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내일은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입니다. 그 한가위 큰 명절의 각종 세시풍속 가운데는 '거북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거북놀이는 수수 잎을 따 거북이 등판처럼 엮어 등에 메고, 엉금엉금 기어 거북이 흉내를 내는 놀이입니다. 이 거북이를 앞세우고 “동해 용왕의 아드님 거북이 행차시오!”라고 소리치며, 풍물패가 집집이 방문하지요. ▲ 한가위 세시풍속 "거북놀이"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대문을 들어서면서 문굿으로 시작하여 마당, 조왕(부엌), 장독대, 곳간, 마구간, 뒷간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들보 밑에서 성주풀이를 합니다. 조왕에 가면 “빈 솥에다 맹물 붓고 불만 때도 밥이 가득, 밥이 가득!” 마구간에 가면 “새끼를 낳으면 열에 열 마리가 쑥쑥 빠지네!” 하면서 비나리를 하지요. 이렇게 집집이 돌 때 주인은 곡식이나 돈을 형편껏, 성의껏 내놓고 이것을 공동기금으로 잘 두었다가 마을의 큰일에 씁니다. 이와 같이 거북이놀이와 성주풀이는 풍물굿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세시풍속의 하나입니다. 또 재미있는 놀이로 전남 진도의 “밭고랑기기”가 있지요. “밭고랑기기”는 한가위 전날 저녁에 아이들이 밭에 가서 발가벗고, 자기 나이대로 밭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일제에 가열차게 싸웠다. 하지만 1932년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애국지사들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일제를 상대하기에 벅찼기에 중국의 도움이 절실하던 때였다. ▲ 중국 장개석 총통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계기를 만든 윤봉길 의사 이때 혜성같이 나타난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지금은 노신공원)에서 일제의 조선침략을 만천하에 응징했다. 윤봉길 의거로 일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부러졌으며,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을 정도였다. 이후 중국 장개석 총통이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높이 평가했고 이를 계기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우리나라는 독자적인 힘으로 일제를 상대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중국‧소련‧미국이 일본과 싸울 때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에서 어렵게 투쟁하면서도 군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런데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를 본 중국 장개석 총통이 적극 임시정부를 지원해주자 김구 선생은 1934년 뤄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도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 인재의 양성에 힘썼습니다. 임시정부는 여러 곳으로 피난처를 옮겨 다니는 상황에서 여의치 않았습니다만 마침내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중경)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합니다. 광복군이 만들어지면서 광복군 총사령부가 설립되었고, 총사령관에는 지청천, 참모장에는 이범석 등이 임명되면서 광복군은 비로소 체계적인 군사조직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 중국 가릉빈관 앞에서 찍은 광복군총사령부 창설 기념 사진(1940. 9. 17) 이후 광복군은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병력이 점차 늘어 한반도에 지하군을 조직, 파괴 공작을 진행시킬 계획을 수립합니다. 또 광복군은 연합군과 공동으로 태평양 방면에서 한국인 포로 재훈련과 파견사령부설치, 비행대 편성 등에 관한 작전 계획도 수립해 놓고 있었지요. 태평양 전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임금과 왕비의 수라상에 올릴 생채음식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특히 신선한 푸성귀(채소)를 수라상에 올리려고 서울 뚝섬에 ‘농푸꼬지기’라는 일꾼을 두었고, 창덕궁 후원에는 궁중에서 필요한 푸성귀를 기르는 내농포(內農圃)를 만들어 일꾼을 두었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수라간에는 채증색(菜蒸色)이라는 푸성귀 요리 전문가 6명을 별도로 두었을 정도입니다. 