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중국 동진(東晋)의 정치가 사안(謝安, 320∼385)은 국난을 구해낸 명재상으로 유명한데, 정치에 나오기 전에 동산(東山)에 은거하고 있다가 조정의 부름을 거듭 받고 할 수 없이 나와서 환온(桓溫,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동진-東晉의 정치가)의 사마(司馬, 중국 주(周)나라 때 벼슬)가 됐다. 당시에 어떤 사람이 환온에게 약을 보냈는데, 그중에 원지(遠志)라는 약초가 있었다. 환온이 그 약초를 들고 사안에게 묻기를 “이 약초의 다른 이름이 소초(小草)인데 어찌 하나의 물건에 두 가지 이름이 있는가” 하자, 사안이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동석한 학륭(郝隆)이라는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산속에 있을 때는 원지라고 하고 산을 나오면 소초라고 합니다” 하자, 사안이 몹시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이후 원지 혹은 소초라는 말은 명성은 요란하지만, 실제 일을 하는 면에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에 대해서 놀리는 말이 됐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조선조 중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출사하기 전에 고향인 안동 땅에 원지정사(遠志精舍)라는 작은 건물을 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사람마다 모두 생일이 둘이라고 한다. 한 번은 자기의 탄생을 기리는 생일이며 또 한 번은 해마다 맞는 새해의 탄생이란다. 누구도 정월 초하루를 무심히 보내지는 않으며 여기에는 임금이나 구두 수선공이나 차이가 없다고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은 말한다. 말하자면 이날은 인류 공동의 생일이라는 것이다. 새해를 맞기 위해 서양에서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동양에서도 제야의 종이 울린다. 그 종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지난 열두 달이란 기간 동안 내가 행했거나 당했거나, 이루었거나 등한히 한 모든 일을 순식간에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느끼는 진솔한 감정은 지난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 뭔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같은 것이리라. “저물어 가는 한 해는, 구렁에 들어가는 뱀과 같아라. 긴 비늘 몸체가 반 넘어 들어갔으니, 가는 뜻을 그 누가 막으랴. 더구나 꼬리마저 말고 있으니 애써 봐야 소용없는 것을. 아이들은 잠들지 않으려고, 밤을 새며 웃고 떠드네. 새벽닭아 부디 울지 말아라. 제야의 북도 울리지 말아라.” - 소식(蘇軾)), '수세(守歲)' 중국 송(宋)나라의 시인 동파(東坡) 소식(蘇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난달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 있는 자양스테이션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보았다. 조그마한 공연장에 들어가니 사방의 벽에는 그림이 걸려있고 그 앞으로 돌아가면서 이동식 의자들이 놓여 있다. 공연은 그 가운데의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무대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플라멩코 공연을 바로 눈앞에서 그것도 플라멩코를 추는 무용가의 숨소리를 그대로 들을 수 있고, 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바로 앞에서 본 것이다. ‘플라멩코’ 하면 정열의 춤 아닌가? 정열의 나라 스페인의 춤이고, 또 집시의 춤에서 유래한 것이니 정열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정열을 더하는 것이 탭댄스처럼 신고 있는 구두를 바닥에 다닥다닥 부딪치며 소리를 내면서 춤을 추는 것이다. 그래서 그 소리를 좀 더 잘 내기 위해서 바닥에 판까지 깔았다. 무용가가 한창 절정에 오르며 발을 구를 때에는 발 구르는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발을 현란하게 놀리고 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이런 플라멩코까지 보게 되었는지에 대해 얘기해야 하겠다. 이 공연을 기획하고 주최한 블루로터스 최혜원 대표가 한 번 보러 오라고 초대하였는데 최 대표는 원래 미술을 전공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래도 눈은 내렸다. 계엄령이 떨어지고 알 수 없는 총소리가 밤하늘을 찢고 눈만 뜨면 어리둥절한 뉴스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군인 이름들이 언론매체를 도배질하던 그 겨울에 육군본부에도 궁정동에도 무주공산 청와대에도 눈은 내렸다. 처음 겪어보는 극단의 회색이었다. 