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통제사의 죽음을 애도함 혼자 힘으로 하늘의 절반을 받들어 지탱했지. 고래 같은 흉악한 도적 격살하여 거친 물결 피로 물들였고. 맹렬한 불길로 풍이(馮夷) 같은 왜적 소굴 다 태웠네. 공이 높아지니 시기와 모함의 덫 피하지 못하면서도, (나라 위해) 목숨을 깃털처럼 여겼으니 얼마나 애석한가. 그대는 못 봤는가 현산 동쪽의 한 조각 비석에 양공(羊公)이 세상을 뜬 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처량하구나 몇칸의 민충사(愍忠祠) 해마다 비바람에 훼손돼도 수리조차 못 하는데, 지네 나오는 사당에 소리 삼키며 우는 곡소리 들리도다 哀 李統制使 閑山島古今島 (한산도고금도) 大海之中數點碧 (대해지중수점벽) 當時百戰李將軍 (당시백전이장군) 隻手親扶天半壁 (척수친부천반벽) 鯨鯢戮盡血殷波 (경예륙진혈은파) 烈火燒竭馮夷窟 (열화소갈풍이굴) 功高不免讒妬構 (공고불면참투구) 性命鴻毛安足惜 (성명홍모안족석) 君不見峴山東頭一片石 (군불견 현산동두일편석) 羊公去後人垂泣 (양공거후인수읍) 淒凉數間愍忠祠 (처량수간민충사) 風雨年年OO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인류 역사를 보면 질병의 유행으로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학자들은 중세 때인 14세기에 유럽에서 창궐했던 페스트로 1347~1351년 동안에 유럽 인구의 1/3인 2,500만이 죽은 것으로 추산한다. 1918년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은 페스트를 능가하여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질병으로 기록되고 있다. 전 세계에 퍼진 스페인 독감으로 죽은 사람은 5,000만 명으로 추산하는데, 많게는 1억 명까지 죽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병은 1918년 3월에 미국 시카고 미군 기지에서 첫 감염자가 나왔는데, 1917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 군인의 이동을 따라 유럽으로 번지고 이어서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당시는 1914년에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 중이어서 대부분 나라에서 신문들이 보도검열을 받던 때라 독감 소식은 깊게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스페인은 중립국으로서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론 통제가 없었다. 당시 스페인 국왕이었던 알폰소 13세도 독감에 걸렸기 때문에 스페인 언론에서는 이 독감에 대해서 자세히 보도하였고 이후 이 독감은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스페인에서는 이 독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여자들처럼 말 곧 언어를 안주로 해서 몇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닌 ‘남자’라는 종족들은 자나 깨나 술을 마시기만 하면서 술잔에 대해서는 그리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이 술잔에 대해서도 애착이 있고 집착이 많았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기왕에 먹는 술, 뭔가 색다르고 정취가 있고 멋있게 먹느냐를 궁리하다 보니, 술잔에 멋이 있어야 한다는 데로 생각이 미친 것이리라.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한학자인 아오키 마사루(靑木正兒, 1887~1964)는 중국의 문화를 연구해서 펴낸 책 《중화명물고(中華名物考)》의 ‘주상취담(酒觴趣談)’이란 항목에서 술잔의 등급을 매겨 발표한다. 으뜸으로 치는 것은 ‘야광배(夜光杯)’다. 전설에 따르면 주(周)나라 5대 목왕(穆王)이 순시하기 위해 서역에 왔을 때 서역 사람들은 백옥의 정(百玉之精)으로 만든 술잔을 그에게 바쳤다. 달은 밝고 바람이 맑은 밤에 술이 잔 속으로 들어가자 술잔은 선명한 광채를 발하면서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주나라 목왕은 크게 기뻐하여 이를 나라의 보배로 여기고 “야광상만배(夜光常滿杯; 밤에 광채가 항상 잔에 가득하다)”라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씨를 잘 쓰는 이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경지에 오른 사람은 도구나 재료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훌륭한 목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는 말과 상통하고 뒤집어 말하면 선무당이 장구 나무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지만 실력이 중요한 만큼 그에 못지않게 붓도 중요합니다. 