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원스럼게 열린 경복궁 근정전(위)과 닫힌듯 보이는 자금성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북경에 다녀온 사람들은 흔히 북경에 가면 자금성은 꼭 보아야 한다. 자금성은 경복궁이 비교되지 못할 만큼 대단하다.라고 말한다. 물론 누구나 자금성을 보면 그 큰 규모에 놀란다. 그래서인지 경복궁은 자금성의 화장실(?) 정도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물을 크기로만 견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 경복궁은 전통적인 조선인의 미관과 세계관을 조화롭게 표현한 건축물로 검소하면서도 부족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하지 않은 궁궐이라고 말한다. 자금성은 엄청난 크기, 엄격한 대칭, 깎아지른 직선으로 삼엄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지만 경복궁은 열린 구조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을 궁궐로 이끌어오고, 어디에서나 문을 열면 그 문을 통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걸어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 것의 올바른 가치를 아는 것이 참 종요롭다. 배산임수 사상으로 지은 경복궁, 뒤엔 북악산이 자리하고 앞엔 한강이 흐른다. 하지만, 자금성엔 산과 강이 가까이 없다. 또 경복궁은 자금성의 화장실만 하다.란 말은 엄청난 과장이다. 자금성은 9,999칸인데 비해 경복궁은 999칸이라고 하는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 대금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혹시 아버지가 권유한 것은 아닌가요? (원완철은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단원이자 원장현류 대금산조 명인 원장현 선생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권유하시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말리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제가 하고 싶은 거 하도록 지켜보시는 편이었죠. 물론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음악에 익숙했었다는 것은 대금을 할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한문 선생님이 꿈일 정도로 꼭 대금을 한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텔레비전에서 일본 장인이 대를 이어 가업을 잇는 것을 본 뒤로 대금을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로 대금을 하게 되었지요. 지금은 선택을 잘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 아버지는 현대 3대 대금명인 가운데 한분이십니다. 그런 아버지가 대금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는지요? 아버지는 철저한 분이셨습니다. 대학교 들어가자 첫 등록금을 대주시고는 이제는 네가 알아서 해라 하셨고, 이후 장학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교를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KBS 국악한마당의 반주를 9년 동안이나 하게 됐는데 그때 많은 공부가 됐지요. 사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오늘! 십주년의 금월 금일이 일본에 합병되든 날이올시다. 금년 팔월 이십구일 한일합병 십주년 긔념일이올시다. 사진은 일한합병조약에 량국편에서 도장을 찍던 곳이니 지금 총독 관뎌 안에 있는 처소이오. 그 방에 서있는 사람은 당시 일본 대표자 되는 한국통감으로 합병조약을 톄즐한 사내정의요 왼편의 인물은 한국편으로 조약에 도장을 찍은 당시 한국총리대신 이완용 ▲ 동아일보 1920년 8월 29일 기사, 매국노 이완용(왼쪽)과 테라우치 통감이 보인다. 위 내용은 동아일보 1920년 8월 29일치 기사입니다. 국치일을 맞아 기사를 쓴다는 것이 마치 기념일을 소개하듯이 했습니다. 당시는 조선총독부 시절이니 어쩔 수 없었을지 모르지만 참으로 분통터질 일입니다. 우리 겨레의 원수 테라우치 통감과 뻔뻔스러운 매국노 이완용 사진이 보이는군요. 오늘은 국권침탈 103년이 되는 날입니다. 매년 이때를 맞아 빛고을 광주에서는 친일음악회를 열어왔는데 어제도 국치 103년 기억음악회를 열었습니다. 