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 송춘희 음반 표지 스님, 웬 남학생이 스님을 찾습니다. 일엽스님은 웬일인지 새벽부터 마음이 뒤숭숭하여 면벽으로 마음을 다 잡고 있었다. 행자승의 전언을 듣고 요사채를 나와 섬돌을 내려서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중학생이 하나 서 있었다. 일엽스님은 한 눈에 그 학생이 핏덩이 때 버린 자신의 아들이란 걸 알아 차렸다. 귀족풍의 자태와 이목구비가 아버지 오다 세이조를 쏙 빼닮아 있었다. 그 학생은 목멘 소리로 어머니!하고 외치며 품으로 달려들었다. 이러면 안 된다! 그리고 나를 어머니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 단 한 번이라도 어머니 품에 안겨보는 게 소원이었던 소년의 꿈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품에 안기기는커녕 잠도 절 아래 여관에서 자야했다. 비구니계의 큰 별 일엽 김원주. 그녀는 1896년 평남 용강에서 태어났다. 조실부모한 탓에 어렵사리 이화학당을 마쳤다. 졸업은 하였으나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자 친척의 중매로 스물세 살에 연희전문 교수인 이노익과 결혼하였다. 돈이 많은 이노익은 막대한 자금을 퍼부어 아내를 출판계의 꽃으로 만들었으나, 이미 마흔을 넘긴 나이와 의족을 찬 불구의 처지인지라 아내의
[한국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 몸을 받기 전에 무엇이 내 몸이며 세상에 태어난 뒤 내가 과연 누구이던가. 자라서 사람 노릇 잠깐 동안 나라고 하더니 눈 한번 감은 뒤에 내가 또한 누구이런가 천등산 봉정사 고금당 기둥에 있는 주련(柱聯)으로, 청나라 순치제가 읊은 게송 중 일부랍니다. 이 또한 산사의 주련에 나오는 주련입니다. 그런데 저는 주련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청나라 순치제가 읊은 게송 중 일부라는 글귀에 눈이 갔습니다. 아니? 청나라 황제가 이런 게송을 읊었단 말인가? 순치제라면 청나라 제3대 황제(1643~1661)인데, 어떻게 청나라 황제가 이런 게송을 읊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은 저로 하여금 순치제에 대해 찾아보게 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순치제는 6세 때 황위에 올라, 처음에는 숙부 도르곤과 누르하치의 동생 슈르하치의 6남 지르하랑이 좌우 섭정왕으로서 정무를 대리하였답니다. 그러다가 1650년 도르곤이 죽자 직접 통치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10년만인 1660년 총애하는 후궁 동악비가 죽자 정치에 뜻을 잃고 1661년 황위를 황태자 애신각라 현엽에게 물려주고 출가를 하였다는군요. 이 현엽이 바로 그 유명한 강희제입니다. ▲ 청나라 순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산사의 주련을 보면 만공의 스승 경허 스님의 일화에 대해서도 소개합니다. 책에 나오는 내용을 아래와 같이 인용해봅니다. 천장암에 모시고 있던 늙은 어머님이 생신을 맞은 날, 스님은 어머니를 위해 특별 법회를 열었다. 많은 불자들이 법문을 듣기 위해 모여든 가운데, 법상에 앉아 있던 스님이 벌떡 일어나 주장자를 한 번 힘껏 내리쳤다. 그리고 스님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 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불자들 앞에서 옷고름을 풀고 알몸을 드러냈다. 여기저기서 놀란 소리가 들렸고, 아낙들이 자리를 박차 밖으로 나갔을 것임은 자명한 이치. 놀란 것은 경허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경허가 실성을 했구나! 세상에 이런 망측한 짓을 내 앞에서 하다니! 스님은 벗었던 옷을 다시 주어 입은 뒤, 주장자를 세 번 내리치고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어머니의 젖을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빨면서 자랐고, 어머니는 나를 벌거벗겨 씻기며 귀엽다고 만지고 예쁘다고 주무르셨소. 이제 세월이 흘러 어머니는 늙고 나는 장성했으되 어머니와 자식 사이는 변함이 없음에도 어머니는 오늘 벌거벗은 내 몸을 보시고 망측하다 해괴하다 질겁하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 집 멍텅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남자들이라면 많이 들어본 노래이지요? 저도 젊었을 때 술 한 잔 걸치면 젓가락 두드리며 이 노래 부르던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이런 노래를 1930년대 말 만공스님이 상궁나인에게 법문을 행할 때 어린 행자에게 부르게 하였답니다. 절 근처 나무꾼들이 어린 행자 스님을 놀리느라 가르친 노래라고 하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노래임이 맞을 것 같습니다. ▲ 만공스님 초상화(수덕사 금선대) 실제로 상궁나인들은 이 노래를 들으며 얼굴을 붉히거나 혹은 키득거리며 쑥덕거렸다고 하니까, 그들도 같은 뜻으로 들었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만공스님이 법문을 행하면서, 그것도 상궁나인들에게 법문을 행하면서 행자 스님에게 이런 노래를 하게 했을까요? 한민이란 분이 쓴 산사의 주련이란 책을 보면 만공스님은 행자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한 후 다음과 같이 법문을 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노래 속에 만고불역의 핵심 법문이 있소. 세상의 모든 것이 법문 아닌 게 없지만 이 노래에 담긴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되어야 내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오. 마음이 깨끗하고 밝은
