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세종대왕(1397 ~1450, 재위 1418 ~ 1450)은 조선의 4대왕으로 즉위하여 조선의 기틀을 굳게 다진 임금으로 배달겨레의 영원한 성군으로 존경받고 있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큰형(양녕대군) 둘째형(효령대군)을 제치는 과정에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런 가운데 성군의 성품을 알아본 아버지 태종이 자신의 뒤를 이을 임금으로 충녕대군(뒤에 세종대왕)을 택하여 임금이 되었다. 또 태종은 임금의 주변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형제들을 비롯한 친적 외척들을 쳐내는 악역을 자처하였고, 훌륭한 인재들를 등용하여 아들인 세종이 임금으로 성공하는데 앞 길을 다져주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다져놓은 기반위에서 무난히 왕위에 즉위하여 조선의 문화를 최고로 꽃피웠다. 세종은 백성들이 할 수 없는 어려운 한문공부로 인한 서러움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여, 자신의 생각한 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글자를 만들고자 하였고 결국 세계 으뜸 글자인 한글을 만들었다. 또 나라를 다스리는데 기본이 되는 각종 의례와 제도를 법으로 정하여 누구나 따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방면의 책을 출판하여 농업,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북한산은 서울의 서북쪽에 우뚝 솟아 있으면서 서울을 북쪽에서 불어로는 찬바람으로부터 막아주고 시각적으로 서울을 감싸고 있어 풍수적으로 서울지역을 명당으로 만들어주는 산이다. 북한산 줄기는 경복궁을 중심으로 볼때 인왕산이 뒤에서 중심을 잡고, 좌우로 뻗어내려 왼쪽으로 낙산과 오른쪽으로는 안산으로 감싸고 있는데, 그 안쪽의 명당터에 경복궁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그 뒤로 북한산이 솟아있으며, 북한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서울을 감싸고 있어, 서울을 큰 명당도시로 만들고 있는것이다. 그런 서울의 조산인 북한산은 산 자체가 크고 아름다운 바위들이 많이 있고, 높은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사계절 경치도 아름다운 곳이다. 뿐만아니라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자연적으로 국방의 요새가 되어 삼국시대에도 산성이 있었으며, 병자호란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북한산성을 축성하여 국난시에는 왕이 멀리 강화도로 가지 않고, 바로 북한산성 내 행궁으로 피하기 위하여 산성 안에는 왕의 임시 정무소인 행궁도 지었다. 그런 북한산에는 삼국시대부터 많은 절이 있는데, 숙종이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 절의 스님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또한 성이 완성된 뒤에는 산성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북한산 북서쪽 계곡고양시 지역에 있는 산영루(山映樓)는 북한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경 가운데 하나인데 "아름다운 북한산의 모습이 물에 비친다"는 뜻으로 붙여진 정자의 이름이다. 처음 산영루를 지었던 때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기 1603년 시인묵객인 이정귀가 북한산을 유람한 뒤 남겼던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에 산영루 옛터에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한산성이 축성인 1711년 이전부터 산영루는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산영루는 북한산성 주차장에서 북한산성으로 오르는 6부능선 쯤에 있어 산행을 한 참 하던 중, 등줄기에 땀이 나 꼭 쉬어갈 만한 곳에 있어, 산영루마루에 올라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계곡의 아름다움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옛부터 북한산에 오르는 많은 시인 묵객들이 루마루에 올라 북한산을 오르며 느낀 감상을 아름다움게 시로 풀어내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그리고 성호 이익 등이 있다. 그러나 1925년 경기지역에 몰아닥친 대 홍수로 인하여, 북한산내 행궁을 비롯한 산내 많은 절들과 함께 계곡의 물에 휩쓸려 사라져 흔적만 남께 되었는데, 산영루도 최근 까지 빈터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남 태안군 서쪽 끝에는 남으로 길게 뻗은 태안반도가 있다. 이 태안반도에서 서쪽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해당화가 많이 피어난 곳이라 하여 이름이 붙은 꽃지해수욕장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바닷가 해당화를 보기는 쉽지 않고, 서해로 펼쳐진 해수욕장의 중심에 우뚝솟은 바위섬이 2개 있는데, 그 두 바위로 말미암아 해질녁이면 황혼의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어 태안반도를 널리 알리는 명물로 각광받고 있다. 