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아름다운 바다에 섬들이 펼쳐진 한국의 남쪽에는 한국의 집들과는 다른 이색마을이 있다. 그곳은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로 이곳에 정착해서 사는 사람들은 주로 1960년대 독일로 파견되었던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돌아와 여생을 고국에서 살고싶어 세운 집들이다. 이들은 1960년대 한국의 어려운 경제적 여건 속에 부모 형제들에게 힘이 되고자, 온갖 역경을 감수하고이역만리 독일에서 병원의 간호사로 일하고, 또막장의 탄광에서 어렵게 일하면서 번 돈을 송금하여고국의 산업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젊은 시절 독일에서 일하고 그 댓가로 독일에살 권리를 얻어정착하여 살았지만, 노후에는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와살고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남해군에서는 이들에게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산지를 개발하여 100여 가구 주택지를 조성하였고, 이들이 돌아와 하나 둘 집을 지어 독일마을이 되었다. 독일마을 집들의 특징은 2층집에지붕 형태는 박공지붕이며, 경사지붕에 황토색 기와를 이었고, 벽체는 하얀색으로 단장하였다. 내부구조 또한 독일사람들이 살던 형태에 현대한국식을 가미한 주택들로, 한국에 이국적인 마을로 많이 알려져, 많은 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곳에 양수리가 있다. 양수리(兩水里)는 두물이 만나는 마을이란뜻의한문이름이고, 이를 우리말로풀어쓰면 두물이 만나는 곳인 '두물머리'가 된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남양주시 두물머리 근처에는 운길산이 있고, 그중턱에 수종사(水鐘寺)가 있다. 수종사는 조선 전기인 1458년(세조4)에 당시 임금 세조의 명으로 창건되었다. 당시 세조는 금강산으로 순행하고 돌아오던 중 이곳 근처 토굴에서 하룻밤을 노숙을 하게되었는데, 한밤중에 어디선가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은은한 절의 종소리처럼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종소리가어디에서 나는지 날이 밝아 확인해보니, 근처에 동굴이 있고, 그 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며 소리가 났는데, 동굴의 한쪽에 있는16나한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이곳에 대웅전을 건립하고 절을 세운 후, 동굴에서 발견한16나한은나한전을지어 모시게하였다고 한다. 그 뒤로조선을 지나는 동안 수종사 또한 많은 곡절을 겪었다. 창건이야기는 이와 같았지만, 이후로는 전하는 이야기가 별로 없다. 현재 남은옛 자취는 팔각오층석탑, 승탑 1기가 있는데, 1957년 팔각오층석탑을 해체하여 본 결과 그곳에는 금동불 18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겨울동안 땅속에 뿌리로만 있던 연은 봄이 되면 싹을 티운다. 싹이 튼 연잎이 5월이면 무성해지고, 6월 부터는 꽃이 피기 시작하여 7월~8월에는 연못에 온통 화려한 꽃을 피고, 늦게는 10월까지 꽃을 피지만, 10월에 접어들어늦게 핀 연꽃은 열매를 맺기는 어렵다. 연은 불교의 상징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옛 선비들은 연꽃을 군자의 상징으로도 여겼다. 창덕궁 후원에는 작은 연못위에 부용정이 있는데, 부용정이란 연못에 피어난 연꽃같은 정자를 의미한다. 지금 전국의 연꽃밭에는 화려한 연꽃들이 피어나 매일 연꽃의 향연을 뽐내고 있다. 연꽃이 피어나면, 그 향기를 쫓아 벌들도 꿀을 따기 위해 몰려든다. 연꽃에서 꿀을 따는 것은 다른 꽃에서 꿀을 따는 것과는 달리, 벌들이 연꽃의 노란 수술 속으로 들어가 뒹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벌들이 뒹굴고 난 연꽃은 수정이 되는데 그려면화려한 연꽃잎은 미련없이 떨어져 버리고, 연방만 남아 씨앗을 여물게 한다. 그런데 연꽃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정되기 전에 이미 연방은 그 모습이 갖추어져 있는 모습이다. 옛 사람들은 연못에 자라는 연잎과 연꽃 그리고 연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의 야산에 있는 조선왕릉 온릉은 조선조 11대 중종의 원비였던 신씨의 능이다. 그런데 단경왕후는 왕비로 재임(?) 한 기간이 조선왕비 가운데 가장 짧은 왕비였다. 그녀는 왕비에서 쫓겨나 나머지 인생을 폐서인으로 한스럽게 살다가 죽었기에 오랫동안 잊혀진 왕비였다가 영조때 그 억울함이 인증되어 왕비로 신원이 복위되었고, 그에 따라 '묘'도 승격되어 '왕비의 능'이 되었다. 단경왕후는 신씨로 당시에는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익창부원군신수근의 딸이다. 