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대비가 내린 뒤 불암산 꼭대기는구름에 휘감기고, ▲ 내린 비는 다시 구름이 되어 ▲ 안개비에 촉촉히 젖어든 석천암 암자 ▲ 그 암자에 오르는 조붓한 산길은 폭포수되어 흐르네. [한국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 장마철이 끝날 때까지 고대하던 단비가 안내려 폭염에 시들어가던 산천초목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끝에단비가 내렸다. 오랫만에 내리는 단비를 맞고 숲의 나무와 풀들은 생기를 되찾았다.갑자기 내린 비에 계곡 산책로는 폭포수가 되어 보기 드문 장관을 연출하였다. 단비를 맞아 들판의 곡식들도 이제 알곡을 튼실히 맺고, 바닥을 보이던 전국의 저수지와 강물도 평소처럼 찰랑찰랑 물이 넘실거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그동안 흐르지 않아 썩어가던 강물에서녹조와 싸우던 물고기들도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
사양제에서 본 마이산, 커다란 말의 귀가 쫑긋한 모습 뽀족한 숫마이산 아래 은수사 왼쪽에는 펑퍼짐한 암마이산, 오른쪽에는 뽀족한 숫마이산 숫마이산 아래 은수사 대웅보전이 있다. 마이산을 이루는 역암들. 강가의 돌맹이들로 물에 닳고 닳아서 동글동글한 모양인데, 이 돌들이 수백미터가 쌓였으니 그 세월이 얼마인지.... 또 그 쌓인 돌들이 위에 쌓인 흙과 돌들에 압력을 받아서 콘크리트가 굳듯이 굳어서 된 것이 마이산이다. 돌맹이들 사이에 흙이 채워져 쌓인 역암. 콘크리트가 굳은 듯 보인다. 솟아오른 암마이산의 절벽 위에는 군데 군데 바윗돌이 흘러내려 감실(부처나 보살을 모시기 위해 파서 만든 굴)을 이루고 있고, 그 감실 안에는 돌탑들을 쌓았다. 깎아지른 암마이산의 절벽과 그 아래 탑사 경내. 탐방객이 보인다. 암마이산 절벽 위 중간에 턱진 곳에는 부처님을 모셨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덕유산이 위치한 진안고원에는 그 형상도 특이한 마이산이 있다. 마이산은 멀리서 보면 말의 두귀처럼 쫑긋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거친 돌맹이들이 가득한 역암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지형으로 보인다
성안 산책로 국청사 출입문 천불전 측면 대웅전 천불전 삼성각 대웅전과 천불전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세계유산이 된 남한산성에는 여러 사찰이 있다. 남한산성의 사찰은 조선 중기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가 임진왜란 같은 병란을 당할 경우 지방군들이 한양으로 올 때까지 머물 수 있는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한양 도성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 산성을 쌓은 것이다. 그런데 남한산성에 사찰이 여럿 있는 이유는 유교를 국시로 하던 조선조 조정에서 불교를 용인해서가 아니다. 유교국가였던 조선시대에는, 관청의승인을 받지 않고 승려가 된다는 것 자체가 범법자가 되던 시대이기에 산성을 축조하고 그 안에 절을 지을 수 있게 했다는 것도매우 이색적으로 느껴지지만, 이는 조선조정이 이탈한 백성들이승려가 되는 것을 막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잡아다가 옥살이를 시키는 대신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즉, 절과 사찰의 승려를 이용하여조정에서는 별도의 돈과 인력을 들이지 않고 산성을 축조하고보수하고지킬수 있는 자원으로 사찰의 승려들을 활용하였고, 승려들은 조정의 정식승인은 받지 않았지만 묵인하에 스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조 정식으로 승려가 되려면 국가에서
