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임경업장군(1594 ~ 1646)은 조선중기 임진왜란 중에 태어나 조선의 변방을 지키는 장군으로 살다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후 명청 교체기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명나라의 편에 들었다가 결국 청으로 압송되었고, 도중에 또 탈출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돌아왔으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다가 죽은 장군이다. 그는 억울하게 죽었으나, 50여년 뒤 숙종때 죄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복권된 뒤 임금으로부터 충민공(忠民公) 시호를 받았고, 임금으로부터 사액현판을 받는 등 재평가 되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영정만 있던 작은 사당과, 초라한 모습이던 그의 묘가 1981년 전두환정권에서 정화사업이 이루어져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임진왜란 중 태어난 임경업장군은 광해군10(1618)년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갑산에서 복무를 시작으로 1620년 삼수의 소농보권관으로 부임하여 군량과 군기를 잘 갖추는 등, 무장으로 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올랐다. 그 뒤 직위가 올라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인조반정 당시 일등 공신인 김류의 휘하에 있다가 1624년 이괄의 난을 진압하고 돌아와 진무원종공신1등이 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있는 사자빈신사터에는 특이한 조형의 석탑이 있다. 본래는 9층석탑이었으나, 5층 지붕돌 윗부분은 산실되어 불완전한 석탑이지만, 남아있는 부분만으로도 그 독특한 형상과 아름다움은 각별한 대접을 받을만 한 석탑이다. 윗부분이 없어졌지만, 기자가 찾은 날에도 석탑 바로 뒷편 바닥에 한층의 지붕이 뒹구는 것으로 보아, 주변을 발굴조사 한다면 없어진 부분의 석탑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천 사자빈신사는 고려 여덟번째 왕인 현종13년(1022)에 창건한 절이라고, 탑의 기단 앞 부분에 새겨놓아, 그 조성시기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석탑이다. 이런 변형된 석탑은 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에서 벗어나 차츰 새롭고, 다양한 모양의 석탑으로 변형 발전해가는 한국석탑의 변천사를 알게 해주어 매우 소중한 탑이다. 한국의 석탑은 불국사 석가탑을 완전한 형태로 보고, 오랫동안 답습되어오다가, 신라 말 이후 차츰 층수도 5층, 7층, 9층 등 다양하게 발전하여 탑의 조형성도 변하고 기단의 모양도 변화하였다. 그런 가운데 사자빈신사터 석탑의 기단은 특이하게도 석사자를 네 모서리에 배치하여 사자가 지키는 석탑으로 만든 것이다. 이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북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에는 신라시대 후기에 조성된 아담한 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불국사 석가탑과 같은 입체적 비례감과 체감이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춘 석탑이나, 그 규모는 불국사탑의 절반정도다. 이곳에는 신라시대 처음 불교를 전했다고 전하는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신라땅에 몰래 들어와 포교하던 중 신라 눌지왕 19년(435)때 부처님을 꿈속에서 만난 뒤 절을 창건하였다. 그리고 그 절이름을 향산사라 하였다. 그러나 묵호자가 불교를 신라땅에 전하였으나 당시에는 생소하고 이상한 이교로 신라왕실로부터 탄압받아 정식으로 포교도 하지 못하였다. 그뒤 묵호자가 입적한 뒤 불교가 공인되고, 그의 뜻을 이어받은 후대의 스님들이 이곳에 절을 세우고 탑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어떤 연유로 모셔온 것인지 몰라도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였다. 당시 탑이란 법당의 앞을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품이 아니라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를 모시기 위한 최고의 조형물이었다. 향산사는 그런 유래를 간직한 신라시대 창건된 고찰로 창건이래 800년 이상을 유지한 뒤 조선시대 최대 국난인 임진왜란때 전란의 와중에 전각은 모두 불타버렸고, 이 삼층석탑만이 외롭게 남겨졌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조선부터 한민족의 고대역사가 살아있고 전란이 있을 때마다 최고의 요새중에 하나였던 강화도에는 해안가 돌출한 곳이면 빠짐없이 탐망을 위한 관측소와, 적의 침입에 대비한 작은 성들이 많이 있다. 강화도의 섬 주변에는 현재 48개의 작은 성인 돈대들이 확인되었는데, 돈대는 전체 둘레가 100m 안팎으로, 그 형태는 원형 각형 등 지형에 따라 다양한 소규모의 방어시설로 한국에서는 강화도를 빼면 찾아보기 어렵다. 