거친 갈필(葛筆, 칡뿌리로 만든 붓)로 위대한 작품을 남길 수는 있지만 좋은 붓, 잘 만들어진 명품이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됩니다. 뛰어난 사진작가가 좋은 렌즈를 위하여 돈을 아끼지 않는 까닭이고 목수가 좋은 연장을 구하기 위하여 애쓰는 까닭이며 훌륭한 연주자가 값비싼 악기를 사는 까닭이지요. 중요한 것은 아무리 좋은 명품이 손에 쥐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실력이 없으면 무용지물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서예가에게 기천 만 원짜리 바이올린이 필요 없듯이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명품 붓이 필요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일반적인 붓은 양털로 만든 양모필(羊毛筆)입니다. 붓 중에서 셋째로 치는 것이 황모필(黃毛筆) 곧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것이고 둘째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효사재 가는 길》을 보다 보면 장 이사장이 우리나라의 대표적 그룹인 현대를 살린 이야기도 나옵니다. 장 이사장은 공직 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바로 현대 부도를 막은 일이라고 하는군요. YS가 대통령이 되고 난 뒤 YS는 선거기간 중 자신을 괴롭힌 정주영을 손봐주려고 하였답니다. 정주영 회장이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아무래도 경쟁 후보인 YS를 많이 괴롭히지 않았겠습니까? YS는 은행장들을 전부 청와대로 불러 현대에 돈 주는 은행들은 전부 문 닫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답니다. 그때만 하여도 제왕적 대통령 시절이니 은행장들이 감히 대통령의 엄명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전에 대우가 정치적인 이유로 문을 닫아 우리나라 경제에 큰 주름이 생겼었는데, 현대마저 그런 식으로 문을 닫게 하면 나라 경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현대 부도는 대우 부도보다 더 큰 파장을 몰고 올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은행장들이 머리를 썼답니다. 직접 현대에만 돈을 주지 않으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현대종금에 돈을 빌려주었답니다. 현대종금은 이 돈을 받아 현대그룹 내 각 회사에 돈을 풀었구요. 그때만 하여도 현대종금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맑은 시내가 흐르고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 그곳에 고래등 같이 우뚝 솟은 기와집을 짓는다. 마루는 시원하고 방은 따뜻하며 둘레에 난간이 처져 있고, 창과 출입문은 밝고 깨끗하며 방바닥에는 왕골자리가 시원하게 깔린다. 흐르는 물이 당 아래에 감아 돌고 기암괴석이 처마 끝자락에 우뚝 솟아 있으며, 맑은 못이 고요하고 시원하며 해묵은 버드나무가 무성하다. 이리하여 무더운 여름 한낮에도 이곳의 바람은 시원하다." - 김창협. 청청각기(淸淸閣記)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이런 곳에 이런 집을 짓고 무더운 여름에도 시원하게 살고 싶은 것이 보통의 바람일 것이다. 조선시대에 문인들이 이런 좋은 환경에 집을 마련하고 살았을 것이지만 그들의 그윽한 경지를 눈으로 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고, 또 공부를 열심히 해서 벼슬을 한다고 해도 여간해서는 나라에서 주는 녹봉만으로 이런 집을 지을 재력을 갖추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은 집안에 재력이 있는 경우임이 틀림없다. 조선시대의 문장가로 유명한 농암 김창협(1651,효종 2∼1708,숙종 34)은 아버지 김수항이 기사환국(숙종 15년인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한자 서예는 ‘전예해행초(篆隷楷行草)’ 곧 전서(篆書)ㆍ예서(隷書)ㆍ해서(楷書)ㆍ행서行書)ㆍ초서(草書)로 분류합니다. 글자의 발전과 흘려 쓰는 정도에 따른 분류법이지요. 개인적인 차이는 있지만 저는 ‘예서(隸書)’를 가장 좋아합니다. 제가 예서를 좋아하는 이유는 고풍스런 맛과 획의 수려함, 가로획이 주는 웅혼함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서체는 노예들이 발전시킨 서체입니다. ‘隷’자가 노예 ‘예자’거든요. 사회 초년병 시절에 아이들에게 한자 빽빽이를 시킨 적이 있습니다. 물론 효과가 적지는 않았지만, 억지 반복 속에서 학습효과를 기대할 수 없어 중간에서 그만둔 것이 생각납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기에 책을 소장하기 위해서는 필사가 가장 일반적이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내용을 베껴 적어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 귀찮은 일을 노예에게 시켜서 하게 합니다. 