수라상에는 숙채(熟菜)라 하여 푸성귀를 익혀 조리한 반찬과 푸성귀를 날것으로 조리한 반찬인 생채를 올렸는데, 대표적인 궁중의 생채요리로는 잡채(雜菜), 수삼채소생채, 겨자채, 구절판, 도라지생채, 더덕생채, 무생채, 미삼생채, 무굴생채, 죽순채, 삼색무생채, 미나리강회 따위가 있습니다. 이러한 요리들은 오늘날 처럼 지나친 조미료를 쓰지 않았기에 푸성귀 본래의 고유한 맛과 향을 최대한 살릴 수 있었습니다. ▲ 수라상에 올랐던 무생채, 미삼생채, 더덕생채(왼쪽부터, 문화재청 제공) 그런데 이 요리 가운데 잡채는 요즘 것과는 다릅니다. 잡채라 하면 당면이 중심인 오늘날과 달리 예전의 잡채는 당면은 없고 여러가지 푸성귀가 주를 이룹니다. 1600년대 장계향 선생이 쓴 요리서 《음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최근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한 논란이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가운데 친일∙독재미화 뉴라이트교과서 무효화 국민네트워크 출범 기자회견이 오늘 11시 30분 교육부 앞(정부종합청사 정문)에서 열렸다. 친일∙독재미화 뉴라이트교과서 무효화 국민네트워크는 항일독립운동가기념사업단체연합회, 흥사단, 한국YMCA전국연맹, 참교육학부모회, 학술단체협의회. 역사정의실천연대 등 전국 465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교학사 교과서 반대 시민연합체다. ▲ 온 나라 465개 단체가 참여하는 친일∙독재미화 뉴라이트교과서 무효화 국민네트워크가 출범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 인사말과 규탄발언을 하는 한상권 대표, 이이화 선생, 이영주 수석부위원장, 김원웅 회장(왼쪽부터) 기자회견은 한상권 역사정의실천연대 상임대표가 인사말을 했고, 역사학계 원로이며, 전 동민농학혁명기념재단이사장 이이화 선생의 일본인들이 일본어를 국어로 지칭한 것을 마치 한국어를 말한 것으로 해석하고, 독재자 이승만을 추앙하는 교과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규탄발언이 이어졌다. 또 김원웅 항일독립운동가기념사업단체연합회장은 교학사 교과서는 일본 후쇼사 교과
어머니 진도씻김굿 전수조교 송순단 선생 모친 권유로 시작한 아쟁 평생 동반자로 씻김굿 어머니 얘기 석사논문으로 쓸 것 퓨전에 긍정적단 기본 확실히 다져야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 아쟁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사실 제 어머니는 진도씻김굿 전수조교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국악은 자연스럽게 생활화됐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광주예술고등학교에 갔는데 1학년 때 전공을 선택해야 했지요. 그때 어머님께 장구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소리북(고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곧 기본기를 닦아야 된다는 말씀이셨죠. 그러면서 힘드는데 괜찮겠느냐라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러면서 판소리도 하고 싶다는 제 말씀에 집에 마침 아쟁도 있으니 아쟁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게 권했습니다. 그래서 아쟁은 제게 운명이 된 것이죠. - 어머니의 씻김굿이 무섭거나 또는 미신이라고는 생각지는 않았는지요?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조성재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미신이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접신 등의 대목에서는 조금 무섭기도 했는데 귀는 솔깃하고 새로운 경험이어서 숨어서 보곤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소리를 배우기 위해 늘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계셨던 것이나, 여성의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만원버스를 타보신 적 있으신가요? 60~70년대 시내버스는 출근시간이면 버스가 터질 만큼 손님이 타곤 했습니다. 당시는 버스 차장 아가씨가 있어서 손님이 타면 오라잇하며 운전기사에게 출발하라고 알려 주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손님이 너무 많아 버스 문이 닫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 만원버스와 차장아가씨(선녀와 나무꾼 촬영) 문이 안 닫히면 버스 운전기사는 버스 문 방향으로 핸들을 갑자기 꺾었다가 다시 갑자기 운전기사 방향으로 핸들을 꺾습니다. 