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가에 해골과 뼈 무더기에 절을 하는 부처님 ▲ 절하는 부처님을 보고 있는 제자(아난)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왼쪽에는 길 모퉁이에한무더기의 해골과 뼈가 뒤섞여있고, 이를 향하여 부처님이 오체투지로 절을 하고 있다. 그 뒤에는 제자(아난존자)가 합장한채 서있는 그림이다. 언듯 보기에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으나, 이그림은 불교의 경전중에 하나인 부모은중경의 처음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부모은중경의 첫장을 펴면 부처님이 제자들과탁발을 나섰다. 그런데 제자들과 길을 가다가, 길가에 모퉁이에모아져 있는 한무더기의 해골과 뼈를 만나게 되었다.그런데 부처님은 하챦게 버려진 그 뼈들을 향하여 정성껏 절을 하는 것이었다. 이를 본 제자 아난은 부처님께서 왜 무덤도 쓰지 못하여버려진천한 삶을 살고간해골들과 뼈들을 향하여,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부처님이 이렇게정성으로 절을 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 연유를 설명하였다. 지금은 저렇게 보잘 것 없이 나뒹굴고 있는 해골무더기 이지만, 저분들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는 먼 옛날이고,그분들은 바로 부처님 자신의 조상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상이 될 수도 있는 저 해골들에 예를 드리
▲ 부처님과 제자가 탁발을 나섰는데 한 아이가 밥공양을 하는 모습. 키가 작은 때문에 다른 아이릐 등에 올라서서 공양을 올리고 있다. ▲ 공양물을 올리는 상세모습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이그림은 한 아이가 길에서친구들과 소꿉장난을 하면서 놀다가 탁발하러 가는 도중의 부처님을 만난다. 아이는 자신이 친구들과 놀면서 지은 모래밥을 정성껏 부처님의 바루에 올리려 한다. 이 그림에 나오는 아이는 부처님을 만난300년 뒤에인도의찬드라굽타가 세운마우리아 왕조의 3번째왕으로 환생하여 인도전국을 통일한 아쇼카왕이다. 이는 아쇼카왕의 일대기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부처님 당시 실제로 한 아이가 부처님께 자신이 소꿉장난하다가 모래밥을 부처님께 공양하게 되었다. 부처님은 그 아이의 정성을 알아보시고 그에게 축복의 수기를 내려주었는데 그 수기는 이생을 다하고 300년뒤 왕국의왕자로 태어나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아쇼카왕의 재위연대는 기원전 265~ 238년. 그런데 까마득히 잊고 300년이 지난 뒤, 실제로 마우리아 왕가의 왕자로 태어난 아쇼카왕은 왕이 되어 수많은정복전쟁을 거쳐서인도를 통일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엄청난 살생이 있었다. 특히 카
▲ 혜능이 행자로 들어와서 절에서 방아를 열심히 찧는 모습 ▲ 홍인선사 법을 전수해줄 것을 암시하는 모습. 지팡이로 3번 탁 탁 탁 쳤다고 한다. ▲ 스승인 홍인선사가 혜능에게 자신이 쓰던 가사와 발우를 전해주는 장면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사찰의 건물 벽화 중에는 재미있는 그림이 많다. 그 중에 오늘은 선종이 교종을 능가하는 위세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던 스님인 혜능선사의 전법에 대한 그림이다. 혜능은 본래 공부를 전혀 하지 못할 형편의 가난한 집 아들이었다. 그는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하였지만 늙으신 어머니를 정성으로 모시면서, 날마다산에서 땔나무를 해서 이를 시장에 내다 팔아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탁발승이 시장에서금강경을 독송하는 독경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신심이 깊은불자였던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집을 떠나 한 절에서무진장스님이 열반경을 독경하는 소리를 듣고 그 뜻을 통하였고, 선종의 종가로황매산에서 달마의 선법을 전수받았던 5조 홍인선사의 법을 전수받고자 그의 문하에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언제 어디나 세상은 격식과 절차가 있는 법이라, 홍인선사의 문하에는 수많은 제자들이 법을 전수받고
