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산 미륵사석탑을 모형으로 제작한 석가탄신일 기념탑.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음력 4월 8일이 다가온다. 보통 초파일이라고 부르는 이날은, 옛 선조들이 음력을 생활력으로 썼기 때문에 그 전통을 이어받아 지금도 음력 4월 8일을 부르는 부처님의 생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성립된 것은 2639년 인도에서 태어난 석가모니가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스스로 부처가 되었다고 선언하면서부터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한낫 하잘것 없는미물이 아니고 본래 부처인데, 깨닫지 못하고 있어 중생이지만깨닫고 보면 모두가 부처라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하찮은 존재로 여기지 말고 어서 깨달아 부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깨달은 바를 살아생전 45년간 인도의 이곳 저곳을 떠돌면서전법활동을 하다가 80세 되는 때 사라쌍수 아래에서 옆으로 누워서열반하였다. 그러자 수많은 제자들과 백성들은 너무도 아쉬워하며 애통해 하였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걷우려 하자 제자들은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자 석가모니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마지막 교훈을 남겼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스스로 등불처럼 밝게 산다면,세상이 밝게 빛날 것이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592년 일본이 중국을 정벌하고 자신들도 황제국이 되겠다고 침략전쟁에 나서자, 대명가도의 전장이 되된조선은 아비지옥이 되어 그동안 수천 수만년가꾸어오던 역사유적은 돌로 된 것을 빼고는 대부분 불속에 연기로 사라지고, 백성 또한 인구의 절반이넘는 수백만명이죽어 없어졌다. 그런 고통을 당하고서도 조선이란 나라가 망하지 않고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다를 철저히지킨 이순신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장군은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으나, 그 공로를 인정 받은 것은 그로부터 200년도 더 지난 후에야 당시 임금인 숙종으로부터 였다. 숙종은 이순신장군의 생가에 현충사를 건립하고 사당을지어 그의 공적을 공인하였다. 그리고 현충사라는 편액을 내렸다. 이로써 충무공은 한민족의 영원한 성웅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선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시절이 되자 한 때 퇴락의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도 1932년 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당시 동아일보가 성금을 모금하여 현충사를 중건정비하였다. 이후 해방된 뒤에 혼란기를 거쳐 1967년에 경
▲ 경회루 뒷편의 나무들 가운데 홍단풍(노무라 단풍) ▲ 근정전 뒷편에 심어진 홍단풍(노무라 단풍) [한국문화신문= 최우성 기자]경복궁이 처음 세워진 것은 조선이 건국되고 곧바로 국가의 권위를 나타낼 수 있는 궁궐을지었다. 그 때는 1395년으로 조선을 세운 것이 1392년이니 겨우 3년 후에 경복궁을 낙성한 것이다. 그만큼 온 나라가 경복궁을 짓는데 힘을 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경복궁은 북악을 배경으로 남쪽에는 목멱산인 남산을 바라보며정남으로 펼쳐진 한양도성의 북쪽에 자리한다. 남쪽에는 한양도성의 남문인 숭례문을 통과하여 곧바로 광화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지금의신세계백화점과 한국은행으로 우회하여 서울시청 앞에서야 비로서 광화문을 바라보며 경복궁을 바로 볼 수 있게 하였고, 여기부터 옛날 육조거리가 조성되었었다. 그만큼 경복궁은 누구나 쉽게 바라볼 수도 없는 위엄을 가지도록 설계한 것이다. 그런 경복궁이 일본의 침략전쟁인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되어있었으나, 막대한 자금을 댈 수가 없어 다시 중건할 계획도 세우지 못한채 250년을 주춧돌만 나뒹굴게 두었다가, 다시 중건할 계획을 세운 것은 흥선대원군이 나라와 왕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서
