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빗=김영조 기자] 동아일보 1961년 11월 28일 치에는 제기동에 일가족 연탄가스 중독사건, 다섯 명은 죽고 한 명은 중태라는 사회면 중요기사가 보입니다. 당시는 웬만한 집은 모두 연탄을 때고 살던 때라 종종 연탄가스 중독 사건이 나곤 했었죠. 심지어 1960년대 초에는 공군참모총장 집에서 운전병 3명이 연탄가스에 중독, 숨진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도 있었습니다. ▲ 고약한 가스와 함께 일상이 되었던 연탄갈기(선녀와 나무꾼)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민들은 연탄보일러를 땠지요. 그런데 방이 따뜻하지 않으면 셋방 사는 이는 보일러가 고장 난 것이라며 주인에게 보일러를 고쳐 달라 하고 주인은 연탄을 자주 갈라하여 옥신각신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 15장을 갈기도 했고 그러자니 새벽 3시에도 일어나 연탄을 갈아야 했던 힘겨운 때도 있었지요. 연탄을 갈 때면 고약한 가스 냄새 때문에 애처가 남편은 연탄갈기 전문가가 되어야 했습니다. 연탄가스 중독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니 중학교 시험문제로 연탄가스를 막는 비법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보면 굴뚝을 높이 세운다. 방바닥을 잘 바른다가 있고 방에 참새를 기른다는 답도 보
[얼레빗=김영조 기자] “저 사람은 누구인고? 수염과 눈썹이 새하얀데 머리에는 사모(벼슬아치들이 관복을 입을 때 쓰는 모자)를 쓰고 몸에는 평복을 입었으니 마음은 산림에 가 있으되 이름은 조정의 벼슬아치가 되어 있구나. 가슴 속에는 수천 권의 책을 읽은 학문이 있고, 또 소매 속의 손을 꺼내어 붓을 잡고 휘두르면 중국의 오악을 뒤흔들만한 실력이 있건마는 사람들이 어찌 알리오. 나 혼자 재미있어 그려봤다!” ▲ 사모를 쓰고 평복을 입은 강세황 자화상 위는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로 문단과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자화상을 그리고는 스스로 쓴 화제(題, 그림 위에 쓰는 시문-詩文)입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 60년을 벼슬 한 자리 하지 못했어도 스스로 대단한 학식과 포부가 있다고 생각하며 절치부심 자신을 닦았습니다. 그는 “올해는 봄추위 심하여(今歲春寒甚) / 복사꽃 늦도록 피지 않았네.(桃花晩未開) / 정원의 나무들 적막하지만(從敎庭樹寂) / 꽃이야 붓으로 그려 피우리라(花向筆頭栽)“라는 도화도(桃花圖)라는 한시를 지었습니다. 꽃이 피지 않아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스스로 붓으로 꽃을 그린다는 마음가짐으로 꿋꿋하게 살아간 것입
[김영조 기자] 나이 10살 때 아버지는 바다에서 풍랑으로 죽고, 어머니는 전염병으로 죽어 천애 고아가 된 김만덕. 그 뒤 김만덕은 친척집에서 살다가 기생이 되었지요. 그러다 양가 출신인 자신이 기생이 된 것이 원통하여 제주목사에게 눈물로 호소한 끝에 기녀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곤 객주를 차리고 장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제주의 양반층 부녀자들에게 뭍의 옷감이나 장신구, 화장품을 팔고 제주 특산품인 녹용이나 귤은 뭍에 팔아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 뒤 관가에까지 물건을 대주고 많은 장삿배도 가지게 되었지요. 그런데 정조 17년(1793)부터 제주도에는 흉년이 계속되어 세 고을에서만 굶어 죽은 사람이 6백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나라에서 보낸 구휼미를 실은 배가 침몰해 가난한 이들을 구해줄 곡식 1만 석은 바다 속에 가라않지요. 이 때 김만덕은 자신이 악착같이 번 전 재산을 털어 뭍에서 쌀 500석여 석을 사다가 굶어죽는 백성을 살렸습니다. ▲ 제주시에 있는 김만덕기념관(위), 정조 때 채제공이 지은 ≪만덕전≫ 김만덕은 이렇게 여성의 권리란 찾을 수 없었던 시대에 자신의 처지에 좌절하지 않고 끝내 신분을
