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밤새 눈 내린 아침 한겨울 문풍지 사이로 청아한 참새 소리와 정감 어리게 다가오는 싸리비질 소리에 눈을 뜨면 밤새 내린 눈에 설국으로 변한 이국적인 풍경에 마음이 설레곤 했습니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넉가래로 밀면서 최소한의 교통로를 만들어야 했는데 마당 끝 화장실, 뒤란의 장독대, 물 긷던 개울가까지 길을 내고 나면 이웃집까지 길을 내야만 합니다. 벙어리장갑에 하얀 벙거지를 쓰고 머리에 김이 나도록 눈을 치우며 빗자루와 넉가래를 들고 이웃과 마주한 아침시간이 참으로 행복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을 청년들은 토끼몰이한다고 설피에 옹노(올가미)를 만들어 산으로 향하고 외출이 제한당한 겨울 한낮에 아궁이에서 익어가는 고구마의 누릇함이 사랑방의 구수한 이야기처럼 한 겨울을 녹여주었습니다. 널지 않은 마당에 눈을 굴려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눈사람이 식구를 늘리는 재미를 주었고 처마 밑에 길게 매달린 고드름으로 칼싸움을 했던 그 시절엔 그리 넉넉하지 않아도 행복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나무를 땔감으로 이용하던 시절이라 자가용은 꿈도 꾸지 못했고 오로지 대중교통이 아니면 걸어서 이동해야 했으니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면 걱정보다도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척제현람(滌除玄覽)”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멋진 말입니다. 하루는 노자가 왕에게 묻지요. "백성들이 밭일하고 돌아와 섬돌 위를 깨끗하게 닦아주고, 그 마루 아래의 어두운 곳까지 살펴볼 수 있습니까?" 곧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숙여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흙과 먼지가 쌓인 바닥을 쓸고, 그 아래에 있는 팍팍한 살림살이를 들여다보려면 내 무릎도 더럽혀지고, 지저분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아랫사람을 돌볼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위로 올라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것은 위에 있으면서 처신을 겸손하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올챙이 적 시절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일단 개구리가 되고 나서 올챙이 적 시절을 망각하지 않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요. 쉽지 않기에 그런 분들이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도덕 재무장(MRA)’이라는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그때 Sing-Out 공연 때문에 서울본부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는데요. 사무실에 들어서자 공연 준비로 매우 정신이 없었는데 초입에 초로의 신사가 커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새해가 되어 봄이 돌아오자 만물이 새로운데, 성명께서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리신 지 큰 나라인 경우 천하에 호령할 수 있는 준비 기간인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 세월은 위에서 흘러 하늘의 운수가 바뀌었으며, 백성은 아래에서 곤궁하여 사람의 일이 극에 도달하였습니다." 1663년 새해가 되자 교리 이민서(李敏敍) 등이 당시의 왕인 현종에게 올린 차자(箚子:왕에게 올리는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의 시작은 이렇게 한다. 효종을 이은 새 임금이 즉위한 지도 5년이 지났는데, 이 정도면 정사를 다 파악해서 나라가 편안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다. ”지금 전하께서는 ....왕위에 계신 기간이 적은 것이 아닌데 세도가 나쁜 쪽으로 하루하루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심이 벌써 떠나갔으니 대업을 보장할 수 없으며, 국가의 형세가 이미 기울었으니 나이가 한창때인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위로 선왕께서 부여하신 막중한 사업을 생각하시고 아래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상황을 살피시며, 계절이 바뀐 데에 느낌이 일고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데 슬퍼하시며, 한밤중까지 잠 못 이루며 생각하고 안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유물(遺物). 