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 때도 사월이었다. 강가의 조약돌 같이 옹골차게 생긴 그녀가 내게 처음 오던 날이. 세상은 어지러웠다. 철옹성 같던 유신체제가 무너진 자리에 더 단단한 성을 쌓으려는 세력들의 이름이 연일 대중매체를 장식하던 때였다. 나는 그 시절 서울의 한 음악 감상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유채 밭이 노란 물결로 출렁인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날, 근무를 마치고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데 솔깃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형, 제가 여자 소개해 드릴까요? 형 하고 잘 통할 것 같은 친구예요. 나는 그때 그 후배의 소개로 한 여성과 평생 지울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다. 그녀를 처음 볼 때부터 왠지 낯설지가 않았고, 그녀 역시 어디서 나를 많이 본 듯하다며 친근감을 나타냈다. 첫 만남부터 마음이 통한 우리는 머잖아 금병산으로 봄맞이 산행에 나섰다. 진달래꽃이 무더기로 피어난 산풍경은 동화책 삽화 같았다. 그녀는 세상에서 봄이 가장 아름다운 산이라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김유정이 이런 곳에서 태어났으니 봄봄 같은 가작들이 나오지 않았겠느냐며 환히 웃었다. 그녀는 음악도 많이 알고 있었지만 문학에 대한 식견도 대단했다. 이상(李想)을 논하더니 소월을 논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봄의 전령사 얼음새꽃(복수촌)이 피었는가 싶더니 어느새 매화가 만발이다. 멀리 청옥산은 아직 하얀 솜두루마기를 걸치고 웅크리고 있는데 삼화벌판엔 벌써 청보리가 한 뼘이다. 온갖 멧새 때 소리에 아침이 앞당겨져 양달 쪽 목련은 나발을 불고, 복사꽃 망울 속엔 연지가 가득하다. 여기저기서 먼저 피려고 꽃잎들이 다투는 소리에 밤마다 들뜬 잠을 잔다. 이미 남녘에선 벚꽃 개화소식이 들려오니 머잖아 상춘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다닐 것이다. 누구나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 얼굴이 환해지지만, 꽃잎을 보면 떠나간 연인이 생각나 슬퍼진다고 노래하는 여인이 있어 소개한다. 나는 그룹 에드 포의 운영에 한계를 느껴 해산을 하고 미8군 무대 복귀를 결정 하였다. 새로운 밴드 결성에 있어 실력자들을 쉽게 영입할 수 있었으나 여성 보컬이 필요했다. 마땅한 적임자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던 중 우연히 한 신인여가수의 무대를 보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실력에 반해 즉석에서 발탁하여 팀에 합류 시켰다. 그 여가수가 바로 이정화이다. 그때가 1966년으로 팀 이름은 덩키스였다. 우리는 8군 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정화의 노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경기도 광주시 곧은골[直洞] 영장산 자락에 가면 조선 전기의 청백리 재상 맹사성의 무덤이 있습니다. 여기서 곧은골 고개를 넘어가면 분당 율동공원이 나오지요. 그런데 맹사성의 무덤 근처에는 웬 검은 소의 무덤[黑麒塚]이 있습니다. 왜 조선의 명재상 무덤 옆에 검은 소의 무덤이 있을까요? 지금부터 그 비밀의 무덤을 파헤쳐보기로 하지요. ▲ 경기도 광주시 곧은골[直洞] 영장산 자락에 있는 조선 전기의 청백리 재상 맹사성의 무덤 하루는 맹사성이 온양의 본가 뒤에 있는 설화산 자락에서 산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따라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닙니까? 맹사성이 뭔가? 하여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는데, 거기에선 동네 아이들이 검은 소 한 마리를 놓고 장난을 치며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아이들로서는 평소에 보기 드문 검은 소가 보이니까 호기심에 모여들었을 것이고, 그러다가 한 놈이 장난삼아 돌을 던지자 나머지 놈들도 따라서 돌을 던지며 검은 소를 놀려댄 것이겠지요. 그런데 검은 소는 아직 어려서 많은 아이들이 둘러서서 괴롭히니 어쩔 줄을 모르고 갈팡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 이현 잘 있어요 음반 표지 잘 있어요 잘 있어요 그 한마디였었네 잘 가세요 잘 가세요 인사만 했었네 달빛 어린 호숫가에 앉아 내 님 모습 나 홀로 새기며 또 다시 오겠지 또 다시 오겠지 기다립니다 잘 있어요 잘 있어요 그 한마디였었네 잘 가세요 잘 가세요 인사만 했었네 잘 있어요 가운데중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불가의 말이다. 참말로 그럴까?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진다는 말은 맞는 것 같은데, 과연 떠나간 자가 반드시 돌아올까?