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복 선생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충남 서천 이하복 종가를 찾아가는 날, 서둘러 용산에서 무궁화 열차를 탔다. 얼마 만에 기차를 타보는 것인가?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들판이 시야에 들어오기도 전에 나는 오늘 방문하는 청암 이하복(靑菴 李夏馥, 1911~1987) 선생에 대한 자료를 다시 확인해보았다. 청암 선생의 삶의 발자취를 떠나는 길은 미리 친절하게 교통편을 알려준 종부 이옥진 여사 덕에 헤매지 않고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취재를 요청하느라 전화를 건 기자에게 종부는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서천역에 내려 택시를 탔다 그리곤 이내 동강중학교로 방향을 잡았다. 학교 행정실장님의 안내로 아담한 학교 전경을 찍었다. 이곳은 청암 선생이 세운 학교이다. 50여명이 채 안 되는 작은 학교지만 교정에서 만난 학생들은 기자를 보자마자 너나없이 해맑은 인사를 한다. 이하복 선생의 철학이 전해졌을까? 학생들에게 설립자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무슨 일을 하셨는지 자세한 설명은 주저했지만 설립자가 이하복 선생님으로 대단히 훌륭한 분이었음은 알고 있었다. 취재의 시작이 정말 기분 좋다. 10대 때 소작인 아이들에 야학 어른들 반대에도 여동생 몰래 소학교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 정가(가곡)를 선택하고 배우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정가(正歌)란 3가지 노래 곧, 가곡, 가사, 시조의 바른 노래를 일러 부르는 이름입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대전시무형문화재 제14호 가곡 예능보유자이십니다. 어릴 적부터 언론으로부터 천재시조인의 칭호를 받으셨던 어머니의 아들로써 자연스럽게 우리음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갓난쟁이 때부터 정가를 들으며 자랐지요. ▲ 김재락 독창회 때 무형문화재 가곡 예능보유자 김경배 선생님과 14살 때 처음 가곡 편락을 사람들 앞에서 힘차게 불러서 주이 사람들이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어릴 적엔 재미도 없고 이해가 안 되는 노래였지만 차차 이 노래가 우리의 소중한 천년의 음악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교시절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 부모님께서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보유자이신 김경배교수님이 계시는 경북대학교 예술대학 국악학과를 소개해주셨고 이곳에 진학하면서 가곡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 다른 장르 예를 들면 민요라든지, 판소리나 기악에 견주면 인기가 덜한 것이 정가인데 정가를 선택한 데 대한 후회는 없는가요? 한때는 인기종목인 민속악을 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기도 했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음력으로 10월 초 3일은 우리의 력사(歷史)에 의지하야 4,382년 전 이날에 우리의 처음 임금인 단군(壇君)이 이 세상에 나려왓고, 그 뒤 125년 곳 지금으로부터 4,257년 전 이날에 처음으로 단군이 임군이 되야 배달(조선)이라는 나라를 건설한 날이라 한다. 그래서 그 뒤에 단군의 교화인 대종교(大倧敎)를 밧드난 조선에서는 이날을 개텬절(開天節)이라고 뎡하야 긔념하여 왓스며 그 뒤에 림시정부에서는 이날이 대종교인 종교에서만 긔념할 이 아니라 실상인즉 우리민족 전톄가 이날을 긔념하야 우리의 나라력사가 처음으로 비롯한 것을 긔념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겟다 하야 이날로써 건국긔원절(建國紀元節)이라고 특별한 일흠을 정하야 우리 민족전톄가 이날이 우리의 경축할만한 경사로운 날이라는 것을 정하엿다. ▲ 1024년 11월 9일 건국기념절(지금의 개천절)을 성대히 한다는 동아일보 기사 위는 동아일보 1924년 11월 9일 기사로 오늘날 개천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음력으로 모든 행사를 치렀지만 일제의 마수가 좁혀오던 조선 땅에서는 수천 년 내려오던 음력을 폐지하고 모든 명절을 양력으로 바꾸라고 합니다. 순종 1년 190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코미디언 누구누구를 멤버로 해서 지방공연을 가도 최창남 선생이 빠지면 흥행이 안 들어요. 벌써 저쪽(초청지역)에서 먼저 최창남이 오느냐 안 오느냐 부터 묻고 들어오는 겁니다. 온다고 해야 계약이 성사 되는데, 뒤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안 온다고 할 수 없지 않아요? 당연히 온다고 하고 계약을 하지요. 