선대의 인류가 후대에 남긴 물건. 이 묵직한 어감에 감히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책 속 유물이 뿜어내는 귀여움에 갑자기 무장해제된 느낌을 받을 것 같다. 지금은 유물이라는 거창한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실은 예전에 문방구로, 장신구로, 가구로 자연스레 썼던 물건들이다. 오늘 내 책상 위, 옷장 안에 있는 물건 역시 100년 뒤에는 박물관에 있을지라도 지금은 무심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어렵게 생각하는 유물도 한때는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이해인과 이희승, 두 저자는 이런 일상성을 눈여겨보았다. 같은 학교, 같은 과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각종 소품을 선보이는 디자인 브랜드 ‘이감각’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이 디자인한 소품은 기발한 디자인과 발랄한 감각으로 전통을 무심한 듯 일상으로 들여놓는다. 이를테면 복주머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가방, ‘호담국(虎談國)’이라 불릴 만큼 유난히 많았던 호랑이 이야기에서 착안한 각종 호랑이 관련 소품은 전통을 일상에서 즐기는 유쾌한 기분을 선사한다. 책의 서문에서 밝히듯, 이들은 북유럽이나 일본, 미국은 그 나라 특유의 디자인이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전설의 새 봉황의 무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각종 명패와 장롱, 문갑 등 가까이 놓고 지내는 가구에 많습니다. 봉은 수컷을 황은 암컷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두 마리를 같이 그려야 봉황이 완성되는 것이지요. 봉황을 많이 그린 이유는 그 새가 상서로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봉황을 거론하는 까닭은 먹이에 있습니다. 대나무에 꽃이 피면 열매가 열리는데 이것을 죽실(竹實)이라고 합니다. 봉황은 이 열매를 먹고 산다고 알려졌지요. 봉황(성인이나 스승)을 맞이하기 위해 마을 어귀에 심는 것이 대나무입니다. 대나무는 아열대 식물로 나무가 아니라 풀입니다. 곧게 30미터까지 자랄 수 있는데 그 원인은 단단한 매듭에 있습니다. 뿌리는 단단하고 깊숙이 엉켜 쉽게 뽑히지 않습니다. 대나무 속이 비어 있는 까닭은 성장과 관계가 깊습니다. 대나무는 빨리 자라 일 년이면 성장을 마무리하는데 하도 빨리 자라다 보니 속을 채울 여유가 없습니다. 줄기의 벽을 이루는 세포는 빠른 속도로 분열하는데 속은 세포분열 하는 속도가 더디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바람이 불면 다른 나무보다 유난히 흔들리며 큰 소리를 냅니다. 이 모습을 풍죽(風竹)이라고 표현하지요.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난해 봄 창간호에 이어 지난해 10월 30일 《서애연구》 2권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서애의 후손인 고교 친구 벽하가 2권을 보내왔습니다. 벽하 덕분에 서애 선생에 대해 많이 공부하게 됩니다. 2권의 첫글은 창간호와 마찬가지로 서애학회 회장인 송복 교수의 논문입니다. 이번 논문의 제목은 <류성용의 중용 리더십>입니다. 송교수님은 서애 일생을 한 글자로 표현하면 단연코 성(誠)이라고 하면서, 이를 박학지(博學之), 심문지(審問之), 신사지(愼思之), 명변지(明辯之), 독행지(篤行之)로 풀이해나갑니다. 이 가운데서 ‘박학지’를 읽으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박학지’란 널리 읽고 넓게 배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조선은 성리학 외에 다른 학문은 인정하지 않았고, 특히 주희의 학설만 오로지 숭상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주희의 학설에 이설을 다는 선비는 사문난적(斯文亂賊,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이라는 맹비난을 면치 못하였고, 박세당은 이 때문에 유배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송 교수는 정상적인 학문을 하려면 성리학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도 널리 넓게 두루 섭렵해야 한다는 것이 <중용>의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조선왕조 시대(1392~1910)는 지구의 기후 역사로 보면 소빙하기(小氷河期)에 속한다. 소빙하기는 중세의 온난기가 끝나고 14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약 500년 동안 지구의 평균 기온이 오늘날보다 1~2도 정도 낮아진 시기를 말한다. 소빙하기 기후의 제일 큰 특징은 불안정성이다. 소빙하기가 시작되자마자 기후는 요동치듯 불안정해졌다. 