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논산의 명재(윤증)고택을 찾아가는 날, 비는 오락가락하고 더위도 제법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대문이 없는 집안에 들어가면서 만난 아름다운 정원과 붉게 핀 배롱나무는 불쾌지수를 깨끗이 씻고도 남음이 있었다. 누마루 같이 탁 트인 사랑채에 오르면서 고택이 주는 편안함 그 이상의 운치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사랑채 앞 정원 의전과 의창제도로 가난한 이들을 구제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1714) 종가는 나눔을 실천한 집으로 유명합니다. 어떤 나눔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 사랑채에서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 이는 명재의 12대 후손인 윤완식(尹完植·1955~) 선생. 그는 서울에서 사업하다 15년 전 모든 걸 접고 귀향했다고 한다. 원래 종손은 형님이었지만 몇 년 전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현재 봉사손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 종가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 하는 명재의 12대 후손인 윤완식(尹完植·1955~) 선생 “명재 할아버님의 큰아버지 윤순거(尹舜擧) 할아버님 이후 우리 집안은 이웃과 함께 살기 위해서 의전(義田)과 의창(義倉) 제도를 운영하였습니다.” 윤순거 이후 윤씨 노종파는 다시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매일같이 먹는 물을 취하는 방법은 수도나 우물을 통해서 입니다. 수도는 더러운 강물을 정수지에서 걸러 보내는 것이라 안심 할 수 있지만 수도설비는 도회지에만 있고 도회지에도 수도를 사용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입니다. 우물 소독을 위해서는 쇄분이 제일 좋습니다. 또한 차류산소다를 쇄분의 10분의 1로 넣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효기간이 불과 이틀입니다. 그럼으로 한번 소독했다고 등한히 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1928년 7월 19일 동아일보에 나온 “녀름과 우물소독”이라는 제목의 기사입니다. ▲ 1928년 7월 19일 동아일보 "여름과 우물소독" 여름철이면 물의 오염으로 배탈설사 같은 전염병이 돌아서인지 이 무렵 신문들은 여름철에 우물소독을 각별히 하라는 기사를 자주 싣고 있습니다. 우물 소독약도 다양하여 소다로 소독을 하라는 기사도 있고 그밖에 여러가지를 소개합니다. 1932년 7월 28일치에는 표백분으로 우물물을 날마다 소독하라면서 “물 1석(石)에 표백분 1그램을 섞어 수십 배로 희석한 뒤 우물에 부어 30분이 지나면 장질부사(장티푸스), 이질, 호열자(콜레라) 균이 다 죽어버린다.”라는 기사도 보입니다. 예전보다 국민의식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중 열셋째 입추(立秋)입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절후인데 이날부터 입동(立冬) 전까지를 가을이라고 하지요. ≪고려사≫ 권84「지(志)」38에 “입추에는 관리에게 하루 휴가를 준다.”라는 내용이 보입니다. 입추 무렵은 벼가 한창 익어가는 때여서 조선시대에는 이때 비가 닷새 이상 계속되면 비를 멎게 해달라는 기청제(祈晴祭)를 올렸습니다. ▲ 입추 뒤에 말복과 처서가 온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런데 입추면 가을이 들어서는 때지만 이후 말복이 들어 있어 더위는 아직 그대로입니다. 우리 조상은 왜 입추를 말복 전에 오게 했을까요? 주역에서 보면 남자라고 해서 양기만을, 여자라고 해서 음기만 가지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은 조금씩 중첩되게 가지고 있다는 얘기인데 계절도 마찬가지이지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려면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야 하고, 이 역할을 입추와 말복이 하는 것입니다. 또 여름에서 갑자기 가을로 넘어가면 사람이 감당할 수가 없기에 미리 예방주사를 놓아주는 것이겠지요. 세상일이 다 그렇지 않을까요? 참고로 “입추의 여지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입추(立錐)는 2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때 세자를 가르친 것은 나중에 임금을 만들기 위한 영재교육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자를 가르치기 위한 별도의 기관을 두었습니다. 