그 정도였어요. 공연이 끝나면 남녀 할 것 없이 팬들이 최창남을 보기 위해 구름같이 몰려 들었으니까요. 60~70년대 공연단을 이끌었던 김뻑국 선생의 증언이다. 그만큼 당시는 어떤 내로라하는 명인명창 여럿도 최창남 선생 한 사람 인기만 못 했다는 것이다. 그런 최창남 명창이 어제 (10월 1일) 저녁 7시 중요무형문화재전수화관 민속극장 풍류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 최창남전수소 주최,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문화재청, 국악방송 후원으로 선소리산타령 보유자 최창남 제6회 정기공연이 열렸다. 1세기에 한 사람 날까 말까하다는 위대한 최창남 명창은 이제 나이가 많은데다가 얼마 전 교통사고를 당해 앉아서 불러야 하기에 서서 불러야 하는 산타령의 제멋이 날지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비록 의자에 앉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제주도 애월읍 구엄리에는 구엄포구가 있는데 엄창포라고 불렀습니다. 이 포구 동쪽 바닷가 언덕배기에는 옛 등대 ‘도대불’이 있지요. 도대불은 전기로 켜는 등대가 들어오기 전에 포구를 밝혀 주었던 등대의 원형입니다. 도대불의 관리는 보재기(包作人, 어부)들이 바다로 나가면서 켜 두고 새벽에 고기잡이를 마치고 들어오면 껐다고 합니다. ▲ 제주도 애월읍 구엄포구의 도대불 1970년대까지도 사용되었다고 하는 도대는 보통 다듬은 돌(현무암)로 대를 쌓아올리고 그 위에 작은 지붕을 두고 불을 켤 수 있도록 만들었지요. 도대불은 동식물의 기름이나 솔칵(관솔도 사투리) 또는 석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엔 나무를 세워 그 위에 잠망등을 달아 불을 켜고 포구의 위치를 알렸다고 하지요. 이곳 구엄리 도대불은 모양새가 방사형이지만, 제주도내의 다른 도대불들은 방사형 말고도 네모꼴 모양 등 참으로 많은 모양이 있습니다. 또 도대불은 구엄리 말고도 제주 감녕리, 애월리, 도모리, 구산리 등 여러 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구엄리 도대불은 강한 해풍에도 도대불 주변에는 파도가 닿지 않았다고 합니다. 1974년 인근에 아세아 방송국이 개국되어 방송국 안테나의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예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썼던 보자기 가운데 조각보는 예술 작품의 하나로 승화될 만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방향이나 마름모형처럼 정형화된 무늬는 궁중이나 지체 높은 사대부집에서 사용한 조각보에서 주로 나타나고, 일반 집에서는 옷을 짓고 남은자투리 천을 이용하다 보니 이렇게 삐뚤삐뚤한 무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복을 잇는다는 마음으로 비정형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조각보(문화재청) 예전에는 옷감 값이 비쌌기에 옷감 조각 하나도 버리기 아까웠을 테고 여인들이 직접 옷감을 짜는 일이 많다 보니 남은 옷감을 허투루 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자투리 옷감을 그냥 버리지 않고 만들어낸 것이 조각보였으니, 자투리를 모아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는 옛 여인들의 정성과 예술감각이야말로 대단했습니다. 이렇듯 조각난 옷감을 잇는 행위에는 복을 잇는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고, 옷감을 복으로 보았기에 옷감을 자르거나 찢는 행위를 복을 찢는 행위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고 하지요. 조선시대에는 장사 가운데 포목점을 가장 천히 여겼습니다. 그것은 옷감 장사처럼 옷감 찢는 직업은 복을 찢는다고 생각한 때문이지요. 지금 당장 돈을 아무리 잘 번다해도 포목장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제주 항파두리에는 13세기 말(1271~1273) 몽고군의 침략에 맞서 끝까지 항거한 삼별초군의 항몽유적지가 있습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주말 오후에 찾은 항몽유적지는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이 적막했는데 순의비(殉義碑)에 이르는 참도(參道)를 걸어 갈 때는 빗줄기가 제법 굵어져 참도 오른쪽에 깊숙이 파놓은 내성지 발굴 현장에 떨어지는 빗소리만 고요한 유적지의 적막감을 깨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유럽과 아시아대륙을 거의 정복하다시피한 원나라는 고려 18년(1231)부터 30년 동안 7차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여 고려조정은 강화도로 난을 피해 옮겨가야했습니다. ▲ 제주 항몽유적지 순의문, 저 안에 순의비가 보인다. 