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 황규현 애원 음반표지 목이 메어 불러보는 내 마음을 아시나요 사랑했던 내님은 철새 따라 가버렸네 허무한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소리 그대는 아나요 무정한 내 사랑아 몸부림 쳐봐도 재회의 기약 없이 가버린 그님을 소리쳐 불러본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소식이나 전해다오 얼마 전 40년 만에 동두천을 다녀왔다.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옛 모습을 잃은 건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지만, 그나마 변하지 않고 있는 개울과 역 광장을 토대로 옛 모습을 그려 보았다. 미군 제2사단이 있던 자리며 개천을 따라 늘어선 기지촌자리, 자취방이 있던 생연리. 본토음악 배우겠다고 전국의 기지촌을 떠돌던 시절, 동두천읍 보산리는 기지촌의 대명사이자 8군무대의 대명사였다. 오늘은 기지촌과 8군무대를 회상하며 얘기꽃을 피워본다. 일반적으로 기지촌에 있는 클럽과 8군무대를 같은 존재로 보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 둘 사이엔 엄연히 경계가 있다. 8군무대는 부대에 부속된 클럽을 지칭하는 용어로 장교들이 출입하는 officers 클럽, 하사관들을 위한 NCO 클럽, 사병들이 이용하는 EM클럽이 있었다. 8군무대에 서기 위해선 미
▲ 인간에 대한 예우가 끔찍했고, 예술을 사랑했던 차일혁 총경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기자] 저번에 차일혁 총경에 대한 글을 기고했는데, 차일혁 총경이라는 분을 전혀 몰랐던 분들에게는 그 시대에 그런 분이 있었나 하는 놀라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당시 시대 상황에 어떻게 빨치산 대장의 장례를 치러줄 수 있었느냐 하는 놀라움이 컸을 것입니다. 사실 차대장이 처음부터 장례를 치러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차대장이 사살 보고를 하니 경찰 간부가 이현상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여주기 위해 서울로 보냅니다. 우리 사회에 꼭 이렇게 과잉 충성하는 사람들 있죠? 그런데 이대통령이 보기 싫다고 거절하여 창경원에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가 시신은 다시 돌아왔는데 이현상의 친척들도 시신 인수를 거부하였답니다. 그리하여 차대장은 토벌을 함께 한 정인주 총경과 상의하여 정중히 화장해주기로 한 것이죠. 왜 있지 않습니까? 역사를 보면 치열하게 싸우다가 상대방 적장을 죽였을 때 적장으로서 예우를 갖춰 장사지내는 얘기 말입니다. 차대장도 서로 한판 겨루었던 상대로서 정중히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적장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이후 정인주 총경은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이른 아침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 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이나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다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 ▲ 6.25 전쟁 중 구례 화엄사 소각을 면하게 한 차일혁 총경. 그는 진정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들은 왜 죽었는지 영문도 모른다고 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 싸움에서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여 벌어진 부질없는 골육상쟁 동족상잔이었다고 위의 글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한 토벌대 대장 차일혁 총경이 전북일보에 기고하였던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하며라는 글입니다. 남북의 이데올로기 대결이 극한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당시 남쪽의 토벌대 대장이 이런 글을 썼다는 것에 좀 의아하게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차대장은 한민족이 이데올로기에 찢겨 서로 죽고 죽이는 것에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이현상을 사살하고도 차대장은 이현상의 시신을 적장에 대한 예를 갖추어 섬진강 다리 밑 하동 송림 주변 백사
