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놋그릇이란 유기제품에 녹이 슬어 녹그릇이요, 이 녹그릇은 사람 몸에 좋지 않으니 쓰지 말아야 한다는 기사가 눈에 띕니다. 1934년 11월 10일 동아일보 기사에 보면 놋그릇 쓰는 폐단이라는 제목으로 놋그릇은 녹그릇이니 인체에 해롭다고 실컷 해놓고서는 끝에 가서 하는 말이 놋그릇은 사기그릇에 견주어 값이 비싼데 돈께나 있는 집에서 집안 자랑하려고 국대접이나 밥사발을 놋그릇으로 쓰는 것은 꼴불견이다. 라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 충주박물관에 전시된 놋그릇들 ▲ 동아일보 1934년 11월 10일 기사 놋그릇을 쓰는 폐단 이 기사를 보면 또 한 가지 놋그릇의 폐단을 말하는데 생활개선을 해야 하는 주부들이 놋그릇을 반질반질 닦느라 시간을 허비한다.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놋그릇은 위생상 안 좋고 더구나 바쁜 여성들에게도 안 좋은데다가 값도 비싸니 천하에 몹쓸 그릇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보다 몇해 뒤인 1938년 8월 11일 기사에는 경남 창원군에서 놋그릇을 모아 총독부에 헌납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말이 헌납이지 당시에는 유기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각 가정에 있던 모든 놋그릇(유기)를 수탈했지요. 그 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한국 전통문화는 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이 이끌어가고 있다. 하지만, 무형문화재만이 전부는 아니다. 젊은 명인명창들이 차세대를 예약하고 있음도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차세대 명인명창으로 꼽히는 젊은 명인명창들을 찾아내 그들의 철학을 확인하고 용기를 심어주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제 그 첫발을 내딛는다. 아직 27살로 풋풋한 나이의 이나라 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전수교육조교 유지숙 명창 아래서 어언 20년 세월을 갈고 닦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악학과를 수료하고 석사논문 준비 중이며, 국악그룹 별樂의 대표이다. [편집자 주] - 어떤 계기로 서도민요를 하게 되었나요? 아버지께서는 함경도 북청이 고향이었습니다. 6.25 때 피난 온 아버지는 늘 고향을 그리워했고, 늦게 보신 딸인 제가 서도민요를 해주기를 바라셨지요. 그래서 제가 7살 때 아버지께서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이셨던 오복녀 선생님께 저를 데리고 가셔서 상의를 하셨는데 너무 어리니 조금 더 있다 오라고 하셔서 다른 민요 선생님께 배우다가 11살 때 유지숙 선생님께 본격적으로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창피하고 아버지가 원망스럽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옛 선비들은 냇가에서 탁족을 하고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것도 피서법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되었던지 폭포 아래에서 소리와 경치를 즐깁니다. 하지만 늘 폭포를 보러 갈 수 는 없었던지 폭포 그림을 그려놓고 방안에서 감상도 합니다. 특히 금강산 구룡폭은 여러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는데 정선이나 김홍도의 구룡폭은 직각으로 깎아지른 암벽을 타고 떨어지는 폭포의 기세를 잘 드러냅니다. 동시에 떨어지는 물이 둥그런 연못으로 빨려드는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지요. ▲ 한운평이 그린 <구룡폭>, 미국 클리블랜드박물관 소장 그런데 여기 그런 작품들과는 느낌이 많이 다른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19세기 한운평이 그린 <구룡폭>인데 미국 클리블랜드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폭포 아래로 떨어진 물이 파도치듯이 굵고 거칠게 굽이치는 모양새를 잘 그려냈지요. 특히 기다란 폭포 줄기 가운데 산허리에는 구름이 띠를 두르고 있어 폭포의 높이감은 물론 신비스러운 운치를 더해줍니다. 또 봉우리들이 그저 거칠지 않게 적당한 마무리를 하고 있음도 볼만 합니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는 한 스님이 갓 쓰고 도포 입은 선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좌탑은 네 모서리에 장식이 없고, 큰 자리를 얹어놓는다. 관사 안에 지나다니는 길 사이에 두고, 관리들이 쉴 때 사용하였다. 와탑은 3면으로 난간이 세워져 있으며, 비단 보료가 깔리고 큰 자리가 놓여 있다. 단지 임금과 높은 벼슬아치와 관련한 의식이 있거나, 중국 사진을 접대할 때만 사용한다. 