물론 태조 때에는 그저 “세자관속(世子官屬)”이라 하여 관리만 두었는데 세조 때 드디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을 설립하였습니다. 시강원 설립 목적은 유학교육을 통해서 미래의 임금인 세자에게 임금으로서 갖추어야 할 학문적 지식과 도덕적 자질을 기르기 위함이었지요. ▲ "세자시강원"에 걸어두었던 춘방 편액으로 효명세자의 예필(국립고궁박물관) 이때 세자를 가르치는 시강관들은 모두 당대의 실력자들이 임명되었습니다. 세자의 사부는 물론 가장 고위직인 영의정과 좌,우의정이 맡았지요. 하지만, 이들은 나랏일로 바빴기 때문에 실제로 세자를 가르치는 사람은 빈객(賓客) 이하의 전임관료들이었는데 주로 문과 출신의 30~40대의 참상관(參上官, 정3품에서 종6품 관료)으로 당상관 승진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종실록 13년 12월 26일 기록을 보면 “시강관 박세희(朴世熹)가 아뢰기를, ‘대신(大臣)을 대하는 데는 반드시 예모(禮貌)로써 하여야 합니다. 옛날에는 불소지신(不召之臣)이 있으니, 그에게 배운
[그린경제=김리박 시조시인] 적삼 아가씨 가람가 가랑비를 달게 젖는 아가씨 내리는 흰쇠 비는 씩혀 주듯 아름답고 둘 돋은 적삼 젖가슴 사내는 숨을 잃고 ▲ 둘 돋은 적삼 젖가슴 사내는 숨을 잃고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 흰쇠 비 : 가는 은실처럼 내리는 비 *** 김리박 : 대한민국 한글학회 일본 간사이지회 회장 재 일본한국문인협회 회장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선정 한국어어문 지킴이 (황금상) 2006년 일본 히라가타시 교육위원회 조선어강좌 특별강사 일본용곡대학(龍谷大學) 한국어강좌 강사 일본관서대학(關西大學)비교지역문화강좌 강사 누리편지 ribak@hera.eonet.ne.jp 손말틀 (일본) 090-8147-7689
[그림경제=김영조 기자] ≪고종실록≫ 33권, 32년(1895) 11월 15일에 고종은 “짐(朕)이 머리를 깎아 신하와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니 너희들 대중은 짐의 뜻을 잘 새겨서 만국(萬國)과 대등할 수 있도록 하라.”며 단발령을 내립니다. 단발령을 내리는 까닭을 조정은 단발을 함으로써 만국과 동등해질 수 있고, 위생적이며 활동적임을 내세웁니다만 온 나라는 들끓습니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곧 “몸과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를 금과옥조로 삼았던 백성은 머리카락 자르는 것을 불효로 보았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백성은 단발령을 완강히 거부했고, 이에 순검들은 길거리에서 상투를 마구 자르거나 민가에 들어가 강제로 머리를 깎기도 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심지어 16살의 어린 신부는 남편이 머리 자르고 양복을 입고 집에 들어오자 자결까지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 단발령 이후 양반들은 상투를 자르기 전 사진을 찍어두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단발령을 거부할 수 없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자르는 대신 머리 자르기 전 초상 사진을 찍거나 초상화를 그려 안방 벽이나 출입문 위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32년 동안 바느질 하는 데 쓴 실 길이가 300마일이나 된다고 한다. 그는 1903년부터 32년간 자기가 바느질 하는 데 쓴 실패를 세어보니 그 수가 무려 2,024개가 되었다고 한다. 그 실패는 보통 250야드 이상의 실이 감겨있었으므로 그것을 모두 합하면 실의 길이가 300 마일 이상이라고 한다. 그는 지금 나이가 60이 넘었지만 아직도 안경을 안 쓰고 일을 한다니 참으로 기특한 바느질꾼이다. ▲ 1935년 3월 21일 치 바느질 만히한 부인이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기사 위는 1935년 3월 21일치 동아일보 기사로 바느질 만히 한 부인 60평생에 실패 수 12,000 개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어디 이 여성뿐이겠습니까? 일제강점기까지 갈 것도 없이 저의 어머니가 살아계시던 7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들에게 필수품은 반짇고리라고 할 만큼 일상에서 바느질거리가 많았습니다. 