[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실낙원의 저자 존 밀턴은 영국문단에서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문호(文豪)로 대접을 받는다. 전 12권으로 발간된 실낙원은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하여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 따른 낙원에서의 추방, 그로 인한 끝없는 고통과 방랑, 사탄과의 사투 등을 서사시로 그리고 있다. ▲ 한대수 음반 표지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 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주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접어드는 초저녁 누워 공상에 들어 생각에도 취했소 벽의 작은 창가로 흘러드는 산뜻한 노는 아이들 소리 아 ~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 밤과 하늘과 바람 안에서 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을 추겠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그보다 한 세기쯤 먼저 살았던 토마스 모어는 혁명적 내용을 담은 역작 유토피아를 썼다.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없는, 부자도 빈자도 없는 나라. 재산은 공유제로 하고 식사도 공동으로 하며, 공통의복을 입고 공통된 주택에서 사는 평등한 나라를 그렸다. 홍길동이 건설했다는 율도국과 베낀 것처럼 닮아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당고개역에서 수락산 유원지를 가다보면 덕능고개를 넘고 다시 순화궁 넘습니다. 전에 순화궁 고개를 넘으면서 왜 고개 이름이 순화궁 고개일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순화궁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궁호로, 인사동 태화빌딩 앞에 가면 순화궁 터라는 표석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순화궁은 매국노 이완용의 손에 넘어갔다가 명월관 주인 안순환이 인수하여 태화관으로 고쳤었죠. 이 태화관에서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구요. 그런데 그 순화궁과 이 순화궁 고개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집에 돌아와 아무리 찾아보아도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더군요. 그런데 지도를 보다보니 순화궁 고개 옆에 순화군 묘가 있었습니다. 순화군이라면 선조의 6째 아들 아닙니까? 임진왜란 때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러 함경도로 갔다가 왜군의 포로가 되었던 순화군말입니다. 아무래도 제 생각에는 순화군 묘가 있어 순화군 고개라고 부르던 것이 와전되어 순화궁 고개가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애 있는 조선 선조 6번째 왕자 순화군(順和君,?~1607) 무덤 순화군은 완전 개망나니입니다. 아니 연쇄살인범입니다. 무슨 말인고
[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오전 내내 햇살이 봄볕 같았다. 강의가 빈틈을 이용하여 연못가 단풍나무 아래 자리 잡은 나는 장자끄 루소의 고백록을 꺼냈으나 못으로 떨어지는 단풍잎에 눈길이 갈 뿐 영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았다. 청룡상 꼭대기를 올려다보니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불어온 삭풍에 은행잎이 날리어 하늘은 온통 병아리가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마음이 아련해왔다. 대상도 없는 그 누군가가 그리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마지막 수업을 빼먹기로 마음을 굳히고 상경대 강의실을 기웃거렸다. 한 동네 친구 수길이를 불러내어 막걸리 내기 당구나 치러 가자며 꼬드겼다. 우리는 땅거미가 드리우기도 전에 벌써 얼굴이 벌개져서 버스에 올랐는데 많이 본 듯한 여성이 우리를 보고 웃고 있었다. 옆집 봉님이었다. 