[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 도리스데이 Que sera sera 음반 표지 내가 아주 어릴 때 어머니께 물었어요. 난 커서 뭐가 될까요? 예뻐질까요? 부자가 될까요? 어머니는 말했지요. 무엇이건 되겠지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께 물었어요 뭘 하게 될까요? 그림을 그릴까요? 노래를 할까요? 선생님은 대답하셨지요 무엇이건 되겠지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내가 자라서 사랑에 빠졌을 때 그이에게 물었어요 우리 앞에 무엇이 있을까? 날마다 무지개가 있을까? 그이는 말했지요 무엇이건 되겠지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Que sera sera 가운데 들판은 연노랑 물감이 칠해지고 있었다. 백설보다도 하얀 뭉게구름들이 쪽빛바다를 떠다니고, 해바라기 꽃은 활짝 벌어져 가냘프게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논 위를 낮게 나는 참새 떼들은 아이들 함성에 뿔뿔이 흩어지고, 나는 그 어느 한 장면도 놓치기 싫어 눈(眼)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니는 메뚜기 안 잡고 뭐 하나? 급우의 채근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두들 메뚜기가 가득한 병을 하나 씩 들고 있었다. 오전 수업을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回想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탕 안에 자지러지노나!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노래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노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위 시는 1922년 3월 《신생활》이라는 잡지에 실렸던 수주 변영로 선생의 시 봄비입니다. 화곡로를 따라 서울시를 막 벗어나면 고강지하차도가 있는 삼거리에 수주 변영로 선생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저는 부모님 댁에 갈 때마다 이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는데, 매번 좌회전하면서 수주 선생을 쳐다만보고 가다가 어느 날은 수주 선생을 뵈기 위해 차를 세웠습니다. ▲ 부천시 고
[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푸른 물결 춤추고 갈매기 떼 넘나들던 곳 내고향집 오막살이가 황혼 빛에 물들어 간다 어머님은 된장국 끓여 밥상위에 올려놓고 고기 잡는 아버지를 밤새워 기다리신다 그리워라 그리워라 푸른 물결 춤추는 그곳 아--저 멀리서 어머님이 나를 부른다 ▲ 박양숙 어부의 노래 수록 음반 표지 새벽녘에 비가 그치기에 서둘러 묵호등대로 향했다. 걸어서 등대에 오르려면 논골담길을 지나가야 하는데 사실 나는 언덕위에 우뚝 선 등대에서 동해바다의 광활함을 바라본다거나 동해시 전경을 감상하는 일보다 이 길을 더 사랑한다.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경사지에다 마추피추유적처럼 집터를 닦고, 한 뼘의 땅도 금싸라기보다 귀히 여기며 삶을 가꾸어온 뱃사람들의 내음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길. 1940년대부터 오징어 따라 명태 따라 흘러온 사람들이 하나둘 이 언덕에다 집을 짓기 시작 한 게 논골 마을의 기원이라 한다. 그들의 고단한 삶이야 어찌 글로 다 표현 될 수 있겠는가. 아랫마을에서 물을 지고 올라가면 이리저리 새고 흘러서 반통밖엔 남지 않았다한다. 리어카도 다닐 수 없는 좁고 가파른 길이기에 명태를 지게에 지고 꼭대기에 있는 덕장으로 날랐다 한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전에 안산을 오른 적이 있는데, 그 때 안산에 오르기 전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잠시 들렀습니다. 안산이라고 하면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연세대 뒷산이라면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바로 이 산 반대편 자락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있는 것이죠. 하긴 이날 같이 등산하는 분들 중 대부분이 안산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독립문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가니 바로 앞에는 서재필 박사 동상이 있습니다. 서재필 박사가 이끄는 독립협회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영은문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세웠기에 당연히 이곳에 서재필 박사 동상이 있겠죠. 이번에 독립문을 자세히 보니 독립문 앞에 두 개의 큰 초석이 있습니다. 무얼까 하고 보니 헐어버린 영은문의 주초(柱礎)이더군요. 여태 무심코 지나쳐서인지 독립문 앞에 영은문의 주초가 있는 줄은 모르고 지냈습니다. ▲ 사적 제32호 서울 독립문(문화재청 제공) 또 그 옆에 독립관이 있어, 어? 독립문 세울 때 그 옆에 독립관도 세웠었나? 하며 보니, 영은문 옆에 있던 모화관인데, 서재필 박사는 영은문은 헐면서도 모화관은 그대로 두고 독립관으로 이름만 바꿔 사용하였네요. 독립관은 일제강점기 때
