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너, 김진성 형 알지? CBS. 그리고 진이 형, 이진. 어제 모처럼 만에 만났다. 얘기 끝에 네 얘기도 했다. 대단하다고 하더라.” 그의 목소리가 많이 달라졌다. 젖은 솜이불처럼 그를 짓누르던 깊은 좌절이 벗겨지고 있었다. 그는 한때 스타 방송작가였다. 유명 방송사의 라디오 간판 프로들이 그의 펜 끝에서 나왔다. 그런 그가 공교롭게도 나와 거의 같은 시기에 “파산”이라는 혹독한 통과의례를 치르게 된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잘 몰랐다. 그저 내가 가지고 있던 물질적인 걸 모두 잃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리고 잃은 물질이야 열심히 다시 뛰면 만회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 믿음은 옳았다. 하지만 그 믿음의 실현을 위해선 무서운 의지가 필요했다. “형. 우리 노가다 판이라도 나갑시다. ‘나 죽었소.’하고 한 몇 년 종잣돈 만들어 다시 시작합시다.” 내 말에 솔깃하여 관심을 두는 듯했으나 그는 끝내 용기를 내지 못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뭐가 떨어질지, 언제 내가 저 까마득한 바닥으로 떨어질지 몰랐다. 콘크리트 두들겨 깨는 소리가 귀마개를 뚫고 들어와 고막을 찢었다. 희뿌연 분진으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세월 빠르다. 시간 빨리 지나간다는 말은 하면 바보인 것 같다. 엄연히 뻔한 진리인데 새삼 읊조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일 터. 그래도 현실인 것을 어떻게 하나. 누구처럼 새해가 되었다고 희망을 노래한 것이 언제던가, 벌써 일 년이 속절없이 지나가고, 새해를 맞아하려고 했던 몇 가지 일들은 반의반도 시작도 못 하고 또 어영부영 살다가 다 써버렸으니, 여름 장미꽃잎처럼 팽팽하고 빛나던 나의 꿈은 어느새 시들었고 다시 찬 바람에 가시마저도 숨구멍을 닫아야 하는 때가 되었다. 내일모레가 섣달그믐이다. 우리가 양력을 쇠니 양력으로 따져볼밖에. 섣달그믐이 어떤 밤인가? 해가 바뀌는 밤이다. 절서(節序)의 빠름은 전광석화와 같고, 시간의 흐름은 달리는 말이 문틈을 스쳐 가거나 뱀이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과 같단다. 시인은 해가 저물어 간다고 자신의 감회를 부쳐 읊고, 공자(孔子)는 세월이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음을 탄식하며 한숨을 쉬었다. 평생을 내 집으로 생각하며 살던 회사를 나온 지도 벌써 해로 보면 두 자릿수에 가까워진다. 그전에는 선배들이 하던 대로 여행도 가고 놀기도 놀고 또 선배들의 도움으로 개인적으로 좋은 일도 없지는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어을우동, 신사임당, 황진이, 허난설헌, 김개시, 김만덕. 역사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도 한 번쯤은 사극이나 소설에서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이다.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폭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조선’이라는 시대, 그 한계의 틈새를 비집고 자신의 재능과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여섯 명의 여인들. 그들의 삶은 당대에도 실록을 비롯한 각종 문헌에 이름이 남을 만큼 화제를 모았지만, 수백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각종 사극과 소설을 통해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그들이 역사에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온어롤북스의 책 《조선왕조여인실록- 시대가 만들어낸 빛과 어둠의 여인들》을 공동 집필한 4인의 저자들은, 요즘 시대에 살았다면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그들이 역사에 남게 된 것은 ‘조선’이라는 시대적 특수성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그들을 그토록 남다른 인물로 만든 시대적 배경을 먼저 살펴보고, 여성의 사회적 활동에 제약이 심했던 시대에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는지, 각종 사료에 상상력을 더해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삶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범상치 않다. 고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可憐行色可憐身 가련행색가련신 可憐門前訪可憐 가련문전방가련 可憐此意傳可憐 가련차의전가련 可憐能知可憐心 가련능지가련심 가련한 행색의 가련한 몸이 가련의 문 앞에 가련을 찾아왔네. 가련한 이 내 뜻을 가련에게 전하면 가련도 능히 가련한 이 마음 알아주겠지. 방랑시인 김삿갓이 가련이라는 기생에게 쓴 가련기시(可憐妓詩)라는 시입니다. ‘가련(可憐)’이라는 기생 이름에 빗대기 위하여 연마다 ‘가련(可憐)’을 넣어 시를 지었네요. 