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서울 강북에 초안산(楚安山)이라는 해발 114.1m의 야산이 있는데, 녹천역 뒷산이 바로 초안산입니다. 전에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창작스튜디오를 갔을 때 바로 근처에 초안산이 있어서 올라가보았습니다. 왠 무덤들이 그리 많은지... 요즈음 형성된 공동묘지가 아니라 조선 시대의 공동묘지입니다. ▲ 내시들의 공동묘지가 있는 초안산(楚安山) 왜 여기에 조선시대 공동묘지가 있을까요? 조선시대 경국대전이나 속대전에는 한양에서 십리(4.7km) 이내에는 무덤을 쓰지 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 서울의 4소문 가운데 광희문은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고 하여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불렀지 않습니까? 이 문으로 나간 시체가 10리를 바로 벗어난 곳에서 편히 쉴 곳으로 최적지가 바로 초안산이었습니다. 도봉산, 북한산 일대도 자격 요건에는 해당되지만, 이 산들은 산세도 험하고 돌산이라 묏자리로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였지요. 더군다나 풍수지리로도 초안산이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안 이씨 문중에서도 초안산에 묘역을 써서 제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군요. 그런데 초안산에 입주한 망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내시입니다. 내시들은 동류의식이 있어 죽어
[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창틀이 오려낸 네모난 하늘이 빨래줄 위에 펼쳐지던 구월이었다. 때 이른 낙엽 하나가 대숲을 훑고 나온 바람에 얹혀 뫼비우스 띠를 그리며 섬돌위에 살며시 내려앉던 가을의 첫날이었다. 액자 속 그림 보듯 창밖의 풍경들을 감상하던 나는 남천가절(藍天佳節)이로구나. 단 한마디를 신음처럼 내뱉으며 일어나 무언가를 뒤지기 시작하였다. 벽장으로 골방으로 다시 다락으로 여기저기 틈 있는 곳마다 끼워 넣은 LP판 무더기 속에서 오래된 음반 한 장을 찾아내 먼지를 닦아내고 턴테이블 위에 올렸다. 지지직 구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꽃잎이 지는 소리 꽃잎이 피는 소리 노래는 몇 소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마음이 아려왔다. 눈시울은 빨개지고 온몸이 촛농처럼 녹아 내렸다. 턴테이블이 돌아갈수록 음반에 새겨진 지난 한 해 세월, 고난의 삼백예순날 하루하루가 전축바늘 끝에서 되살아났다. ▲ 패티김 구월의 노래가 수록된 음반 집안이 몰락하였다는 기별을 듣고 끝내 못다 털어낸 번뇌 조각들을 책갈피에 주섬주섬 끼워 넣은 채 산문을 나서던 날, 범종 소리는 왜 그리도 골짜기를 오래 맴돌던지. 저자거리로 돌아와 뒤늦게나마 가장의 책무를 다해 보겠노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신항서원에 배향된 또 다른 인물에 충암 김정(1486-1521) 선생이 있습니다. 충암은 제주 오현단의 시초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즉 1578년(선조 11) 판관 조인후가 충암 김정 선생을 모시는 충암묘를 제주시에 지은 것이 시초가 되어 1682년(숙종 8) 귤림서원으로 사액(賜額)을 받고, 1695년(숙종 21) 송시열 선생이 여기에 배향됨으로써 5현단이 된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제주 오현단의 다섯 현인중 3명(송인수, 김정, 송시열)이 청주 지역 사람이네요. 참 제주의 명문고등학교 오현고등학교의 이름이 바로 이 오현단에서 유래된 것은 제주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충암은 중종 때 조광조를 도와 훈구파의 척결에 앞장섰는데, 그렇기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와 함께 척결 대상에 올랐지요. 다행히 영의정 정굉필의 옹호로 죽음만은 면하고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되었습니다. ▲ 대전 동구 신하동에 있는 충암 김정 무덤 옆의 사당. 사당에는 부인 송 씨의 부인의 정려각이 있다.(문화재청 제공) 진도 벽파진에 있는 정자 벽파정의 현판에는 충암의 시 벽파를 떠나며(渡碧波口號)가 걸려있답니다.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청주 표충사에 들렀을 때, 표충사를 물러나와 신항서원도 들렀습니다. 신항서원은 1570년(선조 3)에 유정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청주지역의 첫 번째 사원으로 건립되었고, 1660년(현종 10)에 신항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습니다. 신항서원에는 송인수, 박훈, 경연 등 15-17세기 청주 지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이 배향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곳에도 당쟁의 바람이 불어오면서 청주 지역의 유림들을 둘로 갈라놓았습니다. 이런 분쟁의 씨앗을 심은 것이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입니다. 송시열은 신항서원에 율곡 이이를 추가로 배향하면서 배향 순서를 기존에 배향된 청주 출신 성리학자들을 제치고 이이를 맨 앞으로 하였습니다. ▲ 송인수, 박훈, 경연 등 15-17세기 청주 지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을 배향한 신항서원(문화재청 제공) 더욱이 송시열이 화양동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신항서원은 노론이 주도하는 서원으로 자리 잡게 되어, 신항서원 운영에서 소외된 소론과 남인이 불만을 갖게 되었죠. 이후 청주지역에서는 자파의 세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자파의 서원을 추가 건립하는 등으로 14개의 서원이 난립하였다는군요. 이런 것도 한 원인이 되어 이인좌의 난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전에 재판 때문에 청주지방법원에 갔을 때에, 재판을 끝내고 우암산 밑의 표충사(表忠祠)에 들러보았습니다. 표충사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충신을 배향하는 사당입니다. 표충사는 바로 이인좌가 난을 일으켜 청주읍성으로 쳐들어갔을 때 반란군에 의해 죽은 충청병사 이봉상과 비장(裨將) 홍림, 영장(營將) 남연년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지요. 충청병사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의 현손(玄孫)입니다. 원래는 3충사라고 했다가, 1736년에 표충사로 사액 받은 것이라고 하네요. ▲ 충청북도 기념물 제17호 청주 표충사 (淸州 表忠祠), 문화재청 제공 그런데 표충사에서 제 눈길을 끈 것은 위 3명의 충신들 보다는 기생 해월입니다. 일개 기생이 표충사에 함께 있다니 이상하지요? 해월은 비장 홍림의 애인으로 해월의 열녀문이 여기에 있습니다. 기생과 열녀라. 이것도 뭐가 잘 안 맞는 조합 같은데, 실은 비장 홍림이 살해당하자 해월이 홍림의 뒤를 따라 자결을 하였기에 열녀문을 세워준 것입니다. 곧바로 자결한 것은 아닙니다. 홍림이 살해당할 때 이미 뱃속에 홍림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기에, 아이를 낳아 7살까지 키우다가 자결한 것입니다.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에는 효촌리(孝村里)라는마을이 있습니다.마을 이름에서 금방 이 동네에서 효자가 낫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그 효자는 바로 신항서원에도 배향되어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경연(慶延)입니다. ▲ 청원군 남일면 효촌리 경연 효비각 경연은 아버지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을 때 엄동설한에 연못의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드렸고, 또 눈 덮인 산 속에 시루를 엎어놓고 고사를 드려 고사리를 돋아나게 하여 이를 요리하여 아버지에게 드렸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 묘 옆에 여막을 짓