하늘도 사람들의 발걸음도 음악 선율도 온통 회색조(調)였다. “김대중이가 잡혀갔대.” “김영삼이 김종필이도 가택연금 당했다는구먼.” 사람들의 수근거림마저 우중충하던 세모(歲暮)였다. <손시향 - 검은 장갑. 지나가다가 밖으로 음악 소리가 새 나오기에 이 노래가 생각나 들렀소이다. 혹시 음반이 있으면 들려주시오.> 음악실에서 바라본 입구 쪽 자리는 멀기도 하려니와 음악실 유리에 조명 빛이 반사돼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슴푸레 보이는 형상이나 글씨체나 신청곡으로 보아 노신사임이 분명했다. 아직 교대시간이 조금 남긴 했어도 뒷 진행자의 양해를 얻어 서둘러 음악실을 나왔다. “저어,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도 이 노래를 좋아합니다만 음반이 없어 들려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할 수 없지. 아쉽긴 하지만 그게 어디 디제이 양반 탓이오? 괜찮으니 앉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한 해를 마감하는 시점이다. 다들 시간의 빠름과 덧없음을 한숨으로 토해내고 있다. 올 한 해를 너무나 빨리 보냈다는 뜻이리라. 2019년, 올해 우리는 3.1만세운동 100돌, 임시정부 세움 100돌을 맞아 그 의미를 많이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올해가 기미년이란 착각에 빠질 정도였는데 가만히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해년 황금돼지의 해였다. 이 한 해 나라 전체로 보면 황금돼지의 후광을 조금도 받지 못한 듯 곳곳에서 경제가 안 돌아가고 생산과 소비가 엉망이라는 비명을 들어야 했다. 경제가 그리된 데 대한 원인 진단 또한 서로 달랐고, 특히나 정치적인 소용돌이가 너무 크게 일어 우리가 기대했던 만큼 편안하고 윤택한 한 해가 아니었음은 누구도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너나 나나 모두 후회 일색이지만 그 후회의 이면을 보면 우리가 우리 앞에 지나가는 이 시간에 대해서 주인이 아니고 종이나 노예가 되어, 우리가 시간의 흐름에 맥없이 끌려간 게 아니냐는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반성도 하게 된다. 그것은 언젠가 ‘걷기 예찬’이라는 책의 저자 다비드 르 브르통이 지적한 대로 우리들의 시간을 잘 쓰지 못한 것 아니냐는 점에서 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잠시 국내에 들어와 있던 동생이 출국하면서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며 나에게 영문소설을 하나 주고 갔다. 리사 시(Lisa See)라는 미국 여류작가가 올 3월에 펴낸 《The Island of Sea Women》라는 소설이다. 동생 덕분에 정말 오래간만에 영어 원어로 된 소설을 읽어본다. 처음에는 의무감에 읽기 시작하였으나, 곧 소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소설은 영숙과 그녀의 친자매 같았던 친구 미자라는 해녀를 중심으로 1938년부터 2008년까지 제주 구좌읍 하도리 해녀들의 삶을 그린 것인데, 소설을 통하여 제주 해녀들의 삶과 애환, 슬픔 등이 피부에 와 닿도록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소설 속에는 제주의 풍토, 민속 신앙, 역사 등 제주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하여 나는 작가가 당연히 한국계 미국인일거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게 뭐야? 백인 여자다! 비록 증조부의 중국인 피가 조금 섞여있긴 하지만, 외모는 완전 백인 여자다. 어떻게 백인 여자가 제주를 우리보다 더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리사는 어느 잡지에 실린 제주 해녀의 사진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아, 언젠가 제주 해녀에 대한 소설을 쓰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장생(張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집을 지으려는 생각에 산에 들어가 재목을 찾아보았는데, 빽빽이 들어찬 나무들 모두가 구불구불하게 비틀어져 용도에 맞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산 속 무덤가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앞에서 보아도 곧바르고 왼쪽에서 보아도 쭉 뻗었으며 오른쪽에서 보아도 곧아 보였다. 그래서 '좋은 재목이구나'라고 생각하고는 도끼를 들고 그쪽으로 가서 뒤에서 살펴보니 슬쩍 구부러져 쓸 수 없는 나무였다. 