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빗=김영조 기자]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에는 1,500년 전 3년 동안 3,000명이 동원되어 쌓았다는 사적 제235호 삼년산성(三年山城)이 있습니다.(≪삼국사기(三國史記)≫ 권3 신라본기조 3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편) 신라가 중원지역의 거점을 확보하고 삼국 통일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고 하지요. 이 산성은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오항산성(烏項山城)으로, ≪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충청북도 보은의 삼년산성 성벽과 아름다운 꽃길 전체 길이 1.7㎞인 이 산성은, 구들장처럼 납작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井자 모양으로, 한 켜는 가로쌓기, 한 켜는 세로쌓기로 쌓아 성벽이 견고합니다. 성벽의 높이는 땅 모양에 따라 쌓았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아 1320m인데 거의 수직으로 쌓여 있습니다. 실제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수많은 전투가 이 산성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918년(태조 1) 왕건(王建)이 이곳을 직접 공격하다가 실패한 적이 있는 등 기록상으로는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성이라고 하지요. 이 성을 오르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1,500년 전에 이렇
[얼레빗=김영조 기자] 바지 허리띠에 매달린 삐삐에서 삐삐삐소리가 납니다. 얼른 삐삐를 꺼내 찍힌 문자를 확인합니다. 8282 마누라 삐삐에 찍힌 문자는 마누라가 집으로 빨리 오라는 독촉이었습니다. 아이쿠 내가 술 마시는 거 눈치 챘나? 삐삐는 손말틀(휴대폰)이 없던 시절엔 편리한 문명의 이기였지만, 때로는 족쇄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삐삐를 받고 연락할 빨간 공중전화가 필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 초창기 모토로라 삐삐(왼쪽), 아이들이 좋아했던 여러가지 삐삐들 삐삐는 별명이었고, 정식 용어로 무선호출기(無線呼出機)였으며, 영어로는 페이저(pager) 또는 비퍼(beeper)라 했습니다. 여기서 페이저는 원래 하인이나 심부름 소년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페이저는 호출장치를 뜻하게 되었는데 그런 까닭으로 벨보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삐삐가 대세를 이루던 시절 8282는 물론 1004(상대가 천사라는 뜻), 0404(영원히 사랑해), 012 486(영원히 사랑해) 같은 숫자식 언어가 유행했지요. 우리나라에서는 1982년 12월 15일 처음으로 이 삐삐란 것이 등장했습니다. 그 뒤 1992년 온 나라로 확대되었지요. 또 1993년부터는 나라밖에서도 호
[얼레빗=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선비들은 청렴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특히 비가 새는 방안에서 일산을 받은 채 일산(日傘)이 없는 집에서는 장마철을 어떻게 견디어 내나?라고 했다는 유관(柳寬) 선생은 조선조 청백리로 소문났지요. 또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 ≪지봉유설(芝峯類說)≫을 쓴 이수광의 ≪조선의 방외지사(方外志士)≫에 보면 청백리 벼슬아치 김수팽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선 영조 때 호조 아전을 지낸 김수팽은 청렴하고 강직해 전설의 아전(衙前)이라 불리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습니다. ▲ 전설의 아전 김수팽이 판사를 부끄럽게 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호조 창고에 나라 보물로 저장한 금바둑알 은바둑알 수백만 개가 있었는데 이를 판서가 옷소매 속에 한 개 집어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김수팽이 무엇에 쓰시려고 하십니까?라고 묻자 판서는 어린 손자에게 주려고 한다.라고 대답했지요. 이에 김수팽은 금바둑알 한 웅큼을 소매에 넣으며 소인은 내외 증손자가 많아서 각기 한 개씩만 준다고 해도 요정도로는 부족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해 판서가 금바둑알을 가져갈 수가 없도록 했습니다. 또 김수팽은 아전인 아우가 부업으로 염색을 하는 것을 보고 나라의 녹을 받는 사람이