꽃지의 명물인 두 바위섬은 하나는 뾰족하고, 하나는 펑퍼짐하여, 각각 할아버지바위 할머니바위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바위가 생겨난 전설에 의하면, 이 바위는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의 휘하장수로 승언장군과 깊은 사연이 있다. 승언장군은 당으로 가는 뱃길의 출발점인 태안반도를 책임진 장수였다. 그런데 어느날 장보고로부터 해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급히 북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승언장군은 장보고의 명령에 따라 사랑하는 아내와 기약없이 이별하고 북으로 떠났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후 아무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되자 승언장군의 부인인 미도부인은 꽃지 바닷가 펑퍼짐한 바위에 올라 일편단심으로 남편인 승언장군이 돌아오기를 애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기원전 3천년경 나일강 하구 삼각주에서 이집트문명이 시작되었다. 이집트문명은 수메르문명을 이어 발전한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영향을 받은 문명으로, 나일강 하류의 비옥한 삼각주를 기반으로 고대왕국이 건설되었다. 나일강은 아프리카 중간지역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흘러가다 지중해에 이르는 긴 강인데, 해마다 비가오는 철에 시작된 범람은 해마다 같은 때 발생하였으며, 상류에서 흘러온 흙탕물은 나일강 하구 삼각주에 비옥한 토지를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해마다 강물이 범람하는 시기를 알아 맞추기 위하여 태양을 관측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천문학과 수학이 발달하였다. 이집트인들은 그 시기를 알기 위하여 태양을 관측하여 1년을 기록한 달력도 만들었다. 또 이를 기록하기 위하여 상형문자를 발명하여 이집트에는 찬란한 고대문명을 꽃피우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나일강 삼각주에서 생산된 풍부한 농업을 기반으로 강력한 고대국가를 만들었으며, 이런 힘을 바탕으로 거대한 왕들의 피라밋을 비롯한 세계를 다스리는 신전들을 만들었다. 이들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며, 태양이 매일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음날 또 다시 떠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현화사(玄化寺)는 고려 현종 9년(1018)에 창건된 고려의 왕실사찰이다. 현종은 현화사를 창건하고, 둔전(屯田) 1,240결을 내려주어 절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였으며, 당시 고려내 고승이었던 삼각산 삼천사의 주지 법경(法竸)스님을 모셔 현종의 왕사로 받들었다. ] 현종은 1021년 현화사에 다시 거동하여 현화사를 세운 내력을 담아 창건비를 세웠다. 이후 덕종1년(1032)에는 현화사에 휘신도량(諱辰道場 선왕 또는 선왕비의 기일(忌日)에 행하던 불교 행사)을 개설하였고, 문종 1년(1047)에도 휘신도량을 개설하였으며, 문종 6년(1052)에는 임금이 직접 스님들을 공경하는 의미의 반승(飯僧)행사도 베풀었다. 이는 현화사가 고려왕실의 으뜸 절이었음을 반증한다. 이후로도 문종 21년(1067)에는 현화사에 주석하던 고승 해린(海麟)국사가 노환을 이유로 개경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려 하자, 문종이 직접 현화사에 들러 탕약과 금은기(金銀器-금과 은으로 만든 귀한 그릇)를 해린국사에게 전하였으며, 문종 24년(1070)에는 왕자 탱(竀)을 이 절로 보내어 출가 승려로 만들었다. 그 왕자가 바로 훗날 초조대장경을 편찬했던 대각국사 의천스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구려는 한반도에 공식적인 기록으로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국가였다. 그것도 중국의 전진의 왕이었던 부견이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를 갖고자 기원후 372년 순도스님을 파견하여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주었다. 이때는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지 이미 300년이 더 되는 때로 중국은 불교가 화려하게 꽃피우고 있었다. 이후 고구려도 평양을 중심으로 많은 절들이 들어서고 불교가 융성했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이 불상은 연가 7년(53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참으로 귀한 고구려 불상이다. 불상 뿐 아니라 불상을 보호하며 부처님의 후광을 나타내는 광배가 온전하게 남아있고, 그 광배의 뒷면에는 불상이 만들어진 때와 목적도 자세히 글로 새겼다. 