이에 도끼를 내던지고 탄식한다. “아, 재목이 될 나무는 얼른 보아도 쉽게 알 수가 있어 고르기가 쉬운 법인데, 이 나무의 경우는 내가 세 번이나 다른 쪽에서 살폈어도 쓸모없는 나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 용모를 그럴듯하게 꾸미면서 속마음을 숨기고 있는 사람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 말을 들어 보면 조리가 정연하고 그 용모를 살펴보면 선량하게만 여겨지며 사소한 행동을 관찰해보아도 삼가며 몸을 단속하고 있으니 영락없이 군자의 모습이라고 할 것인데, 급기야 큰 변고를 당해 절개를 지켜야 할 때에 가서는 본래의 정체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마니, 나라가 결딴나고 마는 것은 늘 이런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복잡한 도심을 떠나서 북한산자락으로 이사 온 지도 7년이 지나 벌써 8년째다. 우리집에서 언덕을 넘어서면 한옥마을이다. 이사 올 때에 허허벌판이었는데 2015년부터 한두 채 한옥이 시범적으로 들어서더니 지금은 한옥마을이 한옥 양옥으로 꽉 찼다. 사진을 비교해보면 그 변화에 눈을 의심할 정도다. 이 근처로 이사 온 것은 옛사람들이 즐기던 풍류, 곧 어지러운 속세의 소란스러움을 벗어나 산 가까이에서 맑은 공기를 숨 쉬며 자연 속에 평온하고 건강한 삶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일대는 북한산이 바로 눈앞에 있고 크고 작은 계곡을 마음만 먹으면 금방 찾아갈 수 있는 곳이어서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묘사한 대로 “깊숙한 골짜기를 찾아가고 높다란 언덕을 거닐어 볼만한[尋壑經丘] 운치와 구름 따라 나갔다가 새들을 따라 돌아오는[雲出鳥還] 한가함을 즐길 수 있다.” 집 거실에서 가까이로는 작은 산등성이나 가파른 언덕, 조금 멀리로는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푸른 소나무로 덮이고 군데군데 바위가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산의 힘찬 모습이 바로 보인다. 공자가 말했듯 “어진 이는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온라인 중고서점(www.bookoa.com)에서 《신라인과 대화》라는 책을 주문하여 읽었습니다. 나는 ‘신라인과의 대화’라고 하기에, 신라의 역사나 문화 예술에 관한 책이겠거니 하면서 책을 주문했던 것인데, 배달되어온 책을 받아드니 지은이는 히라노 교코(平野杏子)라는 일본 여자 화가입니다. 이를 정희정씨가 번역하여 2000년에 출판하였네요. 책 표지에는 ‘화폭에 담은 경주 남산 마애불’이라고 작은 글씨로 쓰여 있고, 경주 남산의 마애불도 그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일본 여자 화가가 경주 남산의 마애불에 빠져들게 되었을까? 교코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현모양처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정대로 진학합니다. 1930년생인 교코가 대학 들어갈 때인 1950년대에는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모두 여자는 대학을 보내더라도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고 가정대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코는 미술에의 꿈을 버릴 수 없어 대학 입학 후 미술 동아리에 가입했고, 졸업 후에도 회화연구소 조수로 일하며 끝내는 일본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하여 화가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 아이들이 서너 살쯤 되었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구양자(歐陽子)가 밤에 책을 읽고 있다가 서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섬찟 놀라 귀기울여 들으며 말했다. "이상하구나!" 처음에는 바스락바스락 낙엽지고 쓸쓸한 바람부는 소리더니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 일고 파도치는 소리같이 변하였다. 마치 파도가 밤중에 갑자기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물건에 부딪혀 쨍그렁 쨍그렁 쇠붙이가 모두 울리는 것 같고, 또 마치 적진으로 나가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 듯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 내가 동자(童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네 좀 나가 보아라." 동자가 말했다. "별과 달이 밝게 빛나고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으니 그 소리는 나무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 "아, 슬프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저 가을의 모습이란, 그 색(色)은 암담(暗淡)하여 안개는 날아가고 구름은 걷힌다. 가을의 모양은 청명(淸明)하여 하늘은 드높고 태양은 빛난다. 가을의 기운은 살이 저미도록 차가워 피부와 뼛속까지 파고들며, 가을의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적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