서울역 광장에 서 있는 강우규지사 동상 도포자락 휘날리며 폭탄을 들고 있는 모습 굳은 의지가 강하게 표현된 지사의 얼굴 모습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지나간 아픈시절 우리의 선인들은 나라도 없는 서러운 시절을 살아왔다. 나라가 있어도 살기 어렵다 아우성치는요즈음이지만, 그런 나라마저 일본에 빼앗긴 채 자신의 삶은 오직 자신만이 지킬 수 있었던 뼈저린 시절이 바로 100여년 전의 현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까마득한 옛날 일로 생각하지만, 그 시절은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직접 겪으면서 살았던 시대이고, 이제 마지막 노년을 살고 계시는 분들이 바로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시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그 시대를 살아오시면서 모진 고초를 그저 인내심 하나만으로 살아왔고, 그것이 자랑할 만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 시절을 살면서 갖은 수모와 고초를 참고 목숨을 부지하면서 그 고초를 가한 이들에 대하여 한을 품으면서도스스로 참회하고 반성하기를 바라며 살아왔다. 그 중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침략국의 군화발에 짓밟히는 치욕을 당하고 그 사실을 숨긴 채 한많은 세월을 살다가, 그것은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일본이라는 나라의 잘못이라고 세계를
1년 하고도 2개월이 지났지만 끝낼 수 없는 세월호 침몰사건... 세상에 태어나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인간꽃들.. 침몰사고의 원인을 밝히자고 제정한 특별법이 제대로 발휘되려면 시행령이 제대로 되어야 한다고 절규하는 사람들... 조사 받을 사람이 조사위원이 되겠다는 시행령으로는 원인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안된다는 반박문. 현행 시행령으로는 피의자가 될 사람이 검사가 되어서 수사하겠다는의도라고 주장. 세월호를 상징하는 길이 20여 미터의 돗단배를 끌고 오는 삼보일배단이 광화문 광장으로 힘들게접근하고 있다. 혼자 하기는 너무도 머나먼 길.... 그러나 함께해 준 이들이 있어 가능했던 길... 광화문 광장으로 접근하고 있다. 돛단배에 쓰여진 반면교사란 노란 돛이 눈에 띈다. 마지막 날 광화문 광장에서 마지막 100배를 하는 참가자들...너무도 힘들고 고단했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사고의 원인이 밝혀지길 간절히 기원하며, 먼저 간 이들에게는 백배사죄 한다는 의미로절을 올리고 있다. 백배를 하는 이유는 피어보지 못하고 떠난이들에게 살아남은 자로서 원인을 꼭 밝혀주겠다는 다짐이자, 아직도 밝히지 못함에 대한 사죄의 뜻이라고 한다.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각, 카메라를 조준하고 있는사람들 [한국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평 양수리 두물머리에는 물 속에 물고기를 사냥하는 민물가마우지가 살고있는 섬을 배경으로 황홀한일출을 기대하며 나온 사람들로 주말이면 붐빈다. 여름철이면 해가 뜨는 시간도 빨라 서울근처에서는 새벽 4시면 눈비비고 집에서 나와야 한다. 이날 모두들 대어(걸출한 사진)를 낚았을까?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
▲ 수확을 기다리는 보리밭 ▲ 익어가는 보리들 ▲ 토실토실 잘 익은 보리 ▲ 아직 며칠은 더 익어야할 보리 ▲ 깜부기 병에 걸린 보리 [한국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 지난해 가을에 뿌린 보리가 초봄에 싹이 터서 이제는 다 익었다. 대부분의 보리밭은 이미 추수가 끝이 나고, 보리를 심었던 들녘에는 벼로 모내기를 한 곳도 많다. 그러나 예전처럼 땅을 쉬지 않고 놀리던 시대는 지나고, 이제는 보리를 심었던 곳에 벼를 심어 쌀을 한톨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투쟁하듯 농사를 짓지는 않는다. 땅도 좀 쉬어가면서 작물을 길러내고, 사람도 쉬어가면서 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리를 심었던 밭에 수확이 끝나면 벼대신 야채를 심는 경우가 더 많게 되었다. 노랗게 물들어가는 보리밭에도 부분적으로는 익어가는 시기는 다르다, 같은 날 심었지만 싹이 트는 시기가 하루이틀 다르고, 또 같은 밭이지만 물공급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어떤 보리는 이미 다 익어 노랗기 그지 없고, 어떤 보리는 아직 며칠은 더 익어야할 처지이다. 또 같은 밭에서 자라고 있지만, 어떤 보리는 깜부기 병에 걸려서 수확도 못하고, 병원체만 다른 보리에 전해줄 처지이기도 하다. 똑같은 세상을