[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 존 레논(JohnLennon)의 Imagine 음반 표지 천국이 없다고 생각해 봐요 어렵지 않아요 우리 발밑에는 지옥이 없고 위에는 창공만 있겠죠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해 봐요 어렵지 않아요 나라가 없다고 생각해 봐요 죽일 일도 죽일 필요도 없어요 종교가 없다고 생각해 봐요 모든 사람들이 평화 속에서 살아가겠죠 나를 몽상가라할지 몰라도 나만 그런 건 아니에요 당신도 우리와 함께해요 세계는 하나가 될테니까 재물이 없다고 생각해 봐요 탐욕도 굶주림도 없겠죠 오직 인류애만 있고 세계는 하나가 될테니까 -JohnLennon Imagine 가운데 태국의 어느 난민 수용소.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린 조국 캄보디아를 탈출한 디스 프란과 그의 미국인 친구 시드니 쉔버그가 감격의 포옹을 한다. 그때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존 레논의 목소리가 영혼을 울리며 영화 킬링필드는 159분의 종장을 맞는다. 롤랑 조페 감독의 1985년 작 킬링필드는 전쟁과 이념이라는 미명으로 자행되는 집단학살과 인권 유린, 그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최소한의 가치마저 짓밟히는 참상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화제작이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 있는 한글로 쓰인 비석중 가장 오래된 비석을 보러 갔습니다. 이 비석은 1536년(중종 31)에 이문건이 자기 아버지 이윤탁과 어머니 고령 신씨의 묘를 합장하면서 묘 앞에 세운 비석으로 문화재 이름은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한글靈碑)입니다. 원래 이 앞에는 고령 신씨의 묘만 있었고 이윤탁의 묘는 태릉 자리에 있었는데, 이윤탁의 묘를 이리로 합장하면서 아들 이문건이 영비(靈碑)라는 제목으로 비석을 세우면서 여기에 한문과 함께 한글도 새긴 것이랍니다. 조선 시대 묘비에 한글이 새겨져 있는 것은 이 비석이 유일하다는데, 그럼 이문건은 왜 여기에 한글을 새겼을까요? 한글 비문을 현대어로 하면 이렇습니다. 신령한 비다. 쓰러뜨리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이를 한문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이제 짐작이 가시겠지요? 이문건은 한문을 모르는 상놈들이 묘를 훼손시킬까봐 이를 경고하기 위하여 이 한글 비석을 세운 것입니다. ▲ 서울 노원구에 있는 가장 오래된 한글비석 이윤탁 한글영비(한글靈碑)(문화재청)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예전에는 비만 있었는데 지금 한글고비는 비각 안에 곱게 모셔져 있고, 또 예전보다 더
[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도회지의 거리를 걷다보면 행인들의 매무새가 참으로 다양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옷의 모양이나 빛깔도 그러하거니와 머리모양이나 색깔도 옷의 그것에 뒤지지 않을 만큼 각양각색이다. 다양, 다변화된 세상을 살아가는 요즘 청년들은 어떤 형의 여성을 선망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소위 70, 80세대들은 갸름한 얼굴에 긴 머리가 찰랑대는 여성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남성들은 관능미보다 청순미를 선호했다. 일단 머리카락이 길면 겉보기에는 청순해 보인다. 사실 인류역사에서, 특히 우리 민족에 있어서 단발의 역사는 매우 일천하다. 남성의 경우에는 고종 32년인 1895년에 일제의 강압에 의한 단발령으로 그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여성들에게는 강제성이 없었기에 1922년에 가서야 모발 현대화가 이루어진다. 한남권번 기생이었던 강향란이 그 효시이다. 하지만 강향란의 단발은 굳은 의지의 표현일 뿐 미용 목적은 아니었다. 강향란의 단발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해져 온다. ▲ 1926년 10월 8일 동아일보에 나온 강향란 사진 그녀는 1900년 대구에서 강석자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열네 살에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 기생수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