▲ 조선 경복궁 궁궐 수비대 ▲ 경호중인 수비대 ▲ 수비대 병사들이 청군 홍군으로 나뉘어 겨루기하는 모습 ▲ 겨루기 진행중 실제 무기로 창과 칼 언월도들이 난무한다. ▲ 겨루기에 열중하는 병사들 보는 관객은 즐겁지만 무척 긴박감이 넘쳤다. ▲ 사열한 병사들 청 홍군이 도열한 모습 ▲ 시범 겨루기를 관람한 어가행렬이 궁궐로 들어가려 나서는 모습 ▲ 흥례문을 들어서는 어가행렬 앞으로 경호부대가 앞장섰다. ▲ 흥례문에서 근정문으로 ▲ 근정문을 들어서는 어가 ▲ 근정전으로 들어선 어가 [한국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경복궁 흥례문과 광화문 사이 광장에서 펼쳐진 조선궁궐수비대 무사들이 청군과 홍군으로 나뉘어 무술 겨루기를 재연하였다. 임금 앞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자신들의 무술실력을 마음껏 펼쳤다. 그러나 상대 또한 갈고 닦은 실력이 만만치 않아 승부가 쉽게 나지를 않았고, 이에 보는 관객들은 창과칼이 부딛쳐 날카로운 소리가 나고 기합소리가 날때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운 날씨에 수비병의 옷을 갖추어 입고 무술겨루기에 비지땀을 흘리는 모습에 수많은 관객들은 즐거웠다. 화려한 조선시대 복장 또한 어디에 내놓아도 멋지고 자
▲ 보타전: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 ▲ 보타락에서 본 보타전 ▲ 보타전과 보타전 앞의 누각 보타락의 반영 ▲ 보타전의 야경-1 ▲ 보타전의 야경-2 ▲ 보타전의 관세음보살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낙산사는 관세음보살들이 많이 있다. 관세음보살이면 같은 관세음보살이지 관세음보살이 여럿 있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이 여럿인 이유는 중생들이 하도많이 그리고 다양하게 원하는 바가 많기 때문이다. 낙산사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원통보전, 보타전, 그리고 홍련암이 있는데, 그 중에 오늘은 보타전과 보타전에 모셔진 관세음보살을 올려본다. 보타전은 낙산사에서는 가장 큰 전각으로관세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이되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중앙에 배치하고, 주변에는 마두관음, 용두관음, 준제관음, 불굥견색관음, 성관음, 십일면관음, 여의륜관음등이 조성되어있고, 주변으로는 관세음보살을 돕는 수많은 신들과 왕들이 가득하다. 곧관세음보살은 하나이지만 그 나타나는 형상은 여러가지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데, 그 여러가지 형상을 조각상으로 만들다 보니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다.
[한국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삼국 가운데 신라가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서력기원 후 528년 이차돈의 순교부터이다. 불교 수용 후 신라는 적극적으로 불교를 국민통합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 수용기간은짧았지만귀족과 왕족출신들이 당시 선진국인 당나라로 불교를 공부하기 위하여 앞다투어 유학을 떠났다. 의상도 그런 유학생 중의 하나였다. 당시 화엄학이 유행하여 화엄종을 정립시키던 시절 당대 최고의 화엄종 2대 종주였던 지엄스님의 제자가 되어 의상은 화엄종을 정립시키는데 공헌하고, 스승의 인가를 받은 뒤, 화엄종을 신라로 가져오기로 마음 먹었다. 의상은 화엄학을 통하여 당시 통일기 3국의 혈전으로 수많은 중생들이 전쟁의 희생자가 되었고, 죽은 백성들과 부상당한 백성들로 가득하여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중 당나라는 한민족의 삼국땅(고구려, 백제, 신라)모두를 병합하려 하였고, 이를 알게된 의상은 서둘러 신라로 귀환하여 그 사실을 신라왕실에 전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명처에 화엄종의 사찰들을 세워나갔다. 의상은 낙산사 의상대에서 정성 들여 기도하던 중 홍련암이 세워진 바위 틈에서 관세음보살을 만나, 이곳에 홍련암
▲ 천수천안(손도 천개 눈도 천개)인 관세음보살, 구례 천은사 ▲ 중생의 소원을 들어줄 물건들(뒷쪽 광배 또한 무수한 손바닥으로 가득하다.) ▲ 중생의 소원을 들어줄 물건들 ▲ 보관에는 아미타불을 포함한 부처님 얼굴들이 11면,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해마다 봄이 무르익어 가면 산과 들에 꽃들이 피어나고 잎은 푸르름에 자연이 아름다우니 마음 또한 넉넉해지는 봄이면 가까이 절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연등이 걸린다. 연등이 걸리는 이유는 석가모니의 탄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불교도들의 행사이나, 불교가 한국에 들어온지 2000년이 다 되어가니, 불교는 그 이전한민족이 가지고 있던 사상과 융화하여 전통문화와 민속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하여 사찰에 가면 인도와 중국의 불교외에도 한국에만 있는 신앙의 대상들도 있어 불교와 민속의 융화된 모습을 볼수 있다. 서로 배타적으로 생각하여 몰아내지 않고 서로 인정하되 새로운 질서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불교는 서역인도의 불교가 북방 사막지방을 거쳐 중국에서 중국의 토속신앙과도 습합하여대승불교로 정착한 모습인데, 한국에서 보는각양각색의 불상과 보살상은 거의 모두가 중국의 당나라 시기에 이루어진 조각상영