그런데 신수근은 단경왕후의 아버지이기도 하였지만, 그의 여동생이 연산군의 왕비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연산군의 포악한 정치에서도 왕비의 오빠로써여러 관직을 두루 섭렵하면서 살았는데, 그의 딸은 당시 연산군의 동생이었던 진성대군(후에 중종)에게 시집보냈었다. 왕가의 외척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지만, 그의 행실은 충신이라기 보다는 간신에 가까왔다. 연산군은 어린시절 아버지인 성종이자신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죽이는데 가담했던 성종 당시의 신하들을 모두 찾아내어 무자비하게 죽이는 갑자사화를 일으켜 살육을 일삼는 아비지옥같은 세월이 계속되고, 또 유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김포에 있는 덕포진은 김포에서초지대교를 향하여 강화로 넘어가기 직전 오른쪽 대명항 방향으로 길을바꾸어 올라가면 만나는김포의 서쪽에 있는 작은 나루터다. 하지만 지금은 나루터는 없고 조선후기 개항기에 최신 대포로 무장한 적(프랑스, 미국)의 군함과 맞서 싸우던 격전지로 포대들이 있던 곳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후조선의 국운이 단절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왔고,군사시설들이오랫동안 묻혀있던 것을 최근 발굴하여 다시 옛모습으로복원한 한양 방어를 위한 최전방 국방유적이다. 덕포진에 본토 해안방어를 위하여 군사시설이 설치된 때는 임진왜란으로 일본의 침략에 죽을 고비를 넘긴 조선조 선조 때로 추정되는데, 그 때는 이곳이 김포가 아닌 강화의 관할구역으로 수군의 본영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경험한 후, 왜군이 다시 처들어 온다면 반드시 서해를 돌아서, 한강을 거슬러 한양으로 올 경우 꼭 지나야할 곳이 강화해협이었기 때문이다.이런 군사적 요충지인 강화해협의 덕포진은 1682년 숙종 8년에 강화부의 주진영으로 승격되어 영종도와 인천 앞바다 그리고멀리 안흥진을 관장하는 큰부대의 였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침략할지 모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생노병사의 길은 숨쉬며 살고 있는 생물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좁게는 생명체 그 중에서도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생노병사를 말 하지만, 넓게는 모든 생명체를 포함할 뿐 아니라 일백수십억년을 이어온 태양계와, 더 나아가서는 우주 자체도 한 생명체가 생노병사하듯 우주 또한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는 것이 현대천문학이 밝혀낸 우주 순환원리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우주에 견주면 너무도 사소한 일들일 뿐인 인간세상에 있어서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조상들이 살아왔던 흔적들이 쌓여서 우리의 역사가 되었다. 그 역사속에는 찬란한 문화를 이루었던 자랑스러운 것들도 많은 반면 역사의 주인공에서 하염없이 추락하여 쇠락한 역사도 무수히 있었다. 오늘 찾은 부인사(符仁寺)는 1,000여년 전한때는 매우 융성했던 절이나, 지금은그 창건 연대도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개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당대에는 최고의 절로불교 성지중에 하나였다. 고려시대에는 문화의 선진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보물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경장(經藏), 부처님의 가르침 중 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단속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는데, 그 창건내력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경덕왕 7년(748) '이순'이 창건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경덕왕 22년(763) '신충'이 지었다는 설이다. 처음 창건기에 나오는 '이순'은 젊은 시절부터 불심이 깊어 부처님을 정성으로받들었는데, 젊은 시절부터 말하기를나이 오십이 되면 출가하여 절을 짓기로 발원하였다. 