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김영조 기자] 그는 새벽같이 일어났다. 발등이 뭍히는 눈우로 한참 찾어다녀서 다람쥐 꽁지만한 싸리비 하나를 그것도 오전이나 주고 사기는 했다. 그리고 큰 미천이나 잡은 듯이 집집마다 다니며 아직 열지도 않은 대문을 두드렸다. 댁에 눈 처 드릴가요? 우리 칠 사람있소 댁에 눈 안 치시렵니까? 어려니 칠가봐 걱정이오 방서방은 어이가 없어 허! 마당도 없는 녀석이 괘니 비만 샀군!하고 다리 밑으로 돌아오고 말었다. ▲ 싸리비질하는 학생들(제주 선녀와 나무꾼 촬영), 싸리비를 만드는 싸리나무(오른족) 위는 1935년 3월 1일치 삼천리 제7권 제3호에 나오는 이태준의 《나무는 심어 놓고》라는 소설에 나오는 대목입니다만 가난한 방서방에게는 싸리비 한 자루가 전 재산이었던 것이지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게 고향의 토지를 빼앗기고 피붙이 하나 없는 서울로 올라온 방서방 내외는 이름도 모를 다리 밑에 거처를 정하고 남편은 싸리비질 하러 서울 거리를 헤매게 됩니다. 돈이라도 넉넉하면 튼실한 싸리비를 사겠지만 겨우 다람쥐 꽁지만한 싸리비 하나를 샀다는 말이 안쓰럽습니다. 요즘처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싸리비 추억이 없겠지만 예전 시골에서는 마당을 쓸어야하기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너는 거문고 손을 가졌구나. 스승 칭찬에 20년을 매진 - 거문고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계기는 별다르지 않았어요. 가야금을 1년 정도 배운 뒤 국악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선생님들께서 너는 거문고 손을 가졌구나.라고 말씀하셨고, 저도 거문고 소리가 싫지 않아서 전공을 거문고로 선택한 것이 지금까지 왔습니다. 지금 제가 생각해도 저는 거문고를 연주하기에 좋은 손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 그렇다면 거문고는 어떤 악기인가요? 그리고 본인과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지요? 거문고는 소리가 꿋꿋하고 감정에 솔직합니다. 다른 현악기 연주는 보통 터치기에 울림과 여운이 있고 길게 뽑아낼 수도 있지만 거문고는 술대로 내려치고 나면 뒤집을 수 없고 꾸밀 수도 없습니다. 이런 특징은 제 성격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저도 하겠다고 하면 그걸 실천하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러기에 저는 거문고를 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 거문고와의 삶 20년이라고 했는데 도중 어려움은 없는가요? 큰 위기가 한번 있었습니다. 교통사고가 났는데 한 열흘 지나고 나니 손가락이 저리고 떨리고 힘이 없어졌습니다. 거문고를 그만둬야 하나고 고민할 정도였지요. 하지만 못한다고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임금 가운데 3대 성군을 꼽으라면 꼭 정조임금이 들어갑니다. 그 정조임금은 세손시절부터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라는 일기를 썼는데 그것이 훌륭한 임금이 되는데 큰 보탬이 되었을 것입니다. 증자가 말한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 날마다 세 번씩 나를 반성한다)"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일기 쓰는 습관을 들였다고 하지요. 그리고 정조는 일기 첫머리에 꼭 날씨를 적었는데 지금 초등학생의 일기에 날씨를 적는 것은 정조의 모범을 따른 것이 아닐까요? ▲ 국보 제153호이면서 세계기록문화유산에 오른 《일성록(日省錄)》 이렇게 시작한 일기는 《일성록(日省錄)》으로 발전하여 마지막 임금 순종까지 150년 동안 2,327권이 쓰였고, 국보 제153호와 세계기록문화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성록》이 또 다른 세계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다른 특징의 하나는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에는 임금을 일컫는 말이 상(上)이라고 나오는데 견주어 《일성록》은 일인칭 한자인 "여(予)"를 써 스스로 쓴 일기임을 드러냈다는 점입니다. 《일성록》 가운데 정조가 쓴 부분을 보면 백성을 사랑했던 정조의 성품이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떡본 또는 떡손병형(餠型)이라고도 하는 떡살은 누르는 면에 오목새김(음각)이나 돋을새김(양각) 무늬가 있어서 절편에 찍으면 무늬가 아름답게 생깁니다. 적절한 크기로 잘라낸 떡에 물기를 묻혀서 떡살로 도장을 찍듯이 누르면 되는데 이렇게 찍은 떡은 어느 정도 굳으면 그 무늬가 선명하게 나타나지요. 