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삼국 가운데 신라가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서력기원 후 528년 이차돈의 순교부터이다. 불교 수용 후 신라는 적극적으로 불교를 국민통합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 수용기간은짧았지만귀족과 왕족출신들이 당시 선진국인 당나라로 불교를 공부하기 위하여 앞다투어 유학을 떠났다. 의상도 그런 유학생 중의 하나였다. 당시 화엄학이 유행하여 화엄종을 정립시키던 시절 당대 최고의 화엄종 2대 종주였던 지엄스님의 제자가 되어 의상은 화엄종을 정립시키는데 공헌하고, 스승의 인가를 받은 뒤, 화엄종을 신라로 가져오기로 마음 먹었다. 의상은 화엄학을 통하여 당시 통일기 3국의 혈전으로 수많은 중생들이 전쟁의 희생자가 되었고, 죽은 백성들과 부상당한 백성들로 가득하여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중 당나라는 한민족의 삼국땅(고구려, 백제, 신라)모두를 병합하려 하였고, 이를 알게된 의상은 서둘러 신라로 귀환하여 그 사실을 신라왕실에 전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명처에 화엄종의 사찰들을 세워나갔다. 의상은 낙산사 의상대에서 정성 들여 기도하던 중 홍련암이 세워진 바위 틈에서 관세음보살을 만나, 이곳에 홍련암
▲ 천수천안(손도 천개 눈도 천개)인 관세음보살, 구례 천은사 ▲ 중생의 소원을 들어줄 물건들(뒷쪽 광배 또한 무수한 손바닥으로 가득하다.) ▲ 중생의 소원을 들어줄 물건들 ▲ 보관에는 아미타불을 포함한 부처님 얼굴들이 11면,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해마다 봄이 무르익어 가면 산과 들에 꽃들이 피어나고 잎은 푸르름에 자연이 아름다우니 마음 또한 넉넉해지는 봄이면 가까이 절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연등이 걸린다. 연등이 걸리는 이유는 석가모니의 탄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불교도들의 행사이나, 불교가 한국에 들어온지 2000년이 다 되어가니, 불교는 그 이전한민족이 가지고 있던 사상과 융화하여 전통문화와 민속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하여 사찰에 가면 인도와 중국의 불교외에도 한국에만 있는 신앙의 대상들도 있어 불교와 민속의 융화된 모습을 볼수 있다. 서로 배타적으로 생각하여 몰아내지 않고 서로 인정하되 새로운 질서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불교는 서역인도의 불교가 북방 사막지방을 거쳐 중국에서 중국의 토속신앙과도 습합하여대승불교로 정착한 모습인데, 한국에서 보는각양각색의 불상과 보살상은 거의 모두가 중국의 당나라 시기에 이루어진 조각상영
▲ 당사 정면 ▲ 당사 전경 ▲ 당사 현관 포치 ▲ 당사 뒷면 ▲ 당사 측사면 전경 ▲ 당사 계단 ▲ 당사 현관과 계단 ▲ 깨어진 계단 ▲ 진달래 꽃 피어난 언덕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민족의 수난사를 간직한 격전지 철원의 노동당사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46년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바로 다음 해 위도 38도로 남북이 갈리고, 소련이 진주한 가운데 지어진 근대건축물이다. 건물은 평면과 입면이 좌우 대칭에 언덕위에 세워진 3층건물로 소련식 근대건축물로 구조체는 철근콘크리트로 기둥과 바닥을 만들고, 내부 방의 칸막이와 외벽에는 벽돌로 하였다. 건물 중앙에 처마가 있는현관을 들어서면 넓은 홀이 있고 홀에서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좌우로 복도가 있어 가장 효율적인 공간 활용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포탄과 총알을 맞아 벽과 지붕은 날아간 곳이 많고, 거의폐가가 되어 방치된채곧 쓰러질 듯 위태로운 상태였으나, 민족의 수난사를 증거할 유일한 건물로 인정되어, 2002년 등록문화재 22호로 등록되었다. 당시 치열한 전쟁통에 살았던 사람들은 저 노동당사가 쳐다보기도 싫고, 빨리 사라져 없어지길 바라기도