▲ 당사 정면 ▲ 당사 전경 ▲ 당사 현관 포치 ▲ 당사 뒷면 ▲ 당사 측사면 전경 ▲ 당사 계단 ▲ 당사 현관과 계단 ▲ 깨어진 계단 ▲ 진달래 꽃 피어난 언덕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민족의 수난사를 간직한 격전지 철원의 노동당사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46년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바로 다음 해 위도 38도로 남북이 갈리고, 소련이 진주한 가운데 지어진 근대건축물이다. 건물은 평면과 입면이 좌우 대칭에 언덕위에 세워진 3층건물로 소련식 근대건축물로 구조체는 철근콘크리트로 기둥과 바닥을 만들고, 내부 방의 칸막이와 외벽에는 벽돌로 하였다. 건물 중앙에 처마가 있는현관을 들어서면 넓은 홀이 있고 홀에서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좌우로 복도가 있어 가장 효율적인 공간 활용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포탄과 총알을 맞아 벽과 지붕은 날아간 곳이 많고, 거의폐가가 되어 방치된채곧 쓰러질 듯 위태로운 상태였으나, 민족의 수난사를 증거할 유일한 건물로 인정되어, 2002년 등록문화재 22호로 등록되었다. 당시 치열한 전쟁통에 살았던 사람들은 저 노동당사가 쳐다보기도 싫고, 빨리 사라져 없어지길 바라기도
▲ 탄금대에서 본 남한강 ▲ 남한강을 건너는 다리 ▲ 탄금대에서 본 남한강 ▲ 탄금대 12대 ▲ 탄금대 12대 위에있는 정자 ▲ 신립장군 위령비각과 극락왕생을 비는 사찰 ▲ 신립장군 위령비각 ▲ 신립장군 위령비 ▲ 8000무명용사들과 신립장군 동상 ▲ 신립장군 동상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주는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는 곳으로, 일찌기 중원으로 불렸다. 이곳에는 탄금대(彈琴臺)가 있는데 가야의 악성(음악의 성인)으로 추앙받던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한편이곳은 비운의 장군 신립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배경으로 하여 임진왜란 초기 왜군과 격전을 치른 곳으로 더 유명하다. 신립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작전계획을 세우고 왜군들을 충주 벌판으로 끌어들여 싸우고자 하였으나, 그의 기마병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여지없이 패하고 말았다. 최고의 정예부대가 패퇴한 뒤 조선의 관군은 파죽지세로 무너지고 선조는 의주까지 밤을 새워 피난하였고, 조선은 이후전 국토가 아비귀환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그 처참했던 임진왜란이 이순신장군의 수군과 승병 그리고 제나라를 지키겠다고
▲ 각황전 앞의 모습 ▲ 각황전 앞 봄풍경 ▲ 각황전 앞 홍매화 ▲ 각황전 앞 벗꽃 ▲ 각황전 앞 석등 ▲ 각황전 앞 석등 ▲ 4사자 탑 ▲ 각황전 현판 ▲ 각황전 전경 ▲ 각황전의 주부처님 석가모니불 [한국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 화엄사 각황전은 한국내 사찰 전각 중에 가장 규모가 큰 전각이다. 현재 국보6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화엄사는 본래 544년 중국을 거처 한국으로 온 인도스님인 연기조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그런 연유로화엄사에는 연기조사를 기리는 4사자 석탑이 각황전의 언덕 위에 모셔져 있고, 연기조사가 어머니를 향하여 공양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연기조사 이후에는 신라 진흥왕 때 중국의 화엄종을 전수한 의상대사가 신라땅에 화엄10찰을 정하여 화엄종을 융성케 하였는데 이때 화엄사는 그 중심사찰이 되었다. 화엄사에는 이후 크게 발전하여 현재의 각황전 자리에는장육전을 짓고 화엄경을 돌판에 새긴 화엄석경을 모셨다고 한다. 화엄사는 말 그대로 화엄경의 불국토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였던 사찰로 이후 도선국사가 크게 중창하였다. 이렇게 융성하던 화엄사는 고려를 거치고 조선조에 이르기까자 사세를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