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중국의 4대 미인하면 양귀비, 서시, 왕소군, 초선 또는 우희를 꼽습니다. 사실 양귀비는 당나라 현종의 며느리였지요. 양귀비의 미모에 빠진 당현종이 며느리를 뺏어 후궁으로 삼은 이상한 관계랍니다. 실제로 양귀비의 체형은 좀 풍만한 편이었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비파를 비롯한 음악과 춤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양귀비의 원래 이름은 양옥환으로 당현종에 붙어 권력이란 마약에 심취합니다. 그녀는 안사의 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하였는데 결국엔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산시성에서 목매달아 자살하고 맙니다. 그녀의 나이 37살이었지요. 그 양귀비의 이름을 딴 식물이 있습니다. 앵속, 약담배, 아편꽃이라고도 불리는 식물이지요. 어렸을 때 어머니는 쑥갓밭에 양귀비를 몇 뿌리 심으셨습니다. 어림잡아 보면 쑥갓인지 양귀비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거든요. 토사곽란이 나거나 소가 설사를 할 때 양귀비를 삶아 먹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씻은 듯이 나았으니 그 약효는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정상비약으로 양귀비 몇 뿌리쯤은 심는 것이 그때의 사회상이었고 정부에서도 세 뿌리까지는 허락해준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양귀비의 덜 익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갈수록 시름이 많은 세상이다. 해가 바뀌면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퇴출될 듯하다가 다시 기승을 부린다. 이번엔 북에 사는 정치인들이 자기들의 핵문제는 팽개치고 교류 안한다고 남에 짜증을 낸다, 세상 사람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집에 묶이고 왕래를 안 하니 돈이 돌지 않아 모두가 죽겠다고 아우성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말라버린 돈을 돌리려 해도 제도에 가로막혀 끙끙대고 있다. 이런 세상에 시름을 잊고 좀 마음 편히 사는 방법은 없는가? 이 가운데 시름없는 것은 어부의 생애로다 일엽편주를 만경창파에 띄워놓고 인간세상 다 잊었으니 날 가는 줄 알겠는가 1549년 6월 유두(流頭) 사흘 뒤에 귀밑털에 서리가 내린 노인은 낙동강의 지류인 분강(汾江)의 고깃배 뱃전에서 어부가 보는 세상을 노래하는 시조를 선보인다. 이 시조를 만든 이는 당시 83세의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서른둘에 벼슬길에 올라 중앙과 지방의 온갖 요직을 거치며 유능한 관리로서 인정을 받고 명성을 쌓았지만, 중앙 정계의 소용돌이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오려는 소망은 일흔넷이 되어서야, 그것도 겨우 병을 핑계로 허락될 수 있었다. 그만큼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저는 춘천댐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땀방울에 의지하여 성장을 했지요. 밭 갈고, 씨 뿌리고, 김매고, 꼴 베고, 나뭇짐지고, 약치고, 물대고... 농사일을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무리 기계화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육체적 노동이 많이 필요하기도 하고 땅에 붙어사는 식물들인지라 앉은걸음으로 일을 하거나 허리를 구부려야 하는 일이 많으니 관절이나 무릎 허리에 무리가 가기도 하지요. 농사꾼에겐 요일의 개념이 별로 없습니다. 휴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비 오는 날이 휴일인 셈이지요. 그리고 일은 때에 맞추어서 해야 합니다. 일을 미루면 수확의 풍성함을 담보할 수 없지요. 하루하루가 잡풀과의 전쟁인데….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농작물을 심어 놓고 나면 일기에 민감해집니다. 비가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걱정이고 많이 오면 많이 오는 대로 걱정입니다. 햇볕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으니 피부가 거칠어지는 것은 덤입니다. 이런 어려움이 많이 있는데도 농사를 짓는 이유가 있습니다. 웰빙이나 웰다잉을 이야기하는 시대에 건강한 먹거리를 스스로 심어 먹는 행복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런 생각을 하며 적벽을 쳐다보는데, 이 교수님이 오른쪽 약간 체구가 작은 절벽 위에서 내려오는 검은 줄이 무엇인지 알겠냐고 물어보신다. 나는 순간 전깃줄인가 하였으나, 이 교수님은 저 절벽 뒤 샘물에서 물을 받아 내리는 것이란다. 그렇지. 아무것도 없는 저 절벽 위에서 전깃줄만 딸랑 내려올 리는 없겠지. 