강화도의 돈대는 주로 병자호란 이후인 숙종 때(숙종 4~5년인 1678~1679) 세워졌다. 이때 한양의 중앙군과 전국의 지방군을 총동원하여 강화도 해안가 지나가는 배들이 잘보이는 전망이 좋은 요충지에 국방을 위한 요새로 만들었다. 이렇게 세워진 48개의 돈대는 개화기에는 프랑스군 참략시 병인양요, 미군의 침략시 신미양요, 일본의 침략시 운양호 사건때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으며, 전투에 참가했던 많은 조선군들이 순국하였으나, 일본에 굴복한 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난 뒤 하나 둘 무너지고 훼손 되어갔다. 그런 돈대들이 최근에 다시 그 역사적 중요성을 알게되어 발굴조사를 한 뒤 하나 둘 복원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돈대의 성벽은 한국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용문사 창건은 913년 신라 신덕왕 2년으로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신라말 경순왕이 행차하여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모두 900년 대 초로, 용문사가 창건된지1,000년이 넘었다는 것은 일치한다. 용문사의 창건이 1,000년이 넘는다는 것도 고찰로서의 면모를 자랑할 만 한 일이지만, 양평 용문사는 그보다는절 안에 1,200년을 넘어보이는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이 은행나무는 높이가 42.5m, 사람의 가슴높이에서의 나무의 둘레가 14m에 이르며,나무가지의 지름이 동서 28m,남북이 28m에 이르는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누가 심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무의 추정나이로 볼 때 1,200년이 넘어 보임으로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심었다는 설과,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슬픈마음을 안고금강산으로 들어가다가 자신의 지팡이를 꽂고 간 것이 자랐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 은행나무는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조선 세종때 신비한 나무로 당상관 벼슬을 받았다. 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깊어가는 가을 강원도 태백산에있는 적멸보궁 정암사를 찾았다. 깊고 깊은 산속에 있는 곳으로,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평생에 한 번 가기도 어려웠을 만큼 첩첩산중에 있는 절이다. 첩첩산중임에도 이곳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보물탑이 있어, 한국의 5대 적멸보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적멸보궁이란 2,563년 전 입멸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큰 장작불 위에서 화장한 뒤 나온 많은진신사리 중 우여곡절 끝에 그일부를 모셔와 이곳에 탑을 세운곳이라는 뜻으로, 불교에서는 돌아가신 부처님은 볼 수 없지만, 그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가 있는곳은 실제 석가모니불의 일부를 간직한 것으로 여겨 그 어느 불상과도견줄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으로 여긴다. 이런 귀중한 부처님의 진신사리이기에 불자들은 그 진신사리를 평생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2,600년 전에 살았던 부처님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광으로 여기고 있으며, 그 부처님을 보는 것은 평생의 영광으로 무엇이든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어떤 소망도다 이를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에 대한 경외심은 이와 같은 것으로 진신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조 중기 임진왜란 때는 전국토가 유린되고 양국의 병사들이 각각 15만명씩 죽어갔고, 그 외 조선에서는 수십만명의 백성들이 죽어가는 최악의 국난시기였다. 이러한 억불과 국난속에서도 깨달음과 자비를 삶의 목표로 삼아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자 했던 스님이 있다. 바로 사명대사 유정 대사다.불교탄압 시대에왕실과 조정에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일본의무도한 침략에 당당히 맞서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승군을 이끌었던 사명당 유정스님은 전쟁의 마지막 시기에는 국왕의 특사로외교에도 당당히 나섰다. 