이 음악회는 클래식음악을 대중에게 보급하기 위해 힘써 온 '광장음악회' 소속 성악가들이 출연하여 친일예술인들이 가사를 썼거나 곡을 붙인 노래들 곧 혈서지원, 선구자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 경복궁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한 무학대사 무학대사와 함께 한양을 찾아온 태조는 궁궐터를 찾다가 지금의 왕십리에 당도하였다. 청계천이 합류하는 곳에 멈춘 뒤 서울이 될 만한 땅을 찾았다. 북악산과 남산 사이에 상당히 넓은 명당을 발견하고, 그곳이 왕도로 좋은 터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디에 궁터를 정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때 한 할멈이 나타나 이곳에서 십리를 더 간 곳이 좋다.라고 일러 준 뒤 사라졌다. 두 사람은 하늘의 계시라고 믿고 북악산 기슭에 궁궐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 할멈이 나타난 곳을 왕십리(往十里))라 불렀다. * 경복궁의 주산과 좌향 조선왕조가 한양을 서울로 하고 궁궐을 지을 때 당대 풍수의 대가이며 불교계 왕사인 무학대사와 유학의 거목인 정도전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무학대사는 건물의 방위를 정함에 서쪽의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낙산을 바라보는 형상이 국운이 오래갈 것이라고 하고, 정도전은 한 나라의 장래를 어찌 미심쩍게 풍수에만 맡길 수 있겠는가? 임금이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남쪽을 향하고 북쪽을 등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지금 청와대 뒤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신수이후身修而后에 가제家齊하고 가제이후家齊而后에 국치國治하고 국치이후國治而后에 천하평天下平이니라 자천자이지어서인自天子以至於庶人히 일시개이수신위본壹是皆以修身僞本이니라”(자기가 수행된 이후에 가정이 다스려지고, 가정이 다스려진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야 천하가 태평해지느니라. 천자로부터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결같이 수신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니라) ▲ 8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송서 공연을 하는 유창 명창 위는 유교 경전인 대학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옛 선비들은 이와 같이 한문으로 된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외어야 했고, 그래야 과거시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한문 문장을 그저 읽으면 따분하고 졸릴 것입니다. 그래서 선비들은 글에 운율을 붙여 읽었기에 그 많은 한문책을 통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글을 읽을 때 운율을 붙여 읽고 외우는 것을 송서(誦書)라 했습니다. 그리고 시에 곡조를 붙여 일는 것은 율창(律唱)이라 했지요. 이런 우리의 오랜 전통문화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맥이 끊겼습니다. 요즘은 한해에 책 한 권도 읽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 최초의 우리말 요리서 안동 장씨가 쓴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책의 첫장(왼쪽), 자식들이 책을 만들면서 격식을 갖추려 규곤시의방이라 쓴 표지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송서(誦書)와 율창(律唱), 분명 국악의 한 장르다. 예전엔 마을에 아이들 울음소리와 함께 들려야했을 소리가 바로 송서와 율창이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책 읽는 이가 없는 것도 물론이려니와 송서와 율창은 일제강점기 그 맥이 끊어져버렸기 때문이다. ▲ 대학,중용 등 송서 공연을 하는 서울시무형문화재 제41호 유창 명창 하지만 이를 부여잡고 몸부림치는 아니 온 겨레에 알려내고 다시 부활시키고자 애 쓰는 이가 있다. 바로 서울시무형문화재 제41호 유창 명창이 그다. 그 유창 명창과 제자들이 지난 24일 서울 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 민속극장 풍류에서 (사)서울전통문화예술진흥원 주최, 송서율창보존회 주관으로 “송서(誦書)∙율창(律唱) 꽃 피우다” 공연을 펼쳤다. 