중국 송(宋)나라 관리로 고려 인종(仁宗) 원년(1123)에 사신으로 온 서긍(徐兢)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이렇게 좌탑(坐榻)과 와탑(臥榻) 곧 평상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 여름날 선비들이 책을 읽거나 낮잠을 즐겼던 평상 평상(平床)은 낮잠을 즐기거나 책을 읽고 바둑을 둘 때 쓰는 것으로 대청이나 누(樓)마루에 놓여있었지요. 기다란 각목(角木)이 일정 간격으로 벌어져 있어 통풍이 잘되므로 여름철에 제격입니다. 두 짝이 쌍으로 된 평상은 올라서는 곳에 난간이 없는 것이 보통입니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산중에 열 가지 경취(景趣)를 말했는데, 그 가운데는 평상 위에서 글 읽는 것도 들어 있습니다. 경기도 광명시의 오리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종택 사랑채에는 평상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조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바람 앞에 흔들리는 조국 안사람들이여 일어나라 며느리들이여 총을 메라 가서 아들을 돕고 남편의 뒤를 따르라 가정리 여우내골 여자 의병 삼십여 명 키운 힘 중국 땅 환인현 노학당 학교 세워 쟁쟁한 독립군 키워낸 열혈투사 ▲ 8월 15일 열린 한국여성독립운동가의 역사적 조명 학술 세미나 모습 위는 이윤옥 시인의 안사람 영혼 일깨운 춘천의 여자 의병대장 윤희순 시의 일부입니다. 어제는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주최로 서울 대방동 여성 플라자 2층 대회의실에서 윤희순 의병대장에 대한 학술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윤희순 의병대장은 강원 출신으로 이날 세미나에서는 강원지역 여성항일운동의 성격과 의미 박한설(강원대 명예교수), 강원지역 여성의병단체의 활동과 그 역할 강대덕(독립기념관 학예연구사), 독립운동가 윤희순,조화벽의 항일운동과 그 정신 심옥주(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윤희순의 의병가사와 강원여성의 항일정신 정금철 교수(강원대학)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특히 이번 학술세미나는 안사람의병가를 비롯한 수많은 의병가를 지어 잠자는 여성들을 일깨운 윤희순 의병대장의 삶을 종합적으로 조명한 의미 있는 학술세미나였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나라 없이 살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신들이 명령을 받들어 연호(年號)를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광무(光武), 경덕(慶德)으로 준비하여 감히 아룁니다.하니, 명을 내리기를, 광무라는 두 글자로 쓸 것이다. 하였다. 위 내용은 고종실록 34년(1897) 오늘(8월 14일, 양력) 고종이 연호를 쓴다는 것을 명한 기록입니다. ▲ 노랑 황제 곤룡포를 입은 고종(왼쪽), 연호를 광무로 고종실록 34년 8월 14일 기록 연호는 임금이 즉위한 해에 붙이던 칭호이지요. 우리나라는 고구려 때 광개토대왕이 처음으로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썼으며, 신라의 진흥왕,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때에도 연호를 썼습니다. 발해는 건국 초 진국이라는 나라 명칭을 사용할 때부터 망할 때까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궁예도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지요. 이후 고려는 태조왕건-천수, 광종왕소-광덕, 준풍, 경종은 태평이라는 연호를 쓴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달력은 지금처럼 아무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황제만이 하늘의 움직임을 읽어 월력을 만들었지요. 따라서 제후를 자처했던 조선은 중국으로부터 매년 달력을 받아서 사용했기에 연호를 쓸 수 없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5년 전 김재경 국희의원실은 KAIST 문화과학대학과 함께 한글 세계화를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한 바 있다. 당시는 이미 30억대의 휴대폰이 쓰이고 있었고 한글 덕분에 한국은 세계에서 문자메시지를 가장 많이 쓰고 있었다. 문자 입력이 불편했던 미국에서는 알파벳 26자로 된 쿼티 자판의 똑똑전화(스마트폰)을 만들어 냈지만 우리는 오히려 불편하여 별 관심이 없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똑똑전화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고 우리나라가 그 똑똑전화를 가장 많이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기회 속에서도 한글은 나라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했고 알파벳과 영문 쿼티 자판만 세계표준화가 되다시피 했다. 