이때 배중손 장군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군은 끝까지 고려를 지키고자 원종 11년(1270) 6월 군사를 규합하여 대몽항전에 나섰지요. 그러나 역부족으로 조정은 원나라에 굴복하고 고려왕조는 개경으로 환도하게 됩니다. 이후 삼별초 군은 남하하여 진도의 용장성을 근거로 항전하다 진도가 함락되고 배중손 장군이 전사하자 김통정 장군이 부대를 이끌고 제주에 들어오게 됩니다. 삼별초군은 이곳 항파두리에 토성을 쌓고 계속 항전하면서 기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지난번에 이어서 이번에 사람 관계에 쓰는 토박이말을 알아보자 1. 부부 대신 가시버시를 쓰면 좋다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고 우연히 만나서 어울려 사는 남녀 곧 동거하는 남녀를 ‘뜨게부부’라고 하는데 ‘뜨게’는 ‘흉내 내어 그와 똑같게 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뜨게부부’는 ‘가시버시’가 아니다. ‘가시버시’는 부부를 낮추어 부르는 말인데 혼인 청첩장에서 ‘저희는 부부가….’라는 말을 쓰기보다는 ‘저희는 가시버시가….’라는 말을 쓰면 더 멋지지 않을까? 2. 너나들이보다는 옴살이 더 가까운 사이 사람관계를 이르는 말로 ‘남진아비’, ‘자치동갑’, ‘풋낯’, ‘너나들이’, ‘옴살’ 따위가 있다. ‘남진아비’. ‘핫아비’는 ‘유부남’, ‘남진어미’, ‘핫어미’는 ‘유부녀’를 말한다. 핫아비·핫어미는 홀아비·홀어미의 반대이다. ‘자치동갑’은 나이 차가 조금 나지만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를 뜻한다. 또 ‘풋낯’은 서로 겨우 낯을 아는 정도의 사이이고, ‘너나들이’는 나이 차이는 좀 나지만 서로 ‘너’, ‘나’하고 부르며, 터놓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이며, ‘옴살’은 마치 한 몸같이 친하고 가까운 사이를 말하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객지
[그린경제=김영조 기자]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들 대부분은 어려운 한자말이나 영어 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유식함을 증명하는 것이라도 되는 양. 하지만, 2살 때 일본에 건너가 70여 년을 우리말을 사랑하며, 토박이말로 시조와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바로 교토의 김리박 선생이 그분인데 우리도 잊었던 토박이말 사랑에 평생을 바치고 있다. 토박이말을 쓰면 훨씬 글이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선생은 일찍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 우리도 토박이말 사랑에 빠져볼까? 자연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토박이말1) 꽃보라 맞으며 꽃멀미 해보셨나요?봄철이면 눈 속을 뚫고 나와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는 매화를 시작으로 진달래, 산수유, 개나리가 흐드러진다. 이때 눈보라처럼 꽃이 휘날리는 모습을 꽃보라가 인다고 하며, 꽃의 아름다움이나 향기에 취하여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은 꽃멀미다. 또 꽃보라 비슷한 말로 꽃눈깨비도 있는데 이는 흰 눈같이 떨어지는 꽃잎을 말한다. 편지 쓸 때 꽃보라 맞으며 꽃멀미 해보셨나요?라는 문구를 써보면 멋지지 않을까? ▲ 저렇게 흐드러지게 달린 꽃이 한꺼번에 떨어지면 모두가 꽃멀미를 한다. 또 산과 들에 가보면 우리의 토종 들꽃인 뽀리뱅이, 복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나라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킨 이들이 있고 온 겨레는 그들을 추모하고 기리는 일에 소홀하지 않는다. 그런 시설들은 바로 국립현충원을 비롯하여 온 나라 곳곳에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왜적과 항전하다가 전사한 군관민을 합장한 무덤 사적 제272호 만인의총도 바로 그런 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퉁에서 전사한 1만여 명의 의로운 주검이 묻힌 만인의총 하지만 문제는 1만여 명이나 되는 의로운 주검이 묻힌 만인의총이 홀대를 받는다며, 하루빨리 나라가 관리하는 성역시설로 승격시켜 달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다. 남원사회봉사단체협의회와 만인정신선양회준비위원회가 그들인데 그들은 어제(9월 25일) 늦은 4시 30분 정유재란 북문터 곧 옛 남원역 자리에서 남원성 전투 제416주년 기념 제10회 만인의사 추모 및 만인정신 계승 범시민대회를 열었다. ▲ 개화사를 하는 양경님 남원사회봉사단체협의회장(왼쪽), 추모사를 하는 남원시 박형규 부시장 ▲ 결의문 낭독을 하는 배종철 남원관광발전협의회장(왼쪽), 경과보고와 향후계획 보고를 하는 황의동 만인정신선양회 추진위원장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