▲ '달마'의 법을 전해받고자 하는 '혜가'스님이 자신의 왼팔을 잘라 달마대사의 제자 되기를 원하는 그림 (의정부 원효사 대웅전 벽화)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사찰을 들어가 살펴보면 건물의 벽면에는 수많은 그림들이 빼곡히 그려져있다. 그런데 불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그 그림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하기만 할뿐 그림속의 내용은 모른채 그려진 그림속의 구도와 인물들의 얼굴만 보다가 돌아서기 쉽상이다. 그러나, 절의 건축물에 그려진 그림들은 모두가 불경속의 내용들과 그동안 큰 발자취를 남긴 스님들의 일화를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재미도 있고 의미도 느낄 수 있다. 오늘 올리는 사진은 사찰의 벽화중에 중국에 선종을 전파한 인도에서 온선승달마스님에게 제자가 되고자 찾아왔던 혜가의 일화를 그린 벽화그림이다. 달마스님은옛부터 지금까지가장 인기있는 스님의 모습으로 그 모습도 그리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그려지고, 많은 스님들 법사들이 자신들이 갈고 닦은 화필에 기(氣)를 불어넣어 그린 그림이 큰 힘을 발휘한다고 하여부적처럼많이들 그려주고이를 받은 신도들은 이를 호신용 또는 소원성취를 위하여부적처럼소장하며 발복하기를 기대하고
▲ 불암산 8부능선 바위아래 자리잡은 석천암 ▲ 불암산 산마루 바위에도 봄을 즐기고자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새봄을 맞이하여 따사로운 봄볕이 내리쬐는 서울 근교 불암산 석천암의 모습. 이른 봄맞이를 위하여 화창하게 맑은 날많은 시민들이 불암산에 올랐다. 이제막 생강나무가 노랗게 피어나고,개나리들도 노란 꽃잎을 내밀며피기 시작하였고, 햇볕이 드는 양지쪽에는 진달래가 진한 자주꽃봉우리를 맺고 피어나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새잎은 아직 물이 오르지 않았지만, 한아름 감싸 안아본 나무줄기에서는땅속에서 빨아올린 생명의물을 힘차게 뿜어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김없이 봄이 오는 소리.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
▲ 홍살문 앞에서 본 건원릉 ▲ 홍살문을 들어서서 본 정자각 비각 건원릉의 모습 ▲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한 뒤에 세운 비석, '대한고황제건원릉'라고 쓰여있다. ▲ 정자각에서 본 건원릉 ▲ 건원릉의 능상 정면에서 ▲ 정면에서 본 태조의 릉. 함흥지방의 억새풀이 능상에 수북하다. ▲ 건원릉의 장명등 ▲ 혼유석, 장명등 문인석 석마가 도열한 모습 ▲ 태조의 비서실장 문인석(오른쪽)과 경호실장 무인석 ▲ 고려의 복식이 남아있는 문인석 ▲ 태조의 경호실장(무인석=무석인) ▲ 병풍석에는 세밀한 조각의 인물상이 있다. 보호하고 시중도 드는 듯. ▲ 건원릉 봉분 주변에는 병풍석과 바닥에는 박석, 그리고 박석의 외부에는 난간석이 정연하다. ▲ 건원릉의 석호, 앉아서 주변을 살피고 있다. ▲ 건원릉의 주변 곡장과 석수 석마문인석 무인석 난간석 바닥박석 병풍석이 보인다. ▲ 건원릉의 뒤에서 본 봉분과 주변 석물들, 봉분에는 억새풀이 수북하다. ▲ 조선왕릉의 배치도(건원릉). 각 릉마다 비슷하면서도 약간씩 다르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격동의 고려말 몽골로부터의 간섭에서 벗어나 고려의 부흥을 이끌던 공양왕의
▲ 수릉-효명세자(순조의 아들) 추존 문조의 릉 무인석 ▲ 현릉(5대 문종) 무인석 ▲ 목릉(14대 선조) 무인석 ▲ 목릉(14대 선조의 원비-의인왕후) 무인석 ▲ 목릉(14대 선조의 계비 인현왕후) 무인석 ▲ 건원릉(초대 태조) 무인석 ▲ 휘릉(16대 인조계비 장렬왕후) 무인석 ▲ 원릉(21대 영조 + 정순왕후) 무인석 ▲ 경릉(24대 헌종과 효현왕후+효정왕후) 무인석 ▲ 혜릉(20대 경종과 단의왕후) 무인석 ▲ 숭릉(18대 현종과 명성왕후) 무인석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임금 가장 가까이서 안위를 지키는 영원한 경호실장들. 살아있을 때에도 왕릉에 새겨진 무인석들과 비슷한 모습의 장군들이 옆에서 지켰는지 궁금하다. 시대별 장군들의 투구와 복식도 비교해 보고, 더불어그 얼굴형상을 살펴보면장군들은대부분 다음과같은 특징이 있다. 목이 짧아서 거의 보이지 않으며, 얼굴은 옆으로 퍼지고 네모나고 턱은 각이 졌으며,눈이커 왕방울처럼 튀어나고, 코는 주먹코이며, 불도 오동통하다. 대체로 장군들은 얼굴의 형상으로 볼 때에도 문신들보다는 힘이 넘치게 보이고, 얼굴이 위 아리로 길지 않고 옆으로 퍼진 형상이며, 조상의 계통을
