총독부에서 만든 언문 철자법을 강제로 써야 했을 것입니다. 1930년 이윤재, 김윤경, 최현배, 이극로 등 12명은 그 일의 첫 단계로 《한글마춤법통일안》을 만들 것을 결의했고. 이후 3년 동안 125차례, 총 433시간의 회의가 열렸지요. 표음(表音)과 표의(表意)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극로는 의견 대립으로 의자를 던지고 퇴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집에 찾아가 겨레를 위해 참으시라고 설득했다고 회고했습니다. ▲ 1933년판 《한글마춤법통일안》표지, 《한글마춤법통일안》을 기대하는 조선일보 하우 전 기사 이런 뼈를 깎는 노력 끝에 1933년 10월 29일 드디어 총 65항의 《한글마춤법통일안》을 발표하기에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자상한 어머니 흰 머리 되어 강릉에 계시는데 慈親鶴髮在臨瀛(자친학발재임영) 이 몸 서울로 홀로 떠나는 심정이여 身向長安獨去情(신향장안독거정) 어머니 계신 북촌으로 고개 돌려 바라보니 回首北村時一望(회수북촌시일망) 흰 구름은 낮게 드리우고 저문 산은 푸르러라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청) 이는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의 읍별자모(泣別慈母)라는 시입니다. 늙으신 어머니를 임영(강릉의 옛 이름)에 두고 한양으로 향할 때 대관령마루에서 친정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을 바라다보는 심정이 느껴져 지금도 코끝이 뭉클해지는 노래입니다. 수백 년이나 지난 오늘 날에도 먼 곳으로 떠나는 아들딸들은 늙으신 부모를 떠 올리며 가슴 아파하는 게 인지상정일 텐데 어찌된 일인지 유학이니 뭐니 해서 집 떠나는 사람이 많은 오늘 날 사임당 같은 시를 썼다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 강릉 오죽헌에 있는 신사임당 영정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였던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스스로도 시서화에 능했던 신사임당은 7남매를 두었는데 자녀 교육을 할 때에는 스스로 아이들의 모범을 보인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이가 어려서부터 글을 가까
[그림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 단종비 정순왕후의 정업원과 금남시장 ▲ 단종비 정순왕후를 돕기 위한 금남(禁男)이 있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순조 임금 때 펴낸 ≪한경지략≫이란 책에 보면 동대문 밖 동묘의 남서쪽에는 한양에서 가장 큰 푸성귀(채소)시장이 있었다. 그런데 이 시장은 남자들이 드나들 수 없었던 금남구역이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는 단종비인 정순왕후 송 씨가 단종이 죽고 과부가 된 뒤 초막을 짓고 살았던 정업원(淨業院)이 있었다. 이후 세조는 정순왕후가 동냥으로 끼니를 잇는다는 소문이 돌자 그 근처에 영빈정이란 집을 짓고 살게 했지만 정순왕후는 영빈정에 들어가기를 거절했다. 또 조정에서 식량을 주어도 완강히 거부하고, 말년에는 베에다 자줏물 들이는 염색을 하면서 겨우 풀칠을 했다. 그래서 이 근처 마을을 자줏골이라고 불렀는데 장안 부녀자들이 정순왕후를 도우려고 앞 다투어 몰려들었다. 그런데 조정에서 이를 금하자 시장을 만들고 장사하는 척하면서 정순왕후의 생계를 도왔으며 혹시 조정에 밀고할까 봐 남자들은 일절 출입을 금하였다. ** 성균관 선비와 종의 딸 사랑이 서린 곳, 정고개 ▲ 양반과 종의 슬픈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 장구를 치게 된 계기는? 제가 사는 경기도 광명시에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0호 광명농악보존회가 있습니다. 또 제가 다녔던 충현고등학교는 광명농악 전수지정학교였지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 자연스럽게 장구를 하게 되었는데 저희를 가르쳐 주신 광명농악 예능보유자 임웅수 선생님은 무척 엄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다 처음 장구를 배울 때 선배들은 무섭고 장구는 잘 쳐지지 않고 손가락엔 피가 나고 해서 솔직히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애먼 장구와 많이 싸웠지요.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장구를 해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 아닐까? 남들도 하는데 나만 안 될 것 없잖아 하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10년 넘게 정진하고 아직 어리지만 조금 나이가 들고 보니 장구를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구를 안했다면 무얼 했을까 생각할 때 지금의 제가 있게 해주신 선생님의 은혜가 정말 큽니다. 광명농악에는 김종미 씨 말고도 임웅수 선생의 여러 제자가 있을 것. 왜 종미 씨를 추천했는지가 궁금했다. 대담하다 말고 전화를 걸게 했다. 임웅수 스승에게 굳이 종미 씨를 추천한 까닭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삼면이 산으로 막혀 있고 한 쪽은 큰 강이 흐르고 있는데 우거진 잡초와 험한 바위 사이에 있는 마을 집들은 모두 나무껍질로 기와를 대신하고 띠풀을 엮어 벽을 삼았으며 논밭은 본래 척박해서 물난리와 가뭄이 가장 먼저 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항산(恒産, 늘 있는 수입)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운데 줄임) 그래서 풍년이 들어도 반쯤은 콩을 먹어야 하는 실정이고 흉년이 들면 도토리를 주워 모아야 연명할 수 있습니다.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하였을 때, 거의 파산 상태의 고을을 다시 일으키고자 임금에게 올린 진폐소의 일부이다. ▲ 금게 선생의 철학과 청빈한 삶이 담긴 금계집(退溪集) 그의 글은 이어진다. 