광배 뒷편 기록에 따르면, 이 불상은 평양 동사의 승려들이 불법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1,000구의 불상을 만들었으며, 이 불상은 그 가운데 29번째 것이라고 적혀있다. 그 가운데 999구 불상은 어디론지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이 불상만 남아서 전하고 있다. 1000구라는 숫자가 결코 작지 않지만, 1500년 세월 속에 살아남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증명하고 있다. 고구려 사찰에서 불상 1000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수많은 승탑 중 가장 화려하고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승탑으로는 원주에 있었던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과 충주에 있었던 정토사지 홍법국사실상탑이다. 승탑은 왕사 국사급 스님들이 돌아가신 뒤 나온 유골을 수습하고, 그 때 나온 사리들을 모아 스님들이 살았던 인연깊은 절에 탑으로 모신 것인데, 승탑의 유래는 불교의 여러 종파중에서도 선종(禪宗: 경전이나 염불 등이 아닌 좌선 수행을 통하여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얻기 위한 불교종파)이 성립된 후의 일로 통일신라 후기부터 시작되었다. 통일신라 후기와 고려시대에는 선종의 스님들 중 훌륭한 스님들은 국가나 왕의 스승으로 존경의 대상으로 삼아 정신적 스승으로 존경하며 국가적 행사에 왕사 국사를 앞세워 국론을 통일하고 결집시켰다. 이분들은 정치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깊은 산속에 수행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국가적으로는 든든한 의지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분들이기에 왕사 국사가 돌아가시면 국가에서는 큰 다비장을 마련하여 화장하였고, 이때 나온 스님의 사리를 모아 승탑을 세워주었던 것이다. 그런 승탑이지만 스님들의 덕과 법력의 정도에 따라 승탑의 규모와 형식도 달랐는데, 그 당시 국가적인 역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구 이촌동)에서 한국 동남쪽 해안에서 문화의 꽃을 피운 가야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가야는 그 지배층이 북방의 유목민족이며 그 초기에 남방의 해양민족과 흉합된 문화를 꽃피웠다. 현재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가야는 서력기원 후 42년 북방 유목민인 김수로왕을 비롯한 6명의 수장들이 한반도 동남부 해안가를 중심으로 국가를 세웠다. 이후 6년 뒤 인도의 해양문화를 가지고 온 허황옥을 왕비로 맞이하여 대륙문화와 해양문화가 결합한 복합문화를 꽃피웠다. 가야는 당시로서는 최첨단무기인 철기를 제작하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어, 노천철광석을 가공하여 각종 철제무기를 만들었고, 전투에서 사람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철갑옷과 투구, 철재 비늘갑옷 그리고 말에도 갑옷과 투구 등 다양한 철기문화를 꽃피웠다. 가야는 철을 가공하여 덩어리 또는 납작한 철정을 만들어 이를 수출하였다. 또, 생활용품으로는 각종 토기를 만들어 썼는데, 이는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귀족 왕족의 무덤안에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 때 만든 토기로는 그릇의 받침이 매우 크고 길어 특이하다. 가야의 철기는 신라 백제를 비롯한 일본(왜)에 중요 무역품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600년 대 삼국통일기 신라는 불교의 화엄종사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의상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화엄종의 체계를 세우던 지엄스님의 수제자가 되어 화엄학을 이어받아 신라로 돌아왔고, 자장율사도 중국에 유학하여 청량산에서 기도하던 중 깨달음을 얻은뒤 문수보살로 부터 불사리를 받고 들어와 신라땅에 명당터를 찾아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절들을 창건하였다. 이때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여 신라를 세계의 중심 불국토로 만들고자 황룡사를 창건하고 당시 최고의 기술로 구층목탑도 세웠다. 한편 당시 고승으로 쌍벽을 이루던 원효는 중국에 유학하지 않고도 화엄사상을 통달하여 신라에 토종화엄사상을 펼쳤다. 자장율사가 모셔온 진신사리는 신라땅 이곳 저곳 중요한 명당 터에 모시게 되었는데, 당시로는 신라 최북단으로 험한 산지인 이곳 오대산 비로봉에도 모시게 되었다. 오대산은 자장율사가 중국의 청량산과 비슷한 산세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찾은 곳으로, 오대산 중대 사자암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부처님의 화엄불국정토를 구현한 곳인데, 가운데에는 부처님인 비로자나불인 사자암을 짓고, 주변 사방으로는 동쪽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암, 서쪽에는 대세지보살을 모신 서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