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해도. 지금 나와 만나는 모든 이들이 과거에 내가 만들어 놓은 인연일 수도. 육도윤회(六道輪廻) 삶이 진정 윤회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얼마 만에 다시 만난 것일까? 사방 사십 리 되는 성에 세상의 씨앗 가운데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를 산더미로 쌓아놓고, 사십년 만에 가서 한 알씩 다 가져오는 게 일 겁(劫)이라 하는 데. 사방 사십 리나 되는 바위를 사십년 마다 한 번씩 얇은 옷으로 스쳐서 다 닳으면 일 겁이라 하던데. 세상을 먼지로 바수어서 그 먼지를 다 헤아리면 일 겁이라 하던데. 우리는 몇 겁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관우물이라고 아십니까? 관이 있던 곳의 우물이란 얘기이지요. 관이 있던 곳의 우물이라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 지금부터 그 이상한 얘기를 풀어드리겠습니다. 안산시 목내동에 가면 일진전기라는 회사가 있는데, 바로 그 회사 정문 오른쪽 울타리 안에 관우물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바다에서 떠내려 온 관이 이 자리에 도착하였는데, 그 후 바닷가는 육지 안쪽이 되고 이곳에서 우물이 생겼답니다. 그래서 이곳이 관이 닿았던 자리라고 하여 관우물이라고 불렀다는군요. ▲ 안산시 목내동 일진전기 정문 오른쪽 울타리 안에 있는 관우물 표석 후후! 이렇게 말하면 성급한 사람은 이것도 설명이라고 하느냐며 화를 내실 것 같군요. 그 관은 문종의 아내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 씨의 관입니다. 현덕왕후가 아직 세자비 시절 단종을 낳았는데, - 그러니까 문종이 임금이 된 뒤에 현덕왕후로 추봉된 것이네요. - 그만 안타깝게도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하여 현덕왕후의 무덤을 일진전기 바로 뒤에 보이는 동산에 쓴 것이지요. 이곳을 능안리라고 부르는데, 현덕왕후의 무덤 소릉(昭陵)이 있던 곳이기에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이 비 그치면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 짙어오것다 이수복 시인은 왜 풀빛이 서럽다고 읊었는지 모르겠으나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으면 서럽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이 착 가라앉고 우울해 지는 건 사실 인 것 같다. 착잡하면 생각이 많아지는 걸까? 창밖 화초에 맺힌 빗방울이 바람에 흩어졌다 다시 맺히는 그 순간에도 기억의 편린들로 제작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지금이야 흔한 게 우산이지만 1960년대와 70년대엔 비닐우산도 귀했다. 그 시절엔 보슬비 정도는 맞으며 걸어가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고 우산을 든 사람은 비를 맞고 가는 사람에게 우산 씌워주는걸 당연하게 생각 했었다. 그때 나는 귀밑솜털이 채 벗겨지지 않은 중학생이었다. 벚꽃낙화가 거리를 하얗게 색칠하던 봄비 내리는 날, 난생처음 사랑의 열병이란 걸 경험하게 된다. 하교 길에 버스에서 내린 나는 우산이 없어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우산을 씌워주었다. 돌아보니 내가 가끔 들르던 문방구집 딸이었고 그녀는 이미 여고생이었다. 심장은 마구 뛰었고 머릿속은 텅 빈 듯하였다. 한 가지 분명한건 그녀는 자기 집을 훨씬 지나쳐 우리 집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역사시대 이래 남성들은 부권중심제의 울타리 안에서 여성에 비해 많은 특혜를 누리며 살아왔다. 우리 인류의 가계(家系)가 모계에서 부계로 바뀐 데는 국가권력의 탄생이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기는 소규모 전투시대에서 대규모 전쟁시대로 넘어올 때쯤으로 짐작된다. 부족국가나 읍락국가에 비해 남성들의 물리력 비중이 절대적으로 커진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진정한 남녀평등이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없겠으나,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여성들의 권익이 과거 보다는 많이 향상된 것 같다. 그리 멀리 소급할 필요도 없이 우리 어머니 세대만 하더라도 여성들은 남존여비사상의 희생물이었다.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밥 짓는 일을 시작으로 농사일과 가사에 허리가 휘도록 내몰렸다. 농한기인 겨울철에도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찬물에다 빨래를 한다거나 다듬이질로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 그나마 남편을 잘 만난 여인네는 마음고생이나마 덜 했지만, 당시 대다수의 남정네들은 그릇된 사회통념의 충실한 추종자들이었다. 