불안정적인 기후 변동은 혹한의 겨울, 몹시 찌는 여름, 극심한 가뭄, 폭우, 그리고 온화한 겨울과 서늘한 여름들이 불규칙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가뭄과 저온 현상으로 식량 생산이 줄어져서 영양실조와 기아가 빈번히 나타났다. 영양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면역력이 저하되어 각종 돌림병이 창궐하였다. 조선 시대는 돌림병의 원인인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대해서 알지 못한 시대였다. 사람들은 원인 불명의 돌림병이 돌면 으레 역귀(疫鬼: 질병을 일으키는 귀신)의 소행으로 받아들였다. 민간에서는 무당에게 굿을 청하여 역귀를 쫓아내고 병이 낫기를 바랐다. 병의 원인을 몰랐기 때문에 병을 증상으로 분류하였다. 피부에 돌기가 발생하여 커지면 두(痘, 천연두)라 하였고, 조그마한 돌기들이 발생하면 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아무리 겨울이 실종되었다고 해도 겨울은 겨울이다. 나이가 들어 눈 앞에서 날아갈 듯이 가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다고는 하지만 한 해를 보내고 새로 맞는 마음에는 늘 비장함이 파고든다. 새해를 맞으며 지난해 가졌던 찬란한 꿈과 희망이 결국에는 또 후회의 반복이라는 파도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 밤의 어둠을 깨고 나오는 새벽, 새해의 첫 해를 정성껏 맞이했다. 예전에는 첫 해에 자신에 관한 소망을 담았다면 이제는 내가 아니라 우리 자식 손주들, 우리 사회와 국가에 대한 염원을 담은 것이 달라진 것이긴 하지만. 한 해를 바꾸는 때를 세(歲)라고 한다. 세모(歲暮)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해가 바뀌면서 가장 많이 신경을 쓰는 사람은 당연히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다. 중국 고대의 역사에서 교훈을 알려주는 경전인 《서경(書經)》의 홍범(洪範) 부분을 보면 "임금은 해(歲)를 살펴야 하고, 귀족과 관리들은 달(月)을, 낮은 관리들은 날(日)을 살펴야 한다(王省惟歲 卿士惟月 師尹惟日)"라는 구절이 나온다. 세상이 잘 돌아가고 못 하고는 일 년을 단위로 나타나기 때문에 임금은 크게 전체를 보아야 하고 그다음 신하들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세조 12년 어느 날, 세조가 주최한 술자리가 무르익었다. 5년간의 오랜 북방 근무를 마치고 조정에 복귀한 양정도 함께였다. 양정은 계유정난의 핵심 공신이나 다른 공신들이 사대문에서 벼슬을 할 때 험지로 유명한 북방에서 근무한 터였다. 바로 그날, 운명을 가른 문제의 사건이 일어난다. 세조가 자신의 명에 따르지 않은 두 신하를 벌주려 하자 뜬금없이 양정이 나선 것이다. “일이 과하십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지가 이미 오래됐으므로 이제 쉬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해석하자면 왕에게 ‘그만큼 했으면 물러나라’라고 한 것이다. 참고로 이 나라 역사에서 왕보고 물러나라고 대놓고 면전에서 말한 사람은 딱 세 명이다. … 그만큼 역사에 몇 안 되는 대사건을 일으킨 양정의 운명은? 혹시 그 자리의 분위기가 궁금하신 분이 있다면 회사 술자리에서 사장님에게 이제 그만 은퇴하라고 해보자. 물론 나는 절대 책임 안 진다. (p.63) 과연 그 후, 양정은 어떻게 되었을까?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이런 사고, 오늘날에도 있을 법하지 않은가? 시대 상황과 세부 정황만 바뀔 뿐, 비슷한 일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통틀어,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인간에게 가장 해로운 해충은 ‘대충’이라고 합니다. 중국에 유명한 소설 《차부뚜어(差不多)》가 있습니다. 그 뜻은 "뭐 별 차이 없어", "대충 그렇지 뭐"입니다. 차부뚜어는 은행원이었는데 종종 십(十)을 천(千)으로 쓰고, 또 천을 십으로 쓰곤 했습니다. 화가 난 지배인이 나무라자 "천이나 십이나 한 획 차이인데 별 차이 없잖아요?"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요. 이렇게 대충 살던 차부뚜어가 병이 납니다. 급히 왕(汪)이라는 의원을 방문했는데 찾지를 못하자 비슷한 이름인 왕(王) 씨 수의사에게 진찰을 받았고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사는 거나 죽는 거나 별 차이가 없지..."하며 숨을 거두었다고 하지요. 일을 어물어물 요령만 피워 두루뭉술하게 해치우려는 태도나 생각을 적당주의라고 합니다. 적당(適當)은 '정도에 들어맞다.', '딱 알맞다.'라는 긍정적이거나 중립적인 말인데 뒤에 '주의'(主義)가 붙으면 부정적인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완벽주의도 문제이지만 적당주의가 가져온 폐해는 참으로 큽니다. 95년 6월 서울에서 명품매장으로 유명한 삼풍백화점이 갑자기 붕괴 됩니다. 인명피해가 508명이고 물적 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