사명당 유정스님은 전쟁이 끝난 뒤 일본과의 강화조약에 일본의 담판상대로아무도 나서지 않으려는 당시 상황에서 조선의 임금을대신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일본인들의 모질고 다양한 시험을 보살승의 행적으로 다 이겨내고 오히려일본인들의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사명당 유정스님은 강화조약이 마무리 된 뒤일본 곳곳에붙잡혀 갔던 전쟁포로들 1391명을 구해오고약탈해간 많은 문화재도 함께 가지고 돌아왔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의 정승 판서들은 임금의 강력한 요구에도 아무도 강화에 앞장서일본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치열했던 한국전쟁의 포탄 속에서 한때 사라졌다가 기사회생한철원 도피안사. 하지만 도피안사의 역사는 매우 깊다.도피안사는 신라 후기경문왕5년(865) 한국 풍수지리학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도선국사는 당시 일천여명의 신도들과 함께 절을 창건하고 삼층석탑을 세우고,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을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로 조성한 철불로모셨다. 도피안사사적기에 따르면 도선국사는 애초에는 철조비로자나불을 조성하여 철원 안양사에 모시려고 하였다. 그런데 철불을안양사로운반 도중 갑자기 철조비로자나불이 어디론가사라져버렸다. 스님은 황망한 가운데근처를 수소문하였더니 사라졌던 철조비로자나불이이곳에 앉아있었다. 부처님이 스스로 찾아온 것으로 여기고이곳에 절을 창건하여 철조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도피안사라고 이름지었다. 도선국사는 당시 신라땅 전국의 중요한 지역에 부처님의 힘을 빌어나라를 지키는 비보사찰로 절들을 창건하였는데, 이곳 도피안사도 그 가운데 하나로 정하였다. 도피안사가 있는 산은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화개산으로절은 물 위에 떠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 때문에 절의 경내는 석탑과 철불을 모신 대적광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더운 여름이 가고 며칠 전 가을을재촉하는 비가 내렸다.또 때를 맞추어북쪽에서 차가운 공기가 내려오자 대지는 급격히 식어 아침 저녁 기온차에 따라 물에서 증발하는 수증기가 공기속에서 작은 물방울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강가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요즈음 봄 가을 물안개가 장관인 양평군 두물머리는 이를 보기 위해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두물머리에는 작은 섬이 있고, 그 섬에는 말라 죽은 고목나무와 가마우치가 잘 어우러져 신비감이 있는 태고적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이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사진가들의 열정또한 또 다른 장관이었다. 안개가 영원하지 않아 그 순간이 더욱 아름답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순간속에서 영원을 꿈꾸듯 그 순간을 아름답게 노랫말로 풀어내고 있다. 두물머리의 안개낀 풍경과 딱 어울리는 우리가요의 명곡을 음미해 본다. 사랑을 위하여 -김종환 우우우~ 우우우~ 우우우~ 우우우~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물안개 피는 강가에 서서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리 하루를 살아도 행복 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여도 우리 둘은 변하지 않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백제 후기 미륵사가 있엇던 전북 익산시에는 백제말 옛 왕궁이 있었던 곳이 있다. 하지만 얼마전 까지만 해도, 왕궁으로 불릴만한 곳이 없어서, 왕궁리의 지명자체가 매우 의아하다고 생각되었다. 왕궁터는 없는데 그 이름이 왕궁리이고 보니, 누구나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왕궁리에는 백제시대 양식의 전통이 살아있는 오층탑이 있었다. 절도 없는 곳에 탑만이 남아있어 이 또한 의아스러운 탑이었다. 탑이란 본래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들었던 것으로, 탑이 있다는 것은 곧 절이 있었다는 것을 뜻하고, 절이 있다는 것은 부처님을 모신 큰집이 있고, 그 앞에 부처님을 모시듯 탑을 세웠던 것인데, 왕궁리오층석탑은 조선시대를 지나 일제강점기에 이르기 까지 큰 손상없이 서있었던 이오층석탑은역사의 풍파를 견디며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있었던 절의 이름도 잊어버려 그냥 마을의 이름을 따 왕궁리오층석탑으로 불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왕궁리에 왕궁은 찾을 수 없어서, 많은 역사학자, 고고학자들은 궁금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기울어가던 왕궁리오층석탑을 1965년 해체복원하여 다시 세우고, 1998년에는 오층석탑의 주변을 깊이 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