뒤를 돌아보니 가느다란 물 파이프는 어느 집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집 앞에는 평창강 힐링하우스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다. 펜션이구나. 아름다운 매화마을에 펜션이 없을 리가 없지. 이 교수님은 주인장이 자기와 같은 천주교 교인이라고 들어가서 차 한 잔 마시자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마당 한쪽에 성모마리아가 합장하면서 우리를 환영하고 있는데, 주인장이 나오면서 이 교수님을 보고 반가워한다. 그러는 사이 주인장 아내는 굳이 차 한 잔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차를 내온다. 차를 마시기 전에 절벽 위에서부터 끌어온 생수를 먼저 마신다. 의외로 연약한 물 파이프에서 생수가 힘차게 나오고 있다. 물맛이 기가 막히다. 차를 마시며 주인장 내외와 담소를 나누는데, 딸이 이대 로스쿨을 나와 서울의 어느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단다. 이 교수님이 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금강산과 백두산에 관한 전문사진작가이며 영상작가이신 이정수 님이 새로 이사한 집을 위해서라며 액자에 넣은 사진을 선물로 가지고 오셨다. 사진을 보니 금강산 천화대의 모습이다. 구름이 영봉들을 휘감아 오르는 신령한 풍경사진인데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멋진 선경이다. 지금 금강산에 가면 딱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금강산 관광이 끊어진 지 10년이 넘어 가볼 수가 없으니, 사진으로라도 이렇게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전 세계 아무리 좋은 경치도 구경하러 갈 수가 없으니, 옛날 교통편이 힘들어 천하의 명승이라도 구경을 하지 못한 선인들의 처지와 다를 것이 없다. 우리 선조들이 실제로 가보지도 못하면서도 가장 많이 애송한 시가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의 '등악양루(登岳陽樓)'라는 시이다. 사실 옛날 악양루를 가서 볼 우리 선인들이 몇 명이나 있었겠는가? 얼마 전까지야 숱하게 우리가 관광으로 다녀왔지만, 이제는 못 가보는 그 악양루의 경치와 그것을 보는 시인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昔聞洞庭水러니 今上岳陽樓라. 吳楚東南坼이요, 乾坤이 日夜浮라. 고등학교 때 문과반에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능선을 넘어가니 금방 강가로 내려서고 둘레길은 강변을 따라간다. 아까 이정표에서 본 강변길이 지금부터 시작이구나. 길 왼쪽의 논에는 파종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써레질이 되어 있다. 그리고 써레질 자국이 보이도록 살짝 채워진 물 위로 절개산이 몸을 비추고 있다. 저 논에 써레질 하는 황소 한 마리 있다면 잠시 아스라한 어릴 때 추억에 잠기겠지만, 저 논은 트랙터로 써레질을 하였겠지? 몇 마지기 논밭 뒤로 마을이 보이는데, 저 마을이 매화마을이겠구나. 강변마을은 언제 보아도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강변을 따라 걷는데 시비(詩碑)가 보인다. 바로 이 교수님이 말씀하시던 김삿갓 시비다. 김삿갓(1807~1863)이 고향인 영월군 하동면으로 가다가 이곳 평창강 경치에 발목을 잡혀 하룻밤 자고 떠났단다. 그때 쓴 ‘강가(江家)’라는 시가 지금 시비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船頭魚躍 銀三尺 선두어약 은삼척 門前峰高 玉萬層 문전봉고 옥만층 流水當窓 稚子潔 유수당창 치자결 洛花入室 老妻香 낙화입실 노처향 뱃머리에 물고기 뛰어오르니 은이 석자요 문 앞에 산봉우리 높으니 옥이 만 층이라 창 바로 앞에 물 흐르니 어린아이 늘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잔잔히 흐르는 백마강의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뚝 솟은 바위 절벽을 만나게 됩니다.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꽃잎처럼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이지요. 의자왕은 백제 31대 임금입니다. 의자(義慈)의 뜻은 올바르고 자애롭다는 의미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의자왕은 무절제하고 방탕하며 무능한 왕으로 삼천궁녀를 거느렸다고 소문이 났을까요? 실제 백제는 궁녀 3,,000명을 거느릴만한 국력이 아니었습니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조선시대에도 궁녀는 500명을 넘지 못했으니까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처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의이고 힘이니 처벌 할 수 없다는 표현이 옳겠지요. 