▲ 세종국악관현악단 연주 모습 1 [그린경제=김영조문화전문기자]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임금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그 뜻을 다음과 같이 만천하에 선포한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하고자 한다. 세종이 최고의 성군이라 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것은 이러한 백성사랑의 마음 때문이리라. 그 성군 세종이 봄밤에 우리의 곁으로 내려온 듯 했다. 지난 4월 26일 저녁 7시 30분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세종국악관현악단 주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으로 세종국악관현악단 제58회 정기연주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국악관현악단이란 우리의 음악을 서양의 관현악단 곧 오케스트라(orchestra) 형식에 맞춰 표현하는 음악단체를 말함이다. 그 국악관현악단을 대표하는 것은 물론 국립국악관현악단, KBS국악관현악단, 서울시국악관현악단 등이지만 광주, 부산, 제주 같은 지자체가 만든 국악관현악단과 청소년국악관현악단, 어린이국악관현악단 등이 있다. 그러나 민간 국악관현악
[그린경제=김영조문화전문기자] 그동안 공휴일에서 빠져있던 한글날이 올해부터는 공휴일이 되었다. 이제 세계 최고의 글자 한글을 기리는 한글날은 이름 그대로 국가가 인정하는 날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한자말이나 영어에 푹 빠져 우리 말글의 중요성을 모를뿐더러 서슴없이 짓밟기도 한다. 특히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의 말이나 글을 보면 어려운 한자말이나 영어를 심하게 섞어 버무리는 것을 많이 보게 되는데 마치 영어나 한자말이 아니면 글 한 줄 완성하기 어렵다는 식이다. 정말 그럴까? 다행히 문학작품에서는 우리 말글을 살려 쓰고 있어 위안을 받는다. 소설의 예를 보자. 소설은 그 시대의 현실 언어를 가장 잘 반영한다고 한다. 국립국어원에서 1990년대 현대소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 토박이말과 한자어를 살펴보면, 50위 안에 든 한자말은 33위에 '여자'란 한 낱말이 있을 뿐이며, 100위 안에도 여덟 단어 정도이다. 이것은 사전에 실린 한자어가 우리말 전체의 70%나 된다고 하지만, 실제 말글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의외로 낮음을 말해준다. 소설에서 그렇다면 입말에서는 더더욱 입말에서는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한자말을 쓰는 것이 말글생활
한국 전통음악의 제반연구 가운데 주로 실기관련 분야의 이론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한국전통음악학회는 2013년 3월 21일 삼성동 소재 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김세종제 춘향가의 미적 접근이라는 주제의 학술모임을 개최하였다. 특별히 김수연 명창이 이끌고 있는 판소리김세종제 춘향가보존회와 공동으로 마련된 것이어서 더욱 뜻 깊은 행사였다. 한국전통음악학회는 봄가을로 국내 학술대회를 열어왔고, 여름방학에는 중국의 연변예술학원과 한중 학술 및 실연교류회를 그리고 겨울방학에는 미국의 명문 UCLA와 공동으로 Korean Music Symposium을 12번째 기록 중이다. 국내학술대회는 2000년 남북한 음악의 동질성 회복을 위한 대토론회를 시작으로 해서 주로 악기 연주분야나 시조창분야, 또는 경서도 민요와 선소리 등 주로 서울 경기지방의 음악을 중심 주제로 정하고 논의해 왔다. 그동안 판소리 관련 학술회의는 전통적으로 판소리학회가 전담해 오다시피 하였고 그동안 축적된 결과물도 방대한 편이나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판소리 이론에 접근하는 통로가 다양한 것도 전통음악 발전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용기를 내어 본 것이다. 한국인으로「춘향가」를 모르는 사람은 거
국악속풀이가 100회를 맞았다. 그동안 이 난에 국악 관련 내용들을 조금씩 소개해 드렸는데, 속풀이는커녕, 겉풀이도 제대로 되었는지 의문이다. 가곡과 시조, 가사에 관한 이야기도 했고, 정악과 민속악은 자전거의 앞뒤바퀴와 같은 관계라는 이야기, 농악은 한국인 신명의 뿌리라는 이야기, 한국의 무형문화재 정책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또 국악과 서양음악은 서로 다른 것이 특징이 된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벽파 이창배와 경서도 민요, 관악기의 피리, 대금, 단소 이야기와 현악기 거문고 관련 이야기 등을 이 난에 소개하였다. 그 동안 재미없는 내용들을 열심히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한다. 그리고 간혹 질의나 이견에 일일이 답장을 못해 드린 점 양해를 부탁드린다. 국악속풀이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시작한 글은 추임새에 인색한 세상이었다. 그래서 이번 100회의 제목은 추임새에 인색하지 않은 세상으로 정해 보았다. 평소에도 필자는 남을 칭찬하자는 말을 자주 하는 편으로 주위 사람들 칭찬에 인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다. 특히 무대 위에 올라있는 사람들에게 추임새가 얼마나 용기를 주고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