▲ 탄금대에서 본 남한강 ▲ 남한강을 건너는 다리 ▲ 탄금대에서 본 남한강 ▲ 탄금대 12대 ▲ 탄금대 12대 위에있는 정자 ▲ 신립장군 위령비각과 극락왕생을 비는 사찰 ▲ 신립장군 위령비각 ▲ 신립장군 위령비 ▲ 8000무명용사들과 신립장군 동상 ▲ 신립장군 동상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주는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는 곳으로, 일찌기 중원으로 불렸다. 이곳에는 탄금대(彈琴臺)가 있는데 가야의 악성(음악의 성인)으로 추앙받던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한편이곳은 비운의 장군 신립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배경으로 하여 임진왜란 초기 왜군과 격전을 치른 곳으로 더 유명하다. 신립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작전계획을 세우고 왜군들을 충주 벌판으로 끌어들여 싸우고자 하였으나, 그의 기마병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여지없이 패하고 말았다. 최고의 정예부대가 패퇴한 뒤 조선의 관군은 파죽지세로 무너지고 선조는 의주까지 밤을 새워 피난하였고, 조선은 이후전 국토가 아비귀환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그 처참했던 임진왜란이 이순신장군의 수군과 승병 그리고 제나라를 지키겠다고
▲ 각황전 앞의 모습 ▲ 각황전 앞 봄풍경 ▲ 각황전 앞 홍매화 ▲ 각황전 앞 벗꽃 ▲ 각황전 앞 석등 ▲ 각황전 앞 석등 ▲ 4사자 탑 ▲ 각황전 현판 ▲ 각황전 전경 ▲ 각황전의 주부처님 석가모니불 [한국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 화엄사 각황전은 한국내 사찰 전각 중에 가장 규모가 큰 전각이다. 현재 국보6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화엄사는 본래 544년 중국을 거처 한국으로 온 인도스님인 연기조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그런 연유로화엄사에는 연기조사를 기리는 4사자 석탑이 각황전의 언덕 위에 모셔져 있고, 연기조사가 어머니를 향하여 공양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연기조사 이후에는 신라 진흥왕 때 중국의 화엄종을 전수한 의상대사가 신라땅에 화엄10찰을 정하여 화엄종을 융성케 하였는데 이때 화엄사는 그 중심사찰이 되었다. 화엄사에는 이후 크게 발전하여 현재의 각황전 자리에는장육전을 짓고 화엄경을 돌판에 새긴 화엄석경을 모셨다고 한다. 화엄사는 말 그대로 화엄경의 불국토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였던 사찰로 이후 도선국사가 크게 중창하였다. 이렇게 융성하던 화엄사는 고려를 거치고 조선조에 이르기까자 사세를 유
▲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 ▲ 대웅전의 연등 ▲ 대웅전 앞 보제루 연등 ▲ 추녀 밑의 나부 ▲ 대웅보전 측면 ▲ 대웅보전 전경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역사의 고장 강화도. 강화도는 고조선시대 단군의 세아들이 쌓았다는 마니산에삼랑산성이 있다. 또 마니산의 꼭대기에는 참성단이 있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는 선조들이 스스로 하늘의 자손으로 스스로의 존재성을 자부심있게 지키겠다는 다짐이기도 하였다. 우리 스스로 하늘의 자손임을 자각하고 살았던 시대는 고려시대로 끝이나고, 유학이 정치이념이 된조선에 들어서는 충과 효를 강조하면서 스스로 제후국으로 만족하고 살았고, 감히 하늘에 제사라도 지내는 것은 큰나라 중국에 대한불손한 행동으로 알고 살았다. 강화도 마니산 꼭대기에참성단이 있고, 그 아래에는 삼랑산성이 있으며, 삼랑산성의 안에는 전등사가 자리하고 있다. 스스로 하늘의 아들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만큼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며, 그만큼 크고 당당한 행동을 하면서 살기 마련이다.전등사(傳燈寺)란 이름은 진리를 밝히는 등을 전한다는 뜻이다. 이 등은 석가모니 부처가 밝힌 진리의 등불일 것이니 등 중에서 가장 귀한 등으로삼랑성 참성단과도
길목을 지키는 노점아주머니 개나리 진달래가 함께 피어난 길목 호젓한 산길에는 청순한 진달래가 탐스럽게 피어났다. 진달래 처녀들.. 진달래에 감싸인 무덤들 진달래를 찾아 나선 탐방객들 햇볕에 빛나는 진달래 가녀린 그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 [한국문화신문 = 최우 성기자]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아니더라도 우리 겨레는 오랜 세월 진달래 꽃과 벗하며 살았다. 그런 우리 땅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봄이면 벚꽃(사쿠라)놀이로 어지럽다. 여기 우리의 오랜 벗 진달래 동산이 있어 소개한다. 강화도 고려산이 그곳이다.지난 주말에 찾은 진달래꽃 동산은찾는이가 많았지만 아직 조금 이른 시기라, 다음 주가 절정이 될 것 같다. 꽃도 한철이 있던가?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한 번 쯤 가보면 어떨까 싶다. 고려산은 산이 커서 하루 온종일 올라야한다. 산 중턱을 넘어 올라야 장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북에는 영변약산, 남에는 강화 고려산 진달래 동산이 쌍벽이다.견줌은 통일이 되어야 할 수 있겠지만, 이만한 장관 다시 보기 어려운 고려산 진달래, 평생에 한 번은 가보아야 하지 않을까? 진달래 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