그러던 그가 50살 되는 해, 현재의 위치에는 이미작은 암자가있었는데, 이곳 암자에들어와 스스로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고, 차츰절을 크게 중창하고 단속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763년 당대의 충신어었던'신충'이 지리산으로 두 친구와 유람을 왔다가스님이 되었는데, 임금은 신충의 능력을아껴그를 중책에 쓰려고두번이나 불렀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신충은 왕의 부름에 답하기를 "신은사문이 되어 임금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 까지 임금의 복을 빌겠습니다"고 하며 나오지를 않자임금은 그제서야 그의출가를허락하였다고 한다. 현재 단속사터의 경내 한 복판에는 절터의동서쪽으로삼층석탑 두기가 남아 있는데, 절터의 본당(극락전 또는 대웅전)이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명산으로 지리산을 빼고 말할 수 없다. 지리산은 그 높이가 1,915m의 천왕봉을 최고봉으로 제석봉 촟대봉 명선봉 반야봉 토끼봉 삼도봉 노고단 등 1,700m를 넘는 봉우리들이 솟아있으나, 설악산과는 달리 바위들이 솟아나 보이지 않고 온통 숲으로 쌓여있어 품이 넓어 누구나 받아줄 것 같은 넉넉함을 느낄 수 있는 산이다. 품이 넓은 지리산에는 그냥 들어가도 얼마든지 살수 있는 어머니 같은 산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지리산은 산의 넓이가 넓어 많은 골짜기가 있으며 곳곳에 한국인의 숨결이 배어있는 산으로, 예부터 신성시 하면서 살아왔다. 그리하여 그 이름도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방장산(方丈山)으로도 불린다. 지리산은 지리적으로는 백두산에서 발원한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등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리다 설악산을 지나 강원도 태백산을 기점으로 남서쪽으로 꺾여서 소백산 월악산 속리산 덕유산을 지나 한국 남쪽의 중간에 높고 넓게 자리하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에 걸쳐 넓게 자리하고 있다. 지리산의 주변으로는 골짜기마다 많은 큰 절들이 있었으며 지금도 큰 절들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지리산의 주변에 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남 창녕에 있는 우포는 한국에 있는 복합용도의 습지다. 우포는 토평천 동쪽에 제방을 쌓아서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경계의 바깥에는 논이 많이 있고, 반대방향으로는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산사이에 흐르던 물이 바로 빠져나가지 않고 넓게 고여있었던 자연호수로, 그 아래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저수지 역할도 한 것이다. 우포는 본래 지금보다 훨씬 큰 늪지였으나, 농경지로 개간하기 위하여 인공으로 제방을 쌓아 그 면적이 많이 줄어들었다. 지금 면적은 2,000,000평방미터에 이르며, 늪의 깊이는 사람이 내려서도 가슴정도로깊지 않지만 물속에는 붕어를 비롯한 민물고기들이 많이 살고 있다. 늪지는 진흙 뻘로 가득하여 언듯보면 더러운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바다의 갯뻘처럼 더러운 물을 받아들여 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우포는 크게 우포늪, 목포늪, 사지포, 쪽지벌 등 4개의 늪으로 나뉘어 있으나, 보통 4개의 늪을 대표로 우포로 불린다. 우포는 지질학적으로 1억 4천만년 전인중생대 경상계 퇴적암과 퇴적암이 뚤고 들어간화강암으로 그 바닥지질이구성되었는데, 늪은 지질학적인 형성층보다 훨씬 뒤인 신생대에 습지로 형성되었다. 이후 빙하기와 간빙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팔공산 주변에는 많은 절들이 있다. 그 가운데 큰 절만 살펴보면 동화사, 부인사, 송림사, 은해사가 있다.팔공산과 접하고 있는 경북의 시군은 경산시, 칠곡군, 영천시, 대구광역시가 있으며,그 산 높이도 해발 1192m에 이른다. 전라도 광주에 명산 부등산이 있다면 경상도 대구에는 명산 팔공산이 있는 것이다. 이 팔공산에 있는 많은 절들 가운데는 고려시대 초조대장경을 새기고봉안했던 부인사가 있는데, 부인사는 몽골의 침략때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초조팔만대장경의 일부는 지금도 일본 교토 남례사(南禮寺)에 남아서 전하고 있다. 조국을 떠난 초조대장경판의수는 1,715판이다. 조국을 떠나 타국에 있지만, 화재를 당하고도 살아남아 있어줌 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고, 제자리를 떠나서 아쉽기도 하다. 오늘은 경상도의 명산 팔공산의 많은 많은 절들 가운데 영천에 있는 은해사를 돌아본다. 은해사의 창건은 신라 헌덕왕 1년(809) 혜철국사가 개창한 절로 처음 이름은 해안사라고 하였다. 이 해안사를 고려원종 5년(1264) 흥진국사가 중창하였다가, 조선 명종 1년(1546) 그 위치를 이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