따라서 다시 5년 전 정택토론회를 주도했던 KAIST 한글공학연구소 신부용 소장과 국회 김재경 의원실은 다시 손잡고 오는 9월 4일 오전 9시 30분 국회의원회관 2층 소회의실에서 제2회 한글 세계화를 위한 정책토론회를 연다. 신부용 소장은 KT와 공동연구로 2010부터 3년간 4억5000만 원을 들여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훕스(HUPS)를 개발했다. 훕스는 Hangul-based Universal Pho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오늘은 칠석(七夕)인데, 세속(世俗)에서 좋은 날[良辰]이라고 하니, 대인(大人)을 맞이하여 서로 이야기나 하고자 합니다. 다만 우중[雨中]이라 행례(行禮)가 어렵겠으므로, 청컨대 대인(大人)께서는 우의(雨衣)를 입고 바로 전내(殿內)에 들어오면 내가 마땅히 맞아 뵙겠습니다. 이는 성종실록 1년(1470) 7월 7일 기록으로 당시 조선에 와있는 중국사신에게 성종임금이 도승지를 시켜 칠석날 잔치를 베풀 테니 입궐해달라고 했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칠석날을 좋은 날로 여겨 잔치를 벌였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 덕흥리 고분 벽화에 그려진 견우직녀도 또한 1934년 11월에 나온 삼천리 잡지에 실린 월탄 박종화의 견우직녀 시를 보면, 밤한울 구만리엔 은하수가 흘은다오 / 구비치는 강가에는 남녀 두 별 있엇다오 / 사랑에 타는 두 별 밤과 낯을 몰으것다 / 한울이 성이 나서 별하나를 쪼치시다 / 물건너 한편바다 떠러저 사는 두 별 / 秋夜長 밤이길다 견듸기 어려워라 / 칠석날 하로만을 청드러 만나보니 / 원수의 닭의소리 지새는날 재촉하네 와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칠석 전날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타고 갈 수레를 씻는 '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의정부와 육조(六曹)에서 아뢰기를, 어제 고기를 권하옵다가 윤허 받지 못하였사온데, 신 등은 생각하옵기를, 이제 한창 혹독한 더위에 오랫동안 간소한 반찬만을 드셨다고 여겨지옵니다. 청하옵건대 고기를 드시어 신 등의 바람에 들어주소서.” 위 내용은 《세종실록》 23년(1441) 7월 30일 기록입니다. 세종이 세자빈이 죽은 뒤 오랫동안 생선이나 고기를 들지 않고, 가벼운 반찬만 들어 병이 날까 신하들이 걱정한 나머지 고기 들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이에 세종이 마지못해 받아들입니다. 태종이 죽으면서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하는 세종이 상중이라도 고기를 먹도록 유언을 할 정도로 세종은 고기를 좋아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세자빈의 상중이라며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다니 신하들이 걱정할 만도 합니다. ▲ 신하들이 세종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는 《세종실록》(왼쪽), 죄수들 옥에 물을 넣어주어 더위를 타지 않게 하라는 《세종실록》 30년(1448) 7월 2일 치 기록 또 《세종실록》 30년(1448) 7월 2일 기록에는 세종임금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전에는 더위를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몇 해 전부터 더위가 들기 시작하여, 손으로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사대부 화원 강세황은 올해 태어난 지 300해가 된다.강세황은 보통 물러나 쉴 나이인 61살 노인과거에 장원급제한 뒤 능참봉(왕릉을 지키는 벼슬)으로 시작하여 6년 만에 정2품 한성부판윤에 오르는 초고속 승진을 했다. 누가 뒤를 봐준 것이 아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때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인정하여 갈고닦아 드디어 사람들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 위대한 강세황전이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특별전시실에서 오는 8월 25일까지 열리고 있다. 강세황은 시(詩)와 글씨(書), 그림(畵)에 모두 능통한 예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그에게 평을 받지 못하면 부끄럽다고 생각할 만큼 뛰어난 비평가였다. 그 강세황전을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으며 감상할 기회를 가졌다. 이번 전시회는 모두 6부로 나누어 강세황의 모든 것을 살핀다. 제1부는 “문인화가의 초상”이다. 보물 제590-1호 강세황초상을 비롯하여 강세황 기로소耆老所 입소를 기념하여 정조의 명으로 이명기(李命基, 1757~?)가 그린 초상, 궁중화원 한종유韓宗裕(1737~?)가 그려준 초상 등 강세황 초상을 한 자리에 모아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