운조루 집 앞에서 본 지리산과 논 밭 운조루 전경 집 앞에는 명당수가 흐른다 솟을 대문 앞에 모인 사람들 솟을 대문.龍 虎라고 크게쓴 대문앞 글씨 운조루 사랑채와 마당 사랑채 정면. 앞에는 마당이 있다. 어려운 이웃을 배려한 무인 뒤주. 타인능해 곧 누구든 식량을 가져갈 수 있다는 뜻 안채 안마당과 장독대 안채 뒷뜰과 담장 너머. 안채로 들어가는 쪽문 마을 입구 길에서 보면 나무들이 일차적으로 시선을 차단하고 있다. [한국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지리산을 바라보며 평화롭게 자리잡은 고택 운조루! 운조루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위치한 한국의 몇 안되는 고택이다. 이 집은 임진왜란때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던 충신 서애 유성룡의 후손인 유이주가 1776년인 영조 52년에 상량한 집으로 어언 250년이 되어가는 집이다. 유이주의 본래 고향은 대구였으나, 경상도 지방은 평야가 적고 산이 많아 자신과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가기 좋은 곳이면서도 또 전란의 피해도 없을 만한 곳을 찾아 다니다가 지금의 운조루터를 발견하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그는 이 터를 발견하고 집터를 다듬으며 하늘이 자신을
▲ 진리를 위하여는 목숨도 기꺼이... ▲ 설산동자가 투신하는 모습 ▲ 마귀인 나찰이 기다리는 모습 [한국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 한국의 사찰에는 벽화가 많이 있다.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 절에 가 본 사람은유난히 한국의 사찰 건물 벽이 벽화로 가득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한국 절에는 사찰의주요전각인 대웅전뿐 아니라, 여타 다른 전각들에도 건물의 안과 밖에 그림들이 빼곡하다. 그 그림들은 전각에 모신 부처나 보살과 관계 있는 이야기이고, 부처님이 설법했던 경전의 이야기거나, 부처님의 전생이야기, 중국이나 한국의 고승들의 일화들을 한폭 또는 여러폭의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또 주제는 같은 이야기이지만,사찰마다 벽화를 그린 화사(畵師)에 따라 다양하고 재치있게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그림을 보면, 시대에 따라 유행하던 그림도 느껴볼 수 있다. 벽화 말고도 단청은 한국 절에 필수지만이웃 일본의 절에는 단청도 없고 벽화도 없다. 뿐만아니라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곳도 있고 있다해도 협시불 없이 불상만 달랑 모셔놓은 곳이 있어을씨년스럽끼까지 하다. 한편중국의 절에는 불보살상이 모셔진 전각의 내부에 들어가보면 더러 벽화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네 사찰에서처럼
[한국문화신문=최 우성 기자] 절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알리는데 꼭 필요한 불전 도구로 4물이 있다. 그 4가지 소리를 내는 음향도구는 범종, 법고, 운판, 목어다. 그런데 탁발 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으로 바랑속에 필수품이 목탁이다. 목탁은 본래 목어에서 유래한 것으로,물고기 형태를 간소화하여 만든 것이다. 목탁은아이들 머리통처럼 둥근 통에 손잡이를 달아서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에작은 방망이를두들겨서 소리를 낸다. 목어는 말 그대로 '나무로 만든 물고기'라는 뜻으로 그 원형은 '물고기'에 있다.목어가 만들어진 유래는, 다음과 같다.옛날 중국에 큰 스님으로 유명한스님의 제자로 말썽만 부리고, 공부를 게을리하던 제자가 있었다. 제자는 공부를 게을리하고, 수행도 하지 않아 스승의 애를 태웠다. 그러자스승은 제자를 일깨우기 위하여 잠시 벌을 주어 그 말썽꾸러기 제자를물고기로 변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제자는 스승의 체벌에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처음 보는 물속 세상이 너무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리되자벌을 주어 제자가참회하기를 바랐던 스승은 물고기가 된 제자에게더 큰 벌로 물고기 등에 나무가 자라게 하였다. 그리되자 물고기는 다니기도 어렵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