역시 김삿갓다운 시입니다. 김삿갓은 함경도를 방랑하다가 함흥에서 가련이라는 기생을 만나 3년간 걸음을 멈추고 아늑한 시간을 보냅니다.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길위에서 떠돌던 김삿갓이 어떻게 한곳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을까요? 그만큼 가련이 김삿갓을 휘어잡았나요? 그런 점도 있겠지만 김삿갓이 가련을 만나기 전에 두 번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가련의 얘기를 들으면서 어떤 인연을 느낀 점도 작용하였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금강산 불영암 암자에서 공허스님을 만났을 때입니다. 시로서 김삿갓과 의기투합하여 서로의 시세계를 논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공허는 떠나는 김삿갓에게 함흥에 가거든 가련이라는 기생을 만나보라고 하였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하여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구촌 모든 나라가 이산화탄소의 증가량을 0으로 만드는 탄소 중립이다. 지금까지 유럽 국가들은 물론 중국과 일본, 한국을 포함하여 70여 개 국가가 탄소중립을 선언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12월 10일,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흑백영상으로 생중계된 연설에서 "200년이나 늦게 시작한 산업화에 비하면, 비교적 동등한 선상에서 출발하는 ‘탄소 중립’은 우리나라가 선도국가로 도약할 기회이다... 임기 내에 확고한 탄소중립 사회의 기틀을 다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탄소 중립을 달성하려면 두 가지 방향의 전략이 필요하다. 하나는 이산화탄소의 발생을 줄이는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발생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전략이다. 먼저, 이산화탄소 발생을 줄이려면 어떠한 방안들이 있을까? 이산화탄소의 발생을 가장 효과적으로 줄이려면, 석탄을 태우는 화력발전소를 줄여야 한다. 비교적 최근인 2020년 4월 중 우리나라와 OECD국가의 에너지원별 전기 발전 비중은 <그림1>과 같다. 위 그림을 보면 세 가지 사실이 눈에 띈다. 첫째는, 우리나라는 아직도 OECD 국가에 견주어 석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초겨울에 접어든 요즈음에 나는 천 원의 행복 속에 빠져들고 있다. 시중에 점점 많아지고 있는 천 원짜리 전문점을 가주 간다는 뜻은 아니다. 나에게 이 행복을 주는 곳은 동대문 밖 종묘 옆 담자락 주위로 펼쳐진 중고시장이고 그 가운데서도 옛 책들을 파는 몇몇 서점이다. 지하철 1호선 동묘앞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가면 거기서부터 동묘공원 담을 따라서 청계천까지 광범위하게 중고품 시장이 펼쳐져 있어서 대낮에는 엄청난 숫자의 시민들이 오셔서 자기한테 필요한 물건을 골라 흥정하고 사가는 풍경이 정겹다. 그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오른쪽에 하나 또 저 안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두 개의 큰 중고책 서점, 다른 말로 하면 옛 책 서점이 있는데 각 서점 앞에는 길에다 책을 널어놓고 한 권에 천 원씩을 받고 책의 주인을 찾는다. 길에 누워서 주인을 기다리는 이 책들은 베스트 셀러였던 소설류나 수필들, 혹 신변잡기류, 철 지난 자기개발서적, 곧 돈 벌어 성공하는 법, 여행안내서, 요즘 쓸모없는 사전류 등등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어떻게 보면 이미 용도가 끝난, 도서라는 지식유통체계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는 것 같은 그 책 더미 속에 가끔 보물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동지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동지라 하면 팥죽을 생각하게 된다. 팥죽이라고 하니 서울에서 송추로 가는 도봉산 오봉 기슭 석굴암의 팥죽 전설이 생각난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인 1792년, 당시 석굴암에는 노스님과 동자승 단둘이서 살았는데 그날은 마침 동짓날이었고, 밖에는 많은 눈이 와서 마을과의 왕래가 끊기었다. 동자승이 아침 일찍 일어나 팥죽을 끓이려 아궁이를 헤집어 보니 그만 불씨가 꺼져 있었다. 노스님께 꾸중 들을 일에 겁이 난 동자승은 석굴에 들어가 기도하다 지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눈을 뜬 동자승이 공양간에 가보니 아궁이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바로 같은 시간. 석굴암에서 10여 리 떨어진 아랫마을 차(車) 씨네 집에서도 팥죽을 끓이고 있었다. 