무심한 절편에 어떤 의미를 가진 무늬를 찍어 넣어 그저 떡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선물이 됩니다. ▲ 여러가지 무늬의 떡살들(문화재청) 고려시대부터 써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 떡살은 재질에 따라 나무떡살과 자기떡살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단단한 소나무,참나무,감나무,박달나무 따위로 만드는 나무떡살은 1자 정도의 긴 나무에 46개의 각기 다른 무늬를 새긴 것입니다. 한편, 사기,백자,오지 같은 것으로 만드는 자기떡살은 대개 보통 511㎝ 정도의 둥근 도장 모양으로, 손잡이가 달려 있어서 잡고 꼭 누르게 되어 있지요. 특히 궁중에서 쓰던 사기떡살은 고급스러운 백자로 만든 것이 많습니다. 떡살의 무늬는 선원,꽃당초,문물,고기,나비,귀갑,문구름,문연,화문,천도,석류,박쥐,포도,국화문 같은 꽃과 동물들이 많은데 그밖에 기하학문, 십장생문, 칠보문, 태극문
[그린경제=김영조 기자]한 학자는 세종임금이 명에 지성사대(至誠事大)를 했다.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아는 세종은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리고 자주적인 임금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명나라에 지성으로 사대했다니 모두가 깜짝 놀랐던 것이다. 정말 그 학자는 세종을 사대주의로 본 것인가? 지성사대로 볼 수 있는 예를 그는 여럿 들고 있다. 먼저, 세종실록 25권, 6년(1424년) 9월 2일 자 기록을 보면 임금이 상복을 사흘 만에 벗지 않고 27일의 제도를 실행하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신하들이 홍무제의 가르침에 온 세상의 신하와 백성은 3일 만에 복을 벗으라.라고 했다며, 반대했지만 세종은 군신의 의리를 내세워 중국 천자의 죽음에 스무이레 동안이나 상복을 입었다. ▲ 임금이 상복을 사흘 만에 벗지 않고 27일의 제도를 실행하다.는 세종실록 6년(1424년) 9월 2일 자 기록 또 명나라는 여러 차례 1만 ~ 3만 마리의 말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이에 국방력 약화를 우려한 신하들의 반대에도 지금 만일 칙서를 따르지 아니하고, 말의 숫자를 채우지 못한다면 오해할 우려가 있다. 조선은 예부터 예의의 나라라고 하여 정성껏 사대하였다.라며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천문지(天文志)》를 살펴보면, 노인성은 항상 추분(秋分)날 아침에 병방(丙方)에서 나타나, 춘분(春分)날 저녁에 정방(丁方)에서 사라지는데, 노인성이 나타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임금이 오래 살고 자손이 번성하는 까닭에 추분날 남교(南郊)에 나가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태종실록》 21권, 11년(1411) 1월 11일 치 기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온갖 곡식이 무르익는 때 추분, 동아일보 1939년 9월 23일 남극성(南極星), 수성(壽星)으로도 부르는 노인성(Canopus)이 나타나면 세상이 태평해지고 임금이 장수하는 반면 이 별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임금에게 변고가 생기고 전쟁이 일어난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래서 추분에 노인성이 나타나면 벼슬아치들이 임금에게 축하를 올리고 노인성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노인성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오래 살게 해준다고 믿는 신앙 대상이어서 이날은 어르신을 공경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 중용을 깨우치게 하는 추분, 이때쯤 되면 벼는 익어 고개를 숙입니다. 한자 향기 향(香) 자를 보면 벼 화(禾) 자 밑에 날 일(日) 자가 붙었습니다. 그것은 한 여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누구나 세종의 가장 큰 공적을 훈민정음 창제로 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처럼 한국이 발전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한글만 한 것이 없다는 데 있다. 하지만,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을까? 세종실록 103권, 26년 2월 20일 자 기록에 보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는 상소를 한다.'