[얼레빗=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는 예부터 더불어 살기 위한 여러 가지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농사지을 때 했던 두레인데 지방마다 조금씩 다른 이름,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항두계놀이’도 역시 두레의 하나인데 함께 일을 하려고 조직된 평안도의 특수 농사꾼 계지요. 가뭄이 심하거나 홍수 또는 사고 때문에 농사일이 밀렸을 때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하나 되어 농사를 돕곤 했는데, 이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이루어진 사연들을 노래로 표현하는 연희극이 ‘항두계놀이’입니다. ▲ 전통연희극 "항두계놀이"의 한 장면 1 평안도 항두계 놀이는 긴아리, 자진아리, 호미타령 같은 토속민요와 수심가, 엮음수심가 같은 평안도의 대표적인 통속민요와 함께 합니다. 한자말로는 향도계(香徒,鄕徒契) 놀이인데 평안도 사투리로 “항두계 놀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 항두계놀이가 연희극으로 탄생한 배경에는 서도연희극보존회 유지숙 회장(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전수조교)이 서도민요를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 숨어 있습니다. 서양 뮤지컬은 상설공연장도 있지만 토종 뮤지컬인 항두계놀이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실정입니다. 봄에 씨앗을 뿌려 가을 추수하
[얼레빗=김영조 기자] 1932년 4월 29일, 81년 전 오늘은 윤봉길 (1908. 6. 21 출생 24살로 의거 순국)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지금은 노신공원)에서 일제의 조선침략을 만천하에 응징한 날입니다. 제가 채소 바구니를 등 뒤에 메고 날마다 홍구 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중략)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땅히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동경 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습니다. 저를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위는 ≪백범일지≫에 나오는 이야기로 백범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의 만남 장면입니다. ▲ 의거 전 한인애국단 김구 단장과 함께(왼쪽), 이때 김구 선생에게 건네준 윤봉길 시계(보물 제 968-3호) 거사 당일인 4월 29일 새벽 백범은 윤봉길 의사와 마지막 식사를 합니다. 식사가 끝나고 거사 장소로 나서기 전 윤봉길 의사는 앞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1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면서 자신의 6원짜리 시계를 백범에게 주고 자신은 백범의 2원짜리 시계를 찹니다. 그리고 백범과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현장으로 떠나지요. 의거 직후
[얼레빗=김영조 기자] 시인 용혜원은 셋방살이에 대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차피 모든 인생은 세상살이인 것을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셋방살이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 우리네 삶은 늘 슬펐다 어린 자식들 굴비 엮듯 줄줄이 데리고 산동네 달동네 머무를 곳을 찾아 두리번 두리번 거리다 어렵사이 얻은 셋방에 한 식구 덩그렇게 앉으면 감사가 있고 웃음이 있고 사랑이 있고 애비는 가족들에게 용서를 빌며 마음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 재봉틀과 앉은뱅이책상 그리고 요강까지 셋방의 풍경(청암민속박물관) 그렇습니다. 비집고 들어서는 반지하 방 한 칸의 서글픔이 있었습니다. 천정에는 여기저기빗물이 샌 흔적이 있고,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음산하기만 했던 셋방. 그래도 그렇게 들어와 잘 수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행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용혜원 시인은 보증금 월세를 올리려는 집주인 마나님의 싸늘해 보이기만 한 눈빛은 이웃나라 처절한 전쟁소식 보다 코 앞에 닥친 급보 중의 급보였다.라고 했지요. 그때 셋방을 얻으려면 주인 마나님은 아이들이 몇이 있는지를 꼭 물어봤습니다. 그리곤 주인 마나님은 염라대왕 같은 얼굴로 식구가 많아도 안 된다, 아이들이 떠들면 안 된다. 빨래를
[얼레빗=김영조 기자] 국악에는 민속악과 함께 궁중에서 연주되거나 선비들이 마음을 닦기 위해 연주하던 음악 정악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인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이 있지요. 종묘제례악은 조선왕조 역대 임금과 왕후의 신위(神位)를 모신 종묘에 제사지낼 때 연주하는 음악을 말하며,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은 공자맹자증자와 같은 중국 유학자와 설총조광조이황 같은 분들을 모시는 제사 때 쓰이는 음악입니다. ▲ 종묘제례악에 쓰이는 호랑이 모양의 국악기 어(敔) 그런데 이 제례악들에는 민속악에서 쓰지 않는 특별한 악기들이 있습니다. 먼저 호랑이 모양을 한 것도 있지요. 호랑이를 본뜬 모양으로 등줄기에 27개의 톱니가 달린 어(敔)는 음악을 끝낼 때 쓰는 악기입니다. 연주법은 둥근 대나무 끝을 쪼개 만든 채로 호랑이의 머리를 세 번 치고는 나무톱을 꼬리 쪽으로 한번 훑어 내리지요. 이것을 세 번 함으로써 음악의 끝을 장식합니다. 호랑이 포효 소리가 아닌 탁 타그르르하고 소리가 나는 국악기 어는 악기가 아닌 장식품이란 느낌이 들게 하지만, 뜻밖에 다른 악기들과 잘 조화가 됩니다. 또 속이 빈 나무 상자에 구멍을 뚫고