그러면 차장아가씨는 핸들을 꺾는 것에 맞추어 버스에 미처 들어가지 못했던 사람들을 버스 안쪽으로 마구 꾸겨 넣지요. 그러면 옆거울(사이드밀러)로 차장 아가씨가 손님들을 완전히 꾸겨 넣은 것을 확인한 운전기사는 잽싸게 버스 문을 닫습니다. 그런 다음 정류장에서 손님이 내리고 탈 때까지 운전기사는 콧노래를 부르며 달려갑니다. 그 만원 버스는 전철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점차 사라집니다. 대신 전철에서 출근전쟁이 시작됩니다. 몇몇 역에서는 버스 경우처럼 손님들이 미처 타지 못하고 우물쭈물 합니다. 그러면 소위 푸시맨이라 하여 손님을 뒤에서 밀어서 타도록 도와주는 아르바이트 직원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금강산에 들어가는 대문에 단발령(斷髮嶺)이 있습니다. 금강산을 본 사람은 속세에의 미련을 떨쳐버리고 곧바로 머릴 깎아 스님이 되어야 하는 고개라는 뜻일까요? 자존심의 화가 애꾸눈 최북이 금강산에 갔다가 감흥에 못이겨 갑자기 구룡연에 뛰어들게 한 금강산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단발령에서 금강산을 바라보는 것은 정선과 이인문의 그림이 많이 다릅니다. ▲ 겸재 정선의 단발령망금강, 국립중앙박물관 먼저 중국의 그림이 아닌 진경산수 화풍을 완성한 겸재 정선의 단발령망금강을 보면 백리에 사람 소리 들리지 않고[百里無人響] 산 깊어 새소리 뿐이로구나[山深但鳥啼]. 스님 만나 갈 길을 물어보고는[逢僧問前路] 스님 가니 다시 길을 잃어버렸네[僧去路還迷]라는 라는 조선 중기의 문신 강백년(姜栢年)의 시 금강도중(金剛途中)이 생각납니다. 금강산은 눈 앞에 보이지만 저멀리서 안개 속에 있습니다. ▲ 이인문의 단발령망금강, 종이에 담채, 개인 소장, 2345cm 그런가 하면 이인문의 단발령망금강을 보면 강백년의 감흥이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인문이 바라본 금강산은 조선 후기 시인 이병연(李秉淵)의 시 신선이 사는 궁궐의 금자물쇠를 연 듯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우리나라 문헌으로 술 이야기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제왕운기》의 동명성왕 건국담에 나오는 술에 얽힌 설화가 처음입니다. 그러나 증류주인 안동소주는 신라시대부터 그 기원을 잡지요. 증류기술은 아랍지역의 연금술사들에 의해서 발명되었는데, 당시 신라는 아랍과 활발한 중계무역을 벌였고, 이때 페르시아 유리잔과 함께 증류주의 제조법이 전래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소주는 페르시아에서 발달한 증류법이 원(元) 나라와 만주를 거쳐 고려 후기에 들어와 전통술로 자리 잡은 것이라는 설도 있지요. ▲ 안동소주는 소줏고리로 증류해서 빚는다(왼쪽), 안동소주 한국에서 소주를 말하는 이름을 보면 밑술을 증류하여 이슬처럼 받아내는 술이라고 하여 노주(露酒), 불을 이용한다 하여 화주(火酒), 또는 한주(汗酒), 기주(氣酒) 따위로 다양합니다. 의서(醫書)에는 소주가 약용으로 쓰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특히 《단종실록》에는 문종이 죽은 뒤 단종이 상제를 하느라고 허약해져서 대신들이 소주를 마시게 하여 기운을 차리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지요. 소주는 약용으로 쓰이기도 했기 때문에 많이 마시지 않고 작은 잔에 마셨고 따라서 작은 잔을 소주잔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제주도 제주시 외도동에는 옛 풍류객들이 시를 읊으며 달빛의 정취를 즐겼던 월대(月臺)가 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사철 냇물이 흘러 고려와 조선 시대 관아에서 조공을 실어 날랐다 하여 조공천(朝貢川)이라 불렸던 도근내 주변에 있지요. 밤하늘에 달이 뜨면 모든 물에는 달이 또 하나 뜹니다. 그러면 물빛은 달빛이 되고 옛 시인들은 그런 물속의 달빛만을 그저 감상만 할 수 없어 물가의 돌 위에도 새겨 놓습니다. ▲ 시인묵객이 달빛을 즐긴 제주시 외도동의 월대(月臺) 그런데 이 월대 곁에는 유달리 눈에 띄는 빗돌이 하나 있지요. 앞쪽에 큼지막하게 달 모양을 상형하여 새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대(臺) 자를 새겨둡니다. 월대를 알리는 빗돌 하나도 그저 월대가 아니라 그것에 달빛을 새겨 넣으려 함입니다. 이렇게 새긴 풍류객은 초대 제주읍장을 지낸 인물로 추사체를 잘 써 한때 병풍, 족자, 주련 등의 글씨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는 홍종시(洪鍾時, 1857~1936)라는 인물입니다. ▲ 제주시 외도동 월대 앞에 있는빗돌 이 월대는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에 있는 제주도 기념물 제7호 명월대(明月臺)의 또 다른 모습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