▲ 수릉-효명세자(순조의 아들로 즉위하기전에 세상을 떠남)의 문인석 ▲ 5대 문종 현릉의 문인석. ▲ 14대 선조 목릉의 문인석 ▲ 선조의 원비 인의왕후의 릉 문인석 ▲ 선조의 계비 인현왕후의 릉 문인석 ▲ 태조의 건원릉- 고려시대 복식 모습의 문인석 ▲ 16대 인조의 계비-장렬왕후의 휘릉 문인석 ▲ 21대 영조의 원릉 문인석 ▲ 24대 헌종의 경릉 문인석 ▲ 20대 경종의 혜릉 문인석 ▲ 18대 현종의 숭릉 문인석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의 왕릉 중 가장 많은 임금이 누워있는 동구릉을 돌아보면, 언듯 비슷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다양한 점들을 느껴볼 수 있다. 그러나 문관들인 만큼 그 모습이 선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어쩌면 당시 임금의 비서실장인 도승지의 모습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동구릉에 모셔진 왕과 왕비들의 비서실장들의 모습도 자세히 비교해보면 다양함을 느껴볼 수 있다. 왕릉의 구성도 단릉(1분만 모시거나 합장하여 봉분이 하나인 경우) 쌍릉(1분씩 따로 봉분을 설치한 릉) 또는 3연릉(왕, 왕비1, 왕비2)를 하나의 구역에 설치한 경우 등 봉분도 다양하지만
▲ 수릉-23대 순조의 아들로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왕의 수업을 잘 받았던 효명세자와 그의 비 신정왕후 릉의 장명등 ▲ 현릉-제5대 문종의 릉 ▲ 목릉-14대 선조의 릉 ▲ 목릉 중 선조의 원비 의인왕후의 릉 ▲ 목릉중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의 릉 ▲ 건원릉-제1대 태조의 릉 ▲ 휘릉- 16대 인조와 장렬왕후의 릉 ▲ 원릉-21대 영조와 정순왕후의 릉 ▲ 경릉-24대 헌종과 효현왕후의 릉 ▲ 혜릉-20대 경종의 비인 단의왕후의 릉으로 유일하게 장명등이 없어졌다. ▲ 숭릉-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릉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보호받고 있는 조선왕릉중 가장 많은 왕들이 자리하고 있는 동구릉이다. 조선의 도성 한양을 중심으로 볼 때 동쪽에 9개의 릉이 있다고 하여 동구릉이고, 한양의 서쪽에 5개의 릉이 있다하여 고양시에는 서오릉이 있다. 또 3개가 있는 릉도 있으니 고양시 서3릉과 파주3릉도 그와 같이 이름지어졌으며, 기타 1기 또는 2기가 있으면 릉의 이름을 붙여서 부른다. 동구릉에는 처음 이태조가 자리한 뒤로 하나 둘 시대를 달리하면서 들어서게 되었는데, 조선의 28대 왕들중 가장 많은 임금의 무덤
▲ 일주문에서 본 경릉 일곽 ▲ 정면에서 본 정자각 ▲ 능상과 정자각 그리고 비각 ▲ 앞에서 본 3연릉(좌측: 24대 헌종, 가운데 효현왕후, 우측 효정왕후) ▲ 능의 뒷면에서 본 3연릉의 모습 ▲ 장명등의 화사석 사이로 본 무인석과 석마 ▲ 능상에서 본 정자각 저 멀리는 구리시내가 보인다. ▲ 혼유석의 상흔 ▲ 문인석 무인석 석마 ▲ 무인석에서 바라본 경릉 ▲ 무인석의 뒷면에도 상흔이 역력하다. [한국문화신문=최 우성 기자] 조선제24대 헌종과 그의 원비 효현왕후와 계비 효정왕후가 모셔진 동구릉의경릉이다. 헌종은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아들로1827년 출생하여 1834년(8세) 왕이되었으며 1849년(23세)에 갑자기승하하였다. 7세에 등극하여 23세에 생을 마쳤으니, 짧은 생애동안 왕다운 왕노릇도 못하고 만 것이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며 추존 익종(효명세자)의 아들이다. 할머니는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로 순원왕후이며,어머니는 풍양조씨조만영의 딸로 신정왕후 조씨이고 원비는 김조근의 딸로 효현왕후이며, 계비는 횽재룡의 딸로 효정왕후이다. . 헌종의 능인 경릉은 조선왕릉중 유일하게 3연릉으로 능의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