이날 공연이 시작되자 객석은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기자가 자주 와봤던 이곳 민속극장 풍류는 공연 때마다 빈자리가 많았었는데 이번 공연은 서서보는 사람이 십 수 명이 되었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거의 뜨지 않는 완전 성공작이었다. ▲ 인사말을 하는 서한범 전통음악학회 회장(왼쪽)과 해설을 하는 김영운 한양대 교수 ▲ 삼설기(위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작년부터 한두 그루씩 차조기 잎이 텃밭 가에 나더니 올해는 텃밭의 한 고랑을 차조기 잎이 차지했다. 차조기는 들깻잎 모양을 하고 있는데 향이나 모양새가 거의 들깻잎 같지만 색이 자주빛이라 금방 보아도 구별이 간다. 심지도 않는 야생의 차조기 잎을 공짜로 몇 소쿠리고 딸 수 있어 보너스를 받은 느낌이지만 대관절 이 녀석이 어디에 좋은가하고 인터넷 검색창에서 확인하니, 아뿔사! 이렇게 다양한 효능이 있을 줄이야! -다음- ▲ 미용에 좋다는 차조기잎, 차조기잎 부침개 차조기는 자소엽이라고도 하는데 특히 말린 잎은 소엽이라고 해서 씨와 함께 진통제발한제이뇨제진해제진정제로 쓰이는 약재입니다. 특히 오래 묵은 화병으로 고생할 때 체내에 맺힌 울혈을 풀어주는 약재로 차조기 잎은 일찍부터 한방에서 그 효능을 입증하고 있으며 음식물이 상하는 것을 막는 방부제 구실도 톡톡히 해오고 있지요. 차조기 잎은 깻잎처럼 고기를 싸서 먹거나 차로 달여 마시기도 하는데 항균작용이 뛰어나 염증을 없앨 때 또는 아토피 등 알러지성 피부질환에도 쓰이지요. 또한 생선회를 먹을 때 차조기 잎을 깔아주면 독을 중화시키고 스트레스로 가슴이 답답할 때 먹으면 초조 불안을 낫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하늘에 내걸린 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며 눈부시다 / 가을볕이 너무 좋아 / 가만히 나를 말린다 / 내 슬픔을 /상처 난 욕망을 / 투명하게 드러나는 / 살아온 날들을“ 이 시는 박노해 시인이 쓴 <가을볕>입니다. 오늘은 처서, 24절기 가운데 열넷째이지요. 흔히 처서를 말 할 때 ’땅에서는 가을이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라고 할 정도로 그 위세를 떨치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드는 때인 것입니다. 처서 무렵엔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는 속담처럼 해충들의 성화도 줄어들고 대신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 오늘은 처서, 모기와 귀뚜라미의 대화를 들어볼까요?(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처서에 창을 든 모기와 톱을 든 귀뚜라미가 오다가다 길에서 만났다. 모기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귀뚜라미가 그 사연을 묻는다. ‘미친놈, 미친년 날 잡는답시고 제가 제 허벅지 제 볼때기 치는 걸 보고 너무 우스워서 입이 이렇게 찢어졌다네.’ 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모기는 귀뚜라미에게 자네는 뭐에 쓰려고 톱을 가져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귀뚜라미는 ‘긴긴 가을밤 독수공방에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만취당, 김사원 선생이 1584년 지은 건물로 한번도 해체 복원되지 않았다. ▲ 한석봉이 쓴 만취당 현판 송은공의 어진 자손이요 퇴계의 문도였네 만취당을 짓고 수양을 쌓았으니 옛날 만년송 언저리라 나를 알아주는 이 드물어도 품은 생각 손상되지 않았다네 후손에게 은혜 베풀었으니 그 성광 지금에 빛나도다 위는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은 만취당 김사원(金士元, 1539(중종 34)1601)의 묘갈명(墓碣銘, 묘비에 새겨진 죽은 사람의 행적과 인적 사항에 대한 글)이다. 대학자 채제공이 김사원 선생의 묘비에 새긴 글을 보면 김사원 선생이 어떤 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교통편도 불편한 경북 의성 사촌마을의 만취당(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만취당길 17)에 가는 날은 막바지 더위가 숨을 헐떡이게 했다. 하지만, 이웃에게 베푸는 마음이 하늘같았던 어른의 체취를 맡으러 가는 길을 더위 정도가 막을 수는 없었다. 김사원의 14세 종손 김희윤(金熙允) 선생은 온화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아준다. 경북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된 만취당(晩翠堂)은 퇴계 이황(李滉)의 제자 만취당 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