만약에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잡지 못했다면 역사책에 단순히 '이성계의 난'이라고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역사에서 종묘사직과 더불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임금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신라의 경순왕은 나라를 통째로 왕건에게 바치고 그는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천수를 다하고 죽습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은 공양왕이지요. 공양왕이라는 뜻도 공손하게 왕위를 양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다시 장미의 계절이 돌아왔구나. 요즈음 서울 등 대도시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장미이다. 장미는 장미이되, 땅에서 나무처럼 크는 것이 아니라 긴 줄기가 무한히 뻗어가는 넝쿨장미(rambling rose)다. 어릴 때 많이 듣던 낫 킹 콜의 노래 그대로다. 넝쿨장미야, 넝쿨장미야 왜 너는 넝쿨이 지는 건지 아무도 모르네 거친 세파에 겪으며 너는 자랐지 누가 넝쿨장미에 가까이 가 주겠는가? Ramblin' rose, ramblin' rose Why you ramble, no one knows Wild and wind-blown, that's how you've grown Who can cling to a ramblin' rose? 장미는 원래 화단에 길고 넓게 심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우리나라 도회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담장에 심어져 넝쿨로 뻗어가면서 담을 대신한다. 꽃이 피는 오뉴월에는 보기도 좋을뿐더러 가시 때문에 자연스럽게 방범 효과도 높지 않겠는가? 그러다 보니 도회지에 가장 흔한 식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가시이다. 꽃의 여왕, 계절의 여왕이란 직위를 부여받았으면서도 장미는 잎 뒤에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30여 분 동안 남쪽으로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성 필립보 생태마을이다. 성 필립보 생태마을은 생태계의 파괴를 막기 위한 환경운동의 전개, 자연 안에서 정신적, 육체적 치유 그리고 신앙 강화를 위하여 천주교 수원교구 환경센타에서 건립하였다고 한다. 생태마을이라고 하니 평화로운 어떤 마을 모습이 떠오르는데, 언덕 위에 성당과 거기에 딸린 몇 개 건물만 보인다. 그런데 절개산 간다면서 여긴 왜? 여기서부터 절개산 밑까지 절개 둘레길이 나 있어서, 둘레길을 걷는 것이다. 둘레길을 걷기 전에 언덕 위로 올라간다. 건물 옥상에서는 예수님께서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예수님의 저런 모습을 보니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이 떠오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래서인가? 천주교인들이 피정을 하러 이곳에 많이 온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 뒤에 보이는 둥그런 돔은 뭐지? 여기서 천문 관측도 한다고 한다. 오호! 그러다 보니 이번에는 찬송가 515장이 떠오른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 평상시 삶이 바빠 하늘을 볼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 하나님이 창조한 온 우주도 바라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그루터기는 나무가 잘려나가고 땅에 박힌 뿌리만 남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루터기에는 나이테(연륜)가 드러나 있어 그 나무가 지나온 세월을 짐작할 수 있지요. 한때의 성장과 영화로움을 뒤로한 흔적의 역사일 수 있습니다. 쉘 실버스타인이 지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마지막은 이러합니다. 사랑하는 소년에게 열매와 나뭇가지 몸통까지 다 내어주고 그루터기가 된 사과나무는 이제 늙어 아무런 욕망도 남지 않은 소년이 찾아왔을 때 평평해진 몸통을 펴며 여기 앉아 편히 쉬라고...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노라고... 그 사랑의 깊이가 너무 깊어서 눈시울이 붉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식물은 생명의 유연성을 자랑합니다. 동물에 비하여 이동의 자유가 없는 식물을 표현할 때 "식물인간", "식물국회" 등등으로 부정적인 표현을 동원하지만 실제로 유전자지도를 그리면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동물은 작은 상처에도 목숨을 잃기 쉬운 반면에 식물은 몸통이 통째로 잘려나가 그루터기만 남은 상태에서도 싹을 틔워 생을 이어가는 삶의 유연성이 있는 것도 장점이지요. 산을 오르다보면 톱으로 쓱쓱 베어간 흔적의 그루터기를 만납니다. 그루터기만 보고 살아있는 나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