그것이 예서체가 발달하게 된 배경입니다. 고문은 수많은 판본이 존재합니다. 그 까닭은 필사하면서 잘못 베낀 이유도 있고 진시황의 분서갱유 사건 이후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책을 단지 머릿속에 기억돼있는 지식을 중심으로 다시 기록했기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6.25 전쟁 때 경찰이나 빨치산이나 모두 나눔의 명가 효사재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를 하였다고 했지요? 이때의 이야기 가운데 그냥 덮고 가는 것이 아쉬워 몇 가지 더 이야기하렵니다. 처음 빨치산이 효사재에 내려오니까, 장 이사장 어머님은 귀중품을 뺏기지 않기 위해 숨기려고 하셨습니다. 집에 당시에 제일 좋은 재봉틀과 축음기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값비싼 부분인 재봉틀과 축음기 대가리 부분을 어머니가 보자기에 싸서 보릿대 쌓아놓은 곳에 파묻어 놓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에 이를 눈치챈 빨치산 한 명이 “그 물건을 거기 놔두었다가 비를 맞으면 못쓰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 집 물건에 손을 안 대니까 그런 걱정은 마시고 갖다가 제대로 쓰십시오.”라고 하더랍니다. 지레 의심하고 숨겼던 어머님은 당황하셨겠지요. 그리하여 축음기를 제대로 해놓으니까, 이를 즐겨 들은 사람이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었답니다. 이현상이 오면 늘 듣던 음악이 있었는데, 장 이사장은 그때는 무슨 음악인지도 모르다가 나중에 성장해서야 그 음악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라는 것을 아셨다는군요. 당시 장 이사장이 뭉툭해진 축음기 바늘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당인 종묘 다음으로 큰 사당인 칠궁에는 임금을 낳았으나 왕비가 되지 못한 일곱 후궁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왕을 낳은 칠궁의 후궁들》은 운 좋게 왕위를 이어갈 왕자를 낳았으나 끝내 왕비가 되지 못했던, 그래서 죽어서도 임금 곁에 잠들 수 없었던 일곱 여인의 삶을 연민과 공감의 필치로 그려낸다.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의 왕위를 승계한 27명의 임금 가운데 왕비 소생은 15명에 불과하며, 12명은 방계 혈통이다. 왕비가 왕위를 이어갈 대군을 낳지 못하면 후궁 소생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갔다. 1부 ‘실제 왕을 낳은 칠궁의 후궁들’에서는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칠궁에 들지 못한 공빈 김씨, 경종의 생모로 궁녀에서 왕비까지 초고속 승차한 희빈 장씨, 무수리 출신으로 최장수 왕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 명문가에서 간택되어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를 다룬다. 2부 ‘추존왕을 낳은 칠궁의 후궁들’은 손자 능양군이 왕위를 이음으로써 인생의 만추를 맛본 인빈 김씨, 아들 효장세자가 정조의 양부가 된 덕분에 추존왕 진종의 어머니가 된 정빈 이씨,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교수] 문제 제기 이명박 정부에서 4대강 사업을 추진하면서 제작한 홍보 자료를 보면, 4대강 사업이 끝나는 2011년이 되면 우리나라는 반복되던 홍수 재난에서 벗어난다고 하였다. 그런데 2011년 여름에는 비가 많이 오고 홍수 피해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대부분 국민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그해 7월 27에 수도권에 집중호우가 내려 곳곳에서 하천이 넘쳐흐르고 서울의 우면산에서 산사태가 나서 사람이 죽고 교통이 마비되고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러자 8월 10일에 당시 4대강 사업 추진본부장이었던 심명필 교수는 평화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강우 기준으로 4대강 사업 전과 후의 피해 결과를 비교하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지만, 예전 유사한 강우가 발생했을 경우 등을 기준으로 볼 때, 그때와 비교하면 1/10의 피해를 보인다고 보고 있다.” 심명필 교수의 발언 하루 뒤인 8월 11일, ‘4대강 홍수피해 현장 시민공동조사단’은 기자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4대강 준설로 인하여 홍수 위험을 줄였다는 정부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홍수 피해는 대부분 지류인 지방하천과 소하천에서 발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