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도솔래의상 한국사찰의 벽화로 가장 많이 그려지는 주제 가운데 하나로 팔상도가 있다. 팔상도는 석가모니부처님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이세상에 태어나서 출가하여 득도한후 전법활동을 하다가 열반하는 과정을 8장의 그림으로 그려서 표현한 그림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그림은 포천 왕산사의 대웅전 외부에 그려진 벽화이다. 첫째, 도솔래의상이다. 이는 불교의윤회관에 따라, 석가모니가 이세상에 태어나는 것 또한 무의 존재에서 갑자기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생이라는 수많은 윤회가 이미 있었고, 그 윤회의 과정을 거티는 동안출가하여 수도와 공덕을 많이 쌓았다. 그리고이 세상에 오기 전에는 도솔천이라는 천상세계에서 부처가 되기 이전 마지막 한 생을 살고서 세상에 나온다는 윤회관으로부터 시작한다.그런데 이 세상에태어나기 위하여는 아버지를 정반왕으로 어머니를 마야부인하여 태중에잉태하게 되는데이때 마야부인은태몽으로 상서로운 동물인 흰 코끼리를 타고서 많은 시자들을 거느리고 입태하는 꿈을 꾸게 된다. ▲ 비람강생상 둘째 셋째. 비람강생상 구룡토수당이다. 태중에 들어선 석가모니 부처님은, 마야부인이 해산날이 다가오자 친정집으로 가는 도중에 무우수(근심이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지상에서 지하로 빛을 뿌리며 달려오는 열차와 그 열차가 다니는 궤도의 실루엣. 삶의 궤도를 생각해보며 지하역사로 들어오는 열차의 모습을 보았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불기 2559년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였다. 올해는 봉축기념 연등회가 광화문 광장까지 이어지고 어두워진 광장에서는 세계 간화선무차대회라는 다소 생소한 행사까지 이어졌다. 불교의 행사치고는 무척 크고 장대하였으며, 전국에서 온 스님들과 신도들 그리고 외국에서 온 승려 신도들로 광장은 발디딜 틈도 없었다. 그런데 부처님오신날 갑자기 세계간화선무차대회는 뭔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의미를 잠시 생각해보았다.깨달음을 향한 수행자들이 명상을 통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선(禪)이라고 하는데, 이는 평시 사람들은 자신의 관심이 외부로만 쏠려,삼독곧 탐진치(貪嗔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빠져 자신의 진면목을 찾지 못하고 있음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그 관심을자신의 내면으로 돌려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탐진치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에 나아가는 수행방법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선(禪) 중에서도 간화선이라 함은, 자신을 지도해주는스승으로부터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과정에 자신이풀아야 할 숙제인화두를 받아서 그 화두를 붙들고 자나깨나 부단히 수행함으로써 지금까지 자신이 풀지못하던
▲ 새벽 여명의 홍예문 ▲ 갑자기 밀려온 바다안개에 싸인 홍예문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동해 낙산사의 절 입구에는 홍예(무지개)처럼 둥근 문이 있고, 그 위에는 누각이 지어져 있다.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사찰 전체가 연등으로 가득하게 장식되었는데, 홍예문 주변에 갑자기 바다에서 안개가 서늘한 바람과 함께 몰려와 경내를자욱하게 감싸고 있어 더욱 신비감이 돌았다. 중생살이 늘 어렵고 팍팍하다며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낙산사. 마음속에 바라는 바가 다들 다르겠지만 잠시나마 마음을 내려놓고 쉬면서 지난 날을 되돌아보고 앞날에 대한 희망을 품고 돌아가길 바란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
▲ 미시령 옛길에서 본 울산바위 ▲ 차량이 쌩쌩거리며 다니는 새길 ▲ 옛길위에서 본 울산바위와 새길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새봄을 맞이하여 파릇 파릇 새싹이 움이트니 여린 잎새들이 싱그럽기 그지 없다. 동해안으로 백두대간을 넘어가려면 한반도의등줄기 백두대간이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다. 그래서 저 산을 넘기가 옛날에는 참으로 힘들었다.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고개로는 대관령,한계령, 미시령이 있는데, 강릉에서는 대관령양양에서는 한계령, 속초에서는 미시령을 넘어야만 했다. 저 높고 험한 설악산을 넘자면 옛날에는 산에 들짐승도 많고 관가의 세금을 피해서 도망친 사람들로 산에 사는 산적도 많이 있어서 혼자서는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갯길 중간쯤에는 쉬어갈 수 있는 주막이 있어야 했고, 그러고도 10여명 이상이 떼를 지어서 넘어야만 안심하고산짐승도 피하고 산적들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저 험한 설악산을 굽이 굽이 돌아 올랐다가 내려가는 고갯길로 찻길이 생겨서 서울에서 강릉 속초가 쉽게 갈 수 있어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했던 때가 얼마 전인데, 이제는 그것도 멀고, 좁은 길에 교통체증이 심하며 또 눈이라도 내리면 다니기 어렵다