식솔들은 배를 곯아도 자기 술 배는 채우고 다녔고 걸핏하면 술주정에다 험악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2000년이 넘는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어느덧 노래 꽃 피는 마을이 연재 70회를 넘었다. 이즈음에서 간략하게나마 우리 가요사의 개괄적 정리를 해 두고자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나라에서 제작되어 불리는 대중음악을 가요, 외국(영미)의 대중음악을 팝이라 한다. 하지만 위의 용어들은 고착되어 있는 게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천을 거듭해 왔다. 그러면 우리 가요는 언제부터 가요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밝히자면 가요라는 용어는 1970년대부터 일반화되었다. 1960년대까지는 유행가라 했었고, 그 이전엔 유행창가 또는 창가라 했었다. 그렇다면 창가를 우리 대중음악의 시원(始原)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일부 연구자들은 창가를 범주 안에 포함시키는 이들도 있으나 너무 포괄적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1027년에 나온 낙화유수를 최초의 가요 곡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필자 역시 후자의 설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그렇긴 하나 노래를 부른 이정숙이 동요를 전문으로 부르는 가수여서 그녀를 최초의 유행가 가수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많은 연구자들은 1930년에 봄노래 부르자로 등장한 채규엽을 최초의 유행가 가수로 꼽고 있으며, 최초의 인기곡으로
[우리문화신문=김상아 기자] 그는 게르만 계통이었을 것이다. 물론 미군장교니까 당연히 미국인이겠지만 블론드모발이라든가 벽안(碧眼)이라든가 매머드를 연상케 하는 그의 덩치를 보면 북 게르만 핏줄이 아닐까 추측된다. 세차게 몰아치던 눈보라가 잦아들던 날이었다. 그동안 적막하던 기지촌이 갑자기 활기가 넘쳤다. 외박 나온 미군병사 하나가 연탄가스에 중독돼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사건으로 인해, 한 달 가까이 내려졌던 타운 금족령이 해제된 날이었다. 클럽마다 초저녁부터 미군들의 웃음소리와 취성으로 소란스러웠다. 내가 근무하는 클럽은 주로 늙다리 장교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우리 클럽도 예외 없이 개점도 하기 전부터 미군들이 밀려들어와 음악과 술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복닥거리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을 즈음 늘 그랬듯이 산 그림자 같은 실루엣이 출입문을 꽉 채웠다. 그가 온 것이다. 게르만인 같고 매머드 같은. 그는 늘 혼자였고 나를 자기 아들이라 불렀다. 그는 독점욕도 강해서 나를 독차지 하려하였다. 자기 옆에다 두고 자기와 술을 마시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만 들려 달라 하였다. 그의 계급이 높아서인지 아니면 모든 술값을 그가 책임지기 때문인지 다른 미군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라 카페 갤러리에서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 카슈미르의 봄이 열리고 있습니다. 카슈미르라면 요즘도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영토 분쟁이 있는 곳 아닙니까?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할 때, 카슈미르 지도자 하리 싱이 대부분이 이슬람교도들인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인도에 붙음으로써 분쟁이 시작되었지요. 그 동안 박 시인은 팔레스타인, 쿠르드, 인도네시아 아체 등 분쟁과 슬픔이 있는 땅을 찾아다니며 그곳에 평화와 나눔을 전해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삶을 사진에 담아 전시회도 여러 차례 열었는데, 이번에는 카슈미르를 사진에 담아오셨군요. 박 시인은 디지털이 대세인 요즘도 아날로그 사진에 시인의 감성을 담습니다. 그것도 주로 무채색의 흑백 사진으로 담아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박 시인의 무채색 아날로그 사진에서 시인의 감성을 읽어내고, 박 시인의 사진을 빛으로 쓴 시라고 부르곤 합니다. ▲ 히말라야의 눈물, 카슈미르 (사진 박노해 시인) 시인은 무굴제국의 황제 제항기르가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카슈미르가 바로 그곳이다.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땅이 인간의 욕심에 의해 슬픔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