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라 글을 같이 쓰고 법도를 같이하는데도 새롭게 언문을 창제하신 것은 보고 놀랐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기라도 하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중국을 섬기는 나라에서 감히 독자적인 글자를 만들 수 있느냐는 힐난이었다. 이런 생각은 당시 중화사상에 찌들어 있던 대부분 조선 사대부들이 가지고 있었던 철학이었을 것이다. 더더구나 최만리는 집현전 부제학으로 당시 최고 학자였다. 최만리 말고도 대다수 집현전 학사들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라 감히 드러내놓고 훈민정음 창제 작업을 할 바보는 없었을 게다. 세종은 자신의 집권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오늘은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다. 우리 겨레는 설이나 한가위 같은 명절은 물론이고 혼인이나 아기의 돌잔치 때에도 떡을 해먹었다. 그런가하면 제사 때도 떡이 쓰였으니 떡과의 인연이 참으로 깊다. 그래서 그런지 유난히 떡과 관련한 속담이 많다. 귀신도 떡 하나로 쫓는다. 귀신 떡 먹듯 한다. 귀신에게 비는 데는 시루떡이 제일이다. 아닌 밤중에 웬 찰시루떡이냐? 귀신은 떡으로 사귀고 사람은 정으로 사귄다. 떡 본 귀신이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떡 없는 제사에 절만 한다. 떡이 있어야 굿도 한다. 제사떡도 커야 귀신이 좋아한다. 떡시루 김이 오르기 전에 남이 들어서면 떡이 선다. 떡 찌다가 뒷간에 갔다 오면 부정탄다. ▲ 안동소주박물관에 전시된 화려한 떡들 이처럼 제사나 잔치 등 크고 작은 애경사에는 떡이 빠지지 않았다. 오죽하면 귀신에게 공양하는 떡도 커야 한다는 말이 나왔을까 싶다. 떡은 곡식가루를 찌거나 삶아 익힌 음식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문헌에 오른 떡의 종류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시루떡(증병) : 곡식 가루를 시루에서 익힌 떡으로 시루의 등장과 함께 있어온 떡이다. 시루떡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백설기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뉴욕에서 보는 추석 달 속에 / 코스모스 무리지어 핀 / 고향 철길 있네 / 장독대 뒤에 꽈리 한 타래 / 가을볕에 익어 있네 가난이 따뜻하고 아름답던 / 성묫길 소슬바람 송편 향기 / 마천루 달 속에서 물씬거리네 함지박에 가득 담긴 / 머루 다래 수수 차좁쌀 / 쪽머리에 이시고 / 흰 옥양목 적삼의 어머니 계시네 / 울음 때문에 바라볼 수 없는 / 어머니 모습이네 위 시는 김정기 시인의 추석 달입니다. 멀리 남의 나라 미국에서 맞는 한가위 정서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입니다. 우리는 예전에 보름달을 보고 계수나무 아래서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고 믿었지요. 어려웠던 시절에는 방아 찧는 상상만 해도 배가 불렀습니다. ▲ 동아일보 1930년 10월 7일치 한가위 사진 추석날이면 일년 내 방안에만 가처 잇서서 문밧 천지를 구경하지 못하든 색시와 신부와 부인들이 하로의 틈을 비로소 어더서 고흔 옷 고흔 단장으로 이름 잇는 산에 올라서 바다도 바라보고 강도 바라보며 들도 바라보고 산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시원한 바람도 쐬게 되며 혹은 이웃동리에 잇는 친척,동긔간,옛날동무를 맛나서 마키엇든 회포도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 (11) ▲ 2013년 4월 정부표준영정 제91호로 지정된 장계향 선생 영정 시집 와서 시아버지와 함께 병자호란에 굶주린 주민 보살펴 내가 이루지 않은 재산 상속 받을 수 없다 맨몸으로 분가 분가 뒤 도토리숲 만들어 빈민 구제, 아들을 7현자(七賢者)로 키워내 동아시아 최초로, 한글로 쓴 여성조리서 ≪음식디미방≫ 펴내 ▲ 늙이 이의 딱한 사정을 표현한 장계향 선생인 쓴 학발시((鶴髮詩) 백발 늙은이가 병들어 누웠는데 아들을 머나먼 변방으로 떠나보내네 아들을 머나먼 변방으로 떠나보내니 어느 달에나 돌아올 것인가? 백발 늙은이가 병을 지니고 있으니 서산에 지는 해처럼 생명이 위급하네 두 손바닥을 마주 대고서 하늘에 빌었으나 하늘은 어찌 그렇게도 반응이 없는고 백발 늙은이가 병을 무릎 쓰고 억지로 일어나니 일어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네 지금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아들이 옷자락을 끊고 떠난다면 어찌 할 것인가 이 시는 조선시대 유일하게 여성군자로 불렸던 장계향 선생이 쓴 것으로 백발노인의 딱한 사정을 표현하는 시(鶴髮詩)라는 제목인데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에 있는 시이다. 이런 시를 쓴 이는 과연 어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