▲ 국회의원회관 제2회의실 반도사관으로 사라진 고대사를 되찾겠다는 뜻으로 모인 사람들,비록 성대하지는 못했지만 국회의원회관에서 이런 행사가 열린 것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 국회의원(임내현)의 축사,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단재 신채호선생의 뜻을 받들겠다며 이번 모임을 기점으로 전폭적인 협조를 하겠다고 했다. ▲ 회의장에 모인 청중들 ▲ 발제자의 의견에 열중하고 있는 청중들 ▲ 포럼에 참석한 발제자들, 좌로부터 김정권 박정진 김기옥 성헌식 ▲ 동북아역사포럼 김기옥 회장과 문화인류학자 박정진 박사 ▲ 중국 역사책을 뒤져서 찾아낸 요하의 변천을 설명하는 성헌식 고구려역사보전회 학술위원장 [한국문화신문=최 우 성 기자] 지난 6월8일 월요일 국회의원회관 회의실에서는아주 뜻깊은 발표회가있었다. 황주홍의원 주최로열린 이날의 주제는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반도사관'에 대한 열띤 토론과 연구 발표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흔히 한민족의 역사는 유구하여 그 역사가 반만년이 된다고 자랑한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에 서술된 역사는 불과 2000년도 안된다. 그리고 그 이상은 모두 신화라고 가르치고 있다. 조금 생각있는 사
▲ 소악루 전경-1 ▲ 소악루 전경-2 ▲ 소악루 전경-3 ▲ 소악루 전경-4 ▲ 소악루에서 본 강변 ▲ 난지도가 보이는 풍경 제2성산대로도 보인다. ▲ 북쪽의 안산 ▲ 방화대교 ▲ 가양대교 [한국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 영조 때 동북현감을 역임했던 이유 (1645-1721)가양천관아의 뒷산인 현재 강서구 궁산공원 북측에 지었던 정자로 중국 동정호를 연상하며 동정호에 우뚝선 악양루를 재현하여 지었던 악양루가 사라진 뒤 또다시 재현한것이 오늘의 소악루다. 처음에 악양루를 지었을 당시에도 누각에 오르면 넓은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한강의 북쪽에는안산, 인왕산, 남산, 관악산 등이 보였고, 한강줄기로 유유히 오르내리는 각종 물자를 실어 나르는 배들도 잘 볼 수있는 곳으로, 해발고도는 높지 않지만 전망은 무척 좋았던 곳으로 작지만 200여 미터둘레의 성곽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대 진경산수화를 그렸던 겸재 정선도 잠시나마이곳의 현감으로 있을 때 자주 올랐고,그가 직접 보았던 한강풍경들을 그림으로 그려서 남겼다. 그 그림을 경교명승첩이라 하여 지금도 전하고 있다. 현재의 소악루는 본래 있던 궁산 악양루의 위치는 아니지만궁산에 있었
현충사 정문, 이 문을 들어서면 충무공 기념관과 현충사 그리고 충무공의 옛집 등이 있다. 현충사로 오르는 진입로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삼문으로 오르는 계단 1 삼문으로 오르는 계단 2 본전 앞 솟을 삼문(충의문) 현충사 본전과 앞 마당 솟을 삼문에서 본 현충사 본전 충무공 영정 ▲ 현충사 본전에서 본 아산뜰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어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신 영령들을 추모하는 현충일이었다. 해마다 6월 6일이면 국립묘지를 찾아 헌화와 향을 사르며 가신님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국립묘지에 모셔진 이들은 주로 1950년 한국전쟁과 독립운동에 희생한 분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400여년 전 임진왜란을 맞아탁월한 지도력과 전술로 일본해군을 꼼짝못하게 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은공 또한잊을 수는 없는 날이다. 살아 생전에는선조임금으로 부터 제대로된 대접도 받지 못하다가 세월이 흐른 뒤에 그의 공이 빛나고 있지만,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조국을 위해산화한 선열들의 넋과 함께 충무공의 나라사랑 정신도 잊지 않고추모의 예를 잊지 갖추는 우리들이었으면 한다.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영웅으로 길이 빛날 성웅 충무공을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