우리는 반갑다며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내려서 보니 봉님이 옆에 또 한 여성이 있었다. 봉님이가 친구라고 소개하는데 보니 탁구선수 정현숙과 많이 닮은 아가씨였다. 포장마차에 들어간 우리는 밤늦게까지 소주잔을 부딪치며 떠들다 보니 어느새 통금시간이 가까워졌다. 우리는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서 술판을 근처 여인숙으로 옮겨 새벽까지 마셨다. 먼동이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딜쿠샤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딜쿠샤는 힌두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 기쁨’ 등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딜쿠샤 얘기를 하니, 좀 의아해 하실지 모르겠는데, 저번에 서울 종로구 행촌동 1-88, 89 언덕 위에 있는 딜쿠샤라는 집을 찾아보고 왔습니다. 하하! 이렇게 말씀드리면, 행촌동에 그런 집이 있냐고 더 의아해 하실 것 같네요. 딜쿠샤는 미국인 알버트 테일러(Albert Taylor, 1875~1948)가 1923년에 지은 집으로, 화강석 기저부 위에 붉은 벽돌을 세워 쌓은 2층 주택입니다. 안내문에는 이런 건축기법을 프랑스식 쌓기라고 적어놓았는데, 하여튼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희귀한 벽돌 양식의 집이었다 할 것입니다. 1923년에 미국인이 조선 땅에 이런 희귀한 집을 지었다는 것, 게다가 집 이름이 ‘딜쿠샤’라는 힌두어 이름이라는 것이 저를 딜쿠샤로 끌어당겼습니다. 알버트는 왜 조선에 집을 지으면서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딜쿠샤는 알버트의 부인 메리 테일러가 결혼 전 인도 러크나우 지역에서 본 고성의 이름이랍니다. 메리는 ‘딜쿠샤’라는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 결혼하면 자기가 살 집의 이름을
[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 에디뜨 피아프 사랑의 찬가 음반 표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 해도 당신 한 사랑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아요 매일 아침 사랑이 넘쳐흐르고 내 몸이 당신 품에서 떨고 있는 한 세상 모든 건 아랑곳없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세상 끝에라도 가겠어요 검은머리를 금발로 바꾸겠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밤하늘의 달도 따러 가겠어요 보석을 훔쳐 오라해도 하겠어요 조국도 친구도 버리겠어요 그러다 어느 날 운명의 신이 당신을 데려가 우리를 갈라놓아도 당신 사랑만 있다면 상관없어요 나 또한 당신을 따라갈 테니까 - 에디뜨 피아프 사랑의 찬가 가운데 보고 싶어요. 빨리 와줘요. 배는 너무 느려요. 비행기로 오세요. 이 전화통화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인 사이의 마지막 대화였다. 1947년 에디뜨 피아프는 미국공연 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마르셀 세르당이라는 권투선수를 만났다. 마르셀은 미들급 세계챔피언으로 방어전을 위해 뉴욕에 왔다가 에디뜨를 만나 운명적 사랑을 하게 된다. 둘은 첫눈에 반해 불같은 사랑을 나누었으나 마르셀은 이미 아이 셋을 둔 기혼자였다. 그는 에디뜨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를 설득하려고 알제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지난번에 차일혁 총경 얘기를 하였지요? 차일혁 총경 이야기를 하다 보니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생각납니다.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 두류봉으로 내려가다 왼쪽 지능선을 타고 내려간 산자락에 있는 벽송사 뒷산 선녀굴에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은거하였었죠. 정순덕은 다른 빨치산 대원 이은조, 이홍이와 이 굴에 은신하다가 1962년 2월 발각되어 도주합니다. 그러나 고향인 인근 산청군 내원골로 피신하였다가 결국 1963월 11월에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습니다. 나중에 총상을 입은 다리는 잘라냈고요. 잘 모르는 사람들은 최후의 빨치산이 1950년대도 아닌 1963월 11일에까지 있었다는 것과 그것도 최후의 빨치산이 여자라는 것에 놀라실 것입니다. 사실 정순덕은 처음부터 빨치산은 아니었습니다. 산으로 들어간 남편을 찾아내라는 토벌대의 고문에 못 이겨 남편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남편도 죽고 대부분의 빨치산이 사살되면서 최후의 빨치산이 된 것이지요. 정순덕은 자신이 산으로 들어가게 된 동기를 이렇게 얘기하지요. 고문이 한두 번으로 끝났던 게 아니야.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아내라며 참나무 몽둥이로 무차별 타격을 가하는데 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