▲ 익산 미륵사석탑을 모형으로 제작한 석가탄신일 기념탑.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음력 4월 8일이 다가온다. 보통 초파일이라고 부르는 이날은, 옛 선조들이 음력을 생활력으로 썼기 때문에 그 전통을 이어받아 지금도 음력 4월 8일을 부르는 부처님의 생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성립된 것은 2639년 인도에서 태어난 석가모니가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스스로 부처가 되었다고 선언하면서부터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한낫 하잘것 없는미물이 아니고 본래 부처인데, 깨닫지 못하고 있어 중생이지만깨닫고 보면 모두가 부처라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하찮은 존재로 여기지 말고 어서 깨달아 부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깨달은 바를 살아생전 45년간 인도의 이곳 저곳을 떠돌면서전법활동을 하다가 80세 되는 때 사라쌍수 아래에서 옆으로 누워서열반하였다. 그러자 수많은 제자들과 백성들은 너무도 아쉬워하며 애통해 하였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걷우려 하자 제자들은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자 석가모니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마지막 교훈을 남겼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스스로 등불처럼 밝게 산다면,세상이 밝게 빛날 것이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592년 일본이 중국을 정벌하고 자신들도 황제국이 되겠다고 침략전쟁에 나서자, 대명가도의 전장이 되된조선은 아비지옥이 되어 그동안 수천 수만년가꾸어오던 역사유적은 돌로 된 것을 빼고는 대부분 불속에 연기로 사라지고, 백성 또한 인구의 절반이넘는 수백만명이죽어 없어졌다. 그런 고통을 당하고서도 조선이란 나라가 망하지 않고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다를 철저히지킨 이순신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장군은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으나, 그 공로를 인정 받은 것은 그로부터 200년도 더 지난 후에야 당시 임금인 숙종으로부터 였다. 숙종은 이순신장군의 생가에 현충사를 건립하고 사당을지어 그의 공적을 공인하였다. 그리고 현충사라는 편액을 내렸다. 이로써 충무공은 한민족의 영원한 성웅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선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시절이 되자 한 때 퇴락의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도 1932년 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당시 동아일보가 성금을 모금하여 현충사를 중건정비하였다. 이후 해방된 뒤에 혼란기를 거쳐 1967년에 경
▲ 경회루 뒷편의 나무들 가운데 홍단풍(노무라 단풍) ▲ 근정전 뒷편에 심어진 홍단풍(노무라 단풍) [한국문화신문= 최우성 기자]경복궁이 처음 세워진 것은 조선이 건국되고 곧바로 국가의 권위를 나타낼 수 있는 궁궐을지었다. 그 때는 1395년으로 조선을 세운 것이 1392년이니 겨우 3년 후에 경복궁을 낙성한 것이다. 그만큼 온 나라가 경복궁을 짓는데 힘을 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경복궁은 북악을 배경으로 남쪽에는 목멱산인 남산을 바라보며정남으로 펼쳐진 한양도성의 북쪽에 자리한다. 남쪽에는 한양도성의 남문인 숭례문을 통과하여 곧바로 광화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지금의신세계백화점과 한국은행으로 우회하여 서울시청 앞에서야 비로서 광화문을 바라보며 경복궁을 바로 볼 수 있게 하였고, 여기부터 옛날 육조거리가 조성되었었다. 그만큼 경복궁은 누구나 쉽게 바라볼 수도 없는 위엄을 가지도록 설계한 것이다. 그런 경복궁이 일본의 침략전쟁인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되어있었으나, 막대한 자금을 댈 수가 없어 다시 중건할 계획도 세우지 못한채 250년을 주춧돌만 나뒹굴게 두었다가, 다시 중건할 계획을 세운 것은 흥선대원군이 나라와 왕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서
▲ 조선 경복궁 궁궐 수비대 ▲ 경호중인 수비대 ▲ 수비대 병사들이 청군 홍군으로 나뉘어 겨루기하는 모습 ▲ 겨루기 진행중 실제 무기로 창과 칼 언월도들이 난무한다. ▲ 겨루기에 열중하는 병사들 보는 관객은 즐겁지만 무척 긴박감이 넘쳤다. ▲ 사열한 병사들 청 홍군이 도열한 모습 ▲ 시범 겨루기를 관람한 어가행렬이 궁궐로 들어가려 나서는 모습 ▲ 흥례문을 들어서는 어가행렬 앞으로 경호부대가 앞장섰다. ▲ 흥례문에서 근정문으로 ▲ 근정문을 들어서는 어가 ▲ 근정전으로 들어선 어가 [한국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경복궁 흥례문과 광화문 사이 광장에서 펼쳐진 조선궁궐수비대 무사들이 청군과 홍군으로 나뉘어 무술 겨루기를 재연하였다. 임금 앞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자신들의 무술실력을 마음껏 펼쳤다. 그러나 상대 또한 갈고 닦은 실력이 만만치 않아 승부가 쉽게 나지를 않았고, 이에 보는 관객들은 창과칼이 부딛쳐 날카로운 소리가 나고 기합소리가 날때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운 날씨에 수비병의 옷을 갖추어 입고 무술겨루기에 비지땀을 흘리는 모습에 수많은 관객들은 즐거웠다. 화려한 조선시대 복장 또한 어디에 내놓아도 멋지고 자
▲ 보타전: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 ▲ 보타락에서 본 보타전 ▲ 보타전과 보타전 앞의 누각 보타락의 반영 ▲ 보타전의 야경-1 ▲ 보타전의 야경-2 ▲ 보타전의 관세음보살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낙산사는 관세음보살들이 많이 있다. 관세음보살이면 같은 관세음보살이지 관세음보살이 여럿 있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이 여럿인 이유는 중생들이 하도많이 그리고 다양하게 원하는 바가 많기 때문이다. 낙산사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원통보전, 보타전, 그리고 홍련암이 있는데, 그 중에 오늘은 보타전과 보타전에 모셔진 관세음보살을 올려본다. 보타전은 낙산사에서는 가장 큰 전각으로관세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이되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중앙에 배치하고, 주변에는 마두관음, 용두관음, 준제관음, 불굥견색관음, 성관음, 십일면관음, 여의륜관음등이 조성되어있고, 주변으로는 관세음보살을 돕는 수많은 신들과 왕들이 가득하다. 곧관세음보살은 하나이지만 그 나타나는 형상은 여러가지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데, 그 여러가지 형상을 조각상으로 만들다 보니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