그리하여 역사(役事)를 못하고 도망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일족과 인근 이웃에 책임을 분담시켜 부세를 징수하려고 하니 이들이 어떻게 배를 채우고 몸을 감쌀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물고기를 끓는 솥에서 키우고 새를 불타는 숲에 깃들게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아무리 자애로운 부모라도 자식을 잡기 어려운데 임금이 어떻게 백성을 끌어안을 수 있겠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조선 중기의 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조선후기 실학파의 시조입니다. 그가 살았던 때는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이 일어나고 삼정(三政) 곧 나라 재정의 바탕을 이루었던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문란까지 겹쳐 농민들의 삶을 파괴하였지요. 유형원은 이러한 조선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 폐단을 바로잡고자 노력한 책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썼습니다. ▲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쓴 개혁교과서 《반계수록(磻溪隨錄)》 책 이름에서 반계는 그의 호이고, 수록(隨錄)은 붓 가는대로 쓴 기록이란 뜻이지요. 하지만 이는 겸손한 표현이고, 결코 한가하게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시대의 아픔을 담아 개혁 방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조선 후기 유학자 매천 황현(黃玹)이 반계 유형원을 가리켜 천하의 재상감이라 칭송하기도 했지요. 그는 사회개혁가이기도 하지만, 이익이 쓴 유형원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문예, 병법, 천문, 지리, 의약은 물론 산학 (算學)에까지 능통한 학자로 팔방미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재야사학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개혁교과서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근현대 민족 교육하면 누구나 도산 안창호 선생을 떠올린다. 하지만 학산 윤윤기 선생도 있음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1900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난 학산 윤윤기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서 6.25전쟁까지 이어지는 암흑의 반세기를 치열하게 살아간 민족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다. 선생은 안양공립보통학교 훈도로 부임, 일제의 감시를 피해 민족교육을 했다. 또 천포간이학교, 보성보통학교를 거쳐 1940년 4월 12일 무상교육기관인 양정원의 문을 열고 1974년 문을 닫을 때까지 2,000여명에 이르는 졸업생을 내보냈다. 해방 전까지 몽양 여윤형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으며 건국동맹 비밀조직원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 계열에서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으나 여운형의 암살과 이승만 정부의 수립으로 뜻이 꺾였다. 좌와 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입장에서 갈라선 민족을 화해시키려 노력하던 선생은 6.25 전쟁이 일어난 한 달 뒤인 1950년 7월 22일 경찰에 의해 무참히 살해 되었다. 향년 51살이었다. ▲ 학산 선생 흉상 제막식이 시작되기 전 흉상은 저렇게 가림막에 가려져 있었다. 그동안 조명되지 못한 학산 선생의 처지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한밤중에 된서리가 팔방에 두루 내리니, 숙연히 천지가 한번 깨끗해지네. 바라보는 가운데 점점 산 모양이 파리해 보이고, 구름 끝에 처음 놀란 기러기가 나란히 가로질러 가네. 시냇가의 쇠잔한 버들은 잎에 병이 들어 시드는데, 울타리 아래에 이슬이 내려 찬 꽃부리가 빛나네. 도리어 근심이 되는 것은 노포(老圃, 농사일에 경험이 많은 농부)가 가을이 다 가면, 때로 서풍을 향해 깨진 술잔을 씻는 것이라네(半夜嚴霜遍八紘 肅然天地一番淸 望中漸覺山容瘦 雲外初驚雁陳橫 殘柳溪邊凋病葉 露叢籬下燦寒英 却愁老圃秋歸盡 時向西風洗破).” ▲ 상강 즈음의 농촌 풍경(사진작가 우순자 제공) 위 글은 권문해(權文海)의 《초간선생문집(草澗先生文集)》에 나오는 상강 즈음을 아름답게 표현한 내용이지요. 오늘은 24절기의 열여덟째 절기 상강(霜降)입니다. 말 그대로 서리가 내리는 때인데 벌써 하루해의 길이는 노루꼬리처럼 뭉텅 짧아졌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면 하룻밤 새 들판 풍경은 완연히 다릅니다. 된서리 한방에 푸르던 잎들이 수채색 물감으로 범벅을 만든 듯 누렇고 빨갛게 바뀌었지요. 이때는 추수도 마무리되고 겨울채비에 들어가야 합니다. 갑자기 날씨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과 복지정책은 오늘날보다 훨씬 선진적이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엔 장애가 있어도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벼슬을 할 수가 있었지요. 예를 들면 조선이 세워진 뒤 예법과 음악을 정비하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공을 세운 허조(許稠, 1369~1439)는 어려서부터 몸집이 작고 어깨와 등이 구부러진 꼽추였습니다. 하지만 허조는 좌의정까지 오를 수 있었지요. 또 간질 장애인이었던 권균(權鈞, 1464~1526)은 이조판서와 우의정에 오르고 영창부원군에까지 봉해졌습니다. ▲ 사팔뜨기지만 영의정에 오른 체재공(왼쪽), 외눈이지만 뛰어난 그림을 그린 최북, 장애인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한 홍대용의 《담헌서》 그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는 장애인을 위한 여러 가지 지원정책을 펼쳤는데 장애인에겐 조세와 부역을 면해주고, 죄를 지으면 형벌 대신 면포로 받았으며, 연좌제에도 적용하지 않았지요. 또한 시정(侍丁), 곧 활동보조인을 붙여주고, 때때로 잔치를 베풀어주며 쌀과 고기 같은 생필품을 내려주었습니다. 또 동서활인원이나 제생원 같은 구휼기관을 만들어 어려움에 처한 장애인을 구제하였지요. 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