대가족의 구멍 난 양말을 꿰매는 것부터 여름철에는 할아버지 모시바지 저고리 따위를 손수 만들어 드리시느라 어머니 손에서 바늘이 떠날 날이 없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겨울에는 솜을 두둑이 대고 누비옷을 만들어 자식들이 추위에 떨지 않게 해주시고 겨우내 식구들이 덮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1959년 3월 부여 군수리에서 오늘날 좌변기 같이 길쭉하게 생긴 이상한 그릇이 출토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임금이 쓰던 매우틀과 비슷한 모양인데 아마도 방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일을 본 다음 양쪽에 달린 손잡이로 내용물을 버리지 않았을까요? 이는 궁궐이나 절에서 지위가 높은 여성들이 썼을 가능성이 있는 휴대용 소변기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휴대용 소변기로 추측되는 부여에서 출토된 백제 유물들 / 남성용 호자, 고용 소변기, 여성용 소변기(시계방향) 그런데 이후 1979년 3월 역시 부여 군수리에서 더욱 이상한 모양의 그릇이 출토되었습니다. 마치 동물이 앉아있는 모습인데 얼굴 부위에는 둥그렇게 구멍이 뚫려있지요.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이것은 호자(虎子)라고 부른 남성용 소변기로 짐작합니다. 그 까닭은 중국에서 이와 비슷한 것들이 발굴되었는데 문헌에 오줌통이라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중국역사서를 보면 옛날에 기린왕이라는 산신이 호랑이의 입을 벌리게 하고, 거기에 오줌을 누었다고 전하며, 새끼호랑이 모양을 하고 있다고 호자라고 부른 듯합니다. 그런가 하면 부여지방에서 출토된 또 다른 모양의 그릇도 있는데 항아리 모양에 앞에는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자갈왓 밭을 갈고 씨 뿌리고 다질 때에, 마흔여덟 뿔방망이 돌아가며 땅을 치네. 농부는 네가 아니면 누굴 불러 이 일 하리. 바위 같은 흙덩이도 네 앞에선 가루되어, 뿌린 씨앗이 골고루 덮이나니. 너 혼자 하는 이 일을 사람이 어찌 하리. 갈옷에 삿갓 쓰고, 씻부개기 둘러매고, 씨 뿌리며 자라온 어린 시절 생각하면 갈 가다 밭만 보아도 어머니가 그립구나. ▲ 씨를 뿌린 뒤애 밭을 다지는 농기구 남태 (제주민속박물관) 위 글은 제주민속박물관 진성기 관장이 쓴 남태입니다. 남태는 씨앗을 뿌린 뒤에 밭을 다지는 나무로 만든 연장인데 제주도에서만 쓰였다고 하지요. 제주도는 화산재로 이루어진 밭이 많은데 땅이 메마르고 흙이 가벼우며 자갈이 많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심하기 때문에 씨를 뿌리고 나서 땅을 다져주지 않으면 씨앗이 흙에 달라붙지 못하고 바람에 흙과 씨앗이 말라 싹이 제대로 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씨를 뿌린 뒤에는 꼭 남태를 끌어서 밭을 다져야만 했습니다. 조선 세종 때의 문신인 정초(鄭招)변효문(卞孝文) 등이 쓴 ≪농사직설(農事直說)≫에는 34월 풀이 많이 자랐을 때, 윤목(輪木)으로 풀을 죽이고 바닥을 고른 다음 늦벼를 뿌린다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이제 한국도 서양결혼식에 밀려 전통혼례는 겨우 명맥만 유지 하는 정도다. 하지만, 시간에 쫓겨 그것도 15분 만에 벼락 치듯 뚝딱 해치우는 지금의 결혼식은 어쩌면 새롭게 부부로 출발하는 당사자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통과의례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저 형식만 보면 지루할 것 같은 전통혼례는 오히려 신랑신부에게 정신적 주춧돌이 될지도 모른다. 이 전통혼례를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전통혼례의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 다만, 전통혼례 가운데 몇 가지는 알아두면 좋을 것들이 있어 소개한다. 원앙이 아니라 기러기가 등장하는 까닭 ▲ 프랑스 귀메박물관, 전안하는 모양 위 그림은 프랑스 귀메박물관에 있는 전안하는 모양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이 그림에 보이는 전안례(奠雁禮)는 한국 전통혼례의 첫 절차로 신랑이 신부 집에 들어가서 신부의 혼주에게 기러기를 전하는 의례를 말한다. 그래서 그림에도 목기러기가 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전통혼례에서 기러기가 등장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기러기는 봄에 북녘으로 날아갔다가 가을에 다시 찾아오는 곧 음양의 이치를 따르는 철새이다. 동시에 배우자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새인데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