당시 50대 초반의 차 씨 부인 파평 윤씨가 인기척에 놀라 부엌 밖으로 나가보니 발가벗은 아이가 눈 위에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차 씨 부인이 "어디에서 새벽같이 왔느냐?"고 묻자 동자승은 "오봉 석굴에서 불씨를 얻으러 왔다"라고 대답했다. 차 씨 부인은 하도 기가 막혀 "아니, 스님도 너무 하시지. 이 엄동설한에 아이를 발가벗겨 불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새해가 다가온다. 사주보러 가는 사람이 많아질 시기다. 한 해가 시작될 무렵, 올해의 길흉화복과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문제들에 대한 조언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철학관은 늘 북적거린다. 미래를 궁금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며,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어찌 보면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다. 사주로 과거를 보면 '모든 게 내 잘못은 아니었다'는 위안을, 미래를 보면 '내일이 어제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얻을 수 있으니 이래저래 매력적인 수단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따금, 사주를 보러 간 여성들은 느닷없이 '팔자 센' 여자가 되어 역술인의 꾸지람(?)에 가까운 해석을 들으며 참담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 '여자 팔자가 너무 세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더 좋았을 팔자다', '팔자에 남자복이 없다' 등 ... 표현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좋은 남편을 만나 자식을 잘 낳고 현모양처로 사는 인생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과연, 남자에게도 여자복을 놓고 이렇게 '팔자 세다'는 표현을 쓸까? 아마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이성운에 관한 한, '팔자 센 사주'는 여성의 전유물이었다. 이런 일방적인 사주 해석에 반기를 든 책 《내 팔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21세기 지구촌의 국가들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환경 문제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 위기다. 기후 위기는 ‘공유지의 비극’ (tragedy of the commons)이라는 경제학적인 원리가 적용되는 좋은 사례다. 1833년 영국의 경제학자 로이드(W. F. Lloyd)는 목장을 예로 들어 공유지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설명했다. 한 마을이 비옥한 풀밭을 공유하고 있는데 10명의 농부는 각각 10마리의 소를 풀밭에 방목하고 있었다. 100마리의 소들은 충분히 풀을 먹고 잘 자랄 수 있었다. 어느 날 농부1은 소를 한 마리 더 기르면 이익이 증가한다는 것을 알고, 소 한 마리를 추가로 방목했다. 이제 소는 101마리가 되어 한 마리가 먹을 수 있는 풀의 양이 조금 줄었다. 그러자 농부1은 한 마리를 더 추가하면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모두에게 분배되는 손해보다 크다고 생각하여 한 마리를 더 추가하였다. 그러자 농부2도 같은 생각에서 소를 추가하고, 이어서 10명의 농부 모두 소를 계속해서 추가했다. 시간이 지나자 풀밭은 황폐해졌고 농부들은 더는 소를 기를 수가 없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농부들은 개인의 이익을 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하다가 일이 터졌다. 애들 다 출가시키고 둘이서 사는 우리, 지난 주 집사람이 갑자기 김장한다고 해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소식을 전했더니 “도와주어야지, 여자 혼자 하려면 너무 힘들다.”라고 하기에 큰맘 먹고 바깥 일정을 줄이면서 들어와서 배추 속을 만들기 위한 무채 썰기 시작했는데 무 두 개를 썰고 나서 그만 채칼에 오른 손 엄지 끝을 베이고 말았다. 손톱도 조금은 잘리는, 엄지손으로 보면 중상이다. 그냥 지혈로 버텨보는데 지혈이 안 된다. 결국, 집사람의 성화로 자정 무렵에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니 당직 의사와 간호원이 고생고생하면서 봉합수술을 해주신다. 집에 오니 새벽 1시 반. 일단은 안심하였지만, 문제는 그다음 날부터였다. 말하자면 오른손 엄지가 없어진 셈이다. 붕대로 감아놓으니 힘을 쓸 수가 없다. 물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물에 손을 담글 수가 없으니 면도를 하려고 해도 오른손으로 하던 면도기를 제대로 잡을 수가 없어 면도가 안 되고, 머리를 감을 수 없고, 옷을 입으려니 단추를 꿸 수가 없어 못 입겠다. 나는 골프를 안 치니 그립 잡는 것으로 고민할 이유는 없지만, 오른손으로 하는 작업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