[얼레빗=김영조 기자]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은 풍악(楓岳)으로 가는 중을 보내며(送僧之楓岳]라는 아래의 한시를 썼습니다. 일만 이천 봉은(一萬二千峯) 높고 낮음이 진실로 다르다네.(高低自不同) 그대 보게나, 해 돋을 때(君看日輪出) 높은 곳이 가장 먼저 붉다네.(高處最先紅) ▲ 금강에 살어리랐다 / 그림 한국화가 강장원 금강산을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진 모양새에 따라 봉래산(蓬萊山), 가을엔 단풍이 아름다워 풍악산(楓嶽山), 겨울엔 바위만이 앙상한 뼈처럼 드러나 개골산(皆骨山)이라고 하지요. 그 풍악산에 해가 돋으면 어떤 봉우리가 가장 먼저 붉어질까요? 당연히 가장 높은 봉우리 비로봉일 테지요. 그러면서 서서히 일만 이천 봉우리가 모두 붉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성석린이 이 시에서 뜻하는 것은 좀 더 깊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인 김종직은 이 시에 대해 도를 깨닫는데 앞뒤와 깊고 얕음이 있는 것은 인성의 높고 낮음에 있는데 따른 것임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풀었지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도를 깨닫고 우뚝 서려면 사람 됨됨이가 먼저인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단순한 시가 아니라 철학을 담고 있는 글이란
[얼레빗=김영조 기자] 조선시대는 기록의 나라였습니다. 세계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따위가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건 나랏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개인들도 기록하고 또 기록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 노인 병 다스림의 기록 ≪정청일기(政廳日記)≫도 그 하나입니다. ≪정청일기≫는 영의정이면서 영중추부사 벼슬을 가진 75살 노수신의 병을 다스리는 상세한 기록입니다. 1588년(선조21)부터 시작해서 1590년 3월 11일까지 병색이 깊은 노수신의 건강상태와 음식 그리고 약 수발 상황이 자세히 쓰여 있습니다. ▲ 노수신 병 다스림 과정의 기록, 정청일기 기록을 보면 매일 먹은 식사는 밥을 위주로 탕국, 구이, 마실 것, 과일은 물론 고기도 올렸습니다. 탕국 종류로는 숭어탕, 생대구탕, 굴탕, 시래기탕, 가자미탕, 쏘가리탕, 자라탕, 족탕처럼 다양했고, 노인인지라 죽도 많이 먹었는데 팥죽, 들깨죽, 원미죽(멥쌀을 굵게 갈아 가루는 걸러내고 싸라기로만 쑨 죽), 율무죽, 청량미죽(파란 빛깔의 차조로 쑨 죽), 콩죽과 함께 붕어죽과 우유죽도 먹었지요. 그리고 노수신은 다양한 고기류도 먹었는데 소위장구이, 자라구이, 닭찜, 오소리고기 따위를 먹었습
[얼레빗=김영조 기자] 내일은 24절기의 여섯째로 봄비[雨]가 내려 백곡[穀]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穀雨)입니다. 이 무렵부터 못자리를 마련하는 일부터 본격적으로 농사철이 시작되지요. 그래서 “곡우에 모든 곡물들이 잠을 깬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 “곡우에 비가 오면 농사에 좋지 않다.”, “곡우가 넘어야 조기가 운다.” 같은 농사와 관련한 다양한 속담이 전합니다. ▲ 차를 즐겼던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그림 이무성 작가) 그리고 이때가 되면 햇차가 나오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다례라는 말이 무려 2062번이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엔 차를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당시는 녹차(綠茶)라 부르지 않고 차(茶) 또는 참새 혀와 닮은 찻잎으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작설차(雀舌茶)라고 불렀습니다. 녹차는 우리가 일본에 전해준 뒤 오랫동안 일본에 뿌리내려 그쪽 기후와 땅에 맞는 품종으로 바뀐 것이며, 이를 가공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녹차는 원래 찻잎을 쪄서 가공하는 찐차이고, 우리 차는 무쇠솥에 불을 때면서 손으로 비비듯이 가공하는 덖음차입니다. 그래서 차맛에 민감한 이들은 녹차와 우리 전통차의 맛이 다르다고 하며, 색깔도 다릅니다.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