사라질 뻔한 300년 된 고택 영사정(永思亭)을 구하다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한 문화재수리기술자의 400여 일간 투쟁 ▲ '영원히 잊지 않고 생각한다'란 뜻의 고양시 영사정(永思亭)은 숙종의 장인 김주신이 지은 300여 년 된 조선시대 건축양식이 잘 보존된 고택이다 며칠 전 나는 한 문화재수리기술자 아내라는 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이렇게 문화재적 가치가 많이 남아 있는 집을 왜 나라는 외면하고 버려두는 것일까? 우리는 문중 어른 김씨에게 공사를 시작하지 말아 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문화재 지정을 해서 건물을 헐지 않고 보존하는 쪽으로 노력해보자고 다짐하고 돌아온 날 남편은 잠도 자지 않고 밤새 고민하더니 문화재청장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얼마 뒤의 일이다. 풀이 죽어 퇴근한 남편은 300년 된 집이 헐릴지 모른다.라고 했다. 문화재청장 앞으로 보낸 편지가 경기도 내 문화재청 관련 부서로 이첩되었고 그곳에 근무하는 담당자라는 사람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온 것이다. 이보세요. 최 선생! 하시는 업무나 하지 골치 아프게 왜 이런 것을 문화재청장한테 편지를 보냅니까? (어느 문화재수리기술자 아내의 편지 중에
반팔 한복, 꼭 필요한가? 생각을 달리하면 긴팔한복도 시원하고 건강에 좋다 옷이란 무엇인가? 옷의 기능과 가치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옷을 입으면서도 이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해본 적은 별로 없어 보인다. 굳이 그렇게 고민할 거리도 아닌 탓이기도 하다. 그저 남이 입으니까 입고, 남이 멋지다니까 입고, 남에게 뒤질세라 입고 그런 것은 아닐까? 한 학생과 한 반팔 한복에 대한 토론 나는 반팔 한복에 대해 한 학생과 온라인 토론을 벌린 적이 있었다. 물론 그 학생이 먼저 “여름생활한복- 반팔은 어떨까?”라는 제목으로 누리집의 게시판에 글을 올린 것이 발단이 되었지만 몇 번 오고간 진지한 토론은 나에게도 여러 가지를 생각게 해주는 일이었다. 나이 어린 그 학생은 오히려 어른들보다 더 수준높은 논쟁을 벌렸다. 먼저 그 학생이 도발적으로 제기한 이야기는 이렇다. “생활한복은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거추장스럽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있는 한복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닌가요? 그러한 생활 한복에게 격식을 따지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접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반팔도 전향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국회에 꼭 양복만 입고 등원하는 모습도
북한사회를 이해하는 키워드33=문화어 북녘을 방문해 만난 주민들에게 '괜찮습니까'라고 물으면 금방 '일없습니다'란 대답이 나온다. '무슨 일이 없다는 거지' 어리둥절할 지 모르지만 북에서 '일없다'란 말은 '괜찮다'는 뜻이다.이처럼 분단 반세기가 지나면서 남과 북의 언어에도 적지 않은 차이가 발생했다. 북에서는 도시락을 곽밥, 주차장을 차마당, 각선미를 다리매, 주먹밥을 줴기밥, 맞벌이세대를 직장세대로 부른다. 또 노크는 손기척, 레코드는 소리판, 원피스는 외동옷, 투피스는 동강옷, 삐삐는 주머니종, 아파트는 살림집 등 외국어를 우리말로 다듬어 쓰고 있다. 현재 이북말은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1960년대 후반 만들어진 문화어로 지칭된다. 북한은 문화어에 대해 "평양말을 기준으로 해 각 지방의 모든 우수한 말을 받아들이고 고유말을 바탕으로 하여 민족적 특성을 살리면서 현대적 요구에 맞게 발전된 말"이라고 정의한다. 북은 1966년 5월 "표준어라고 하면 마치 서울말을 이르는 것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라 평양말을 표준어로 정했다. 또 김 주석은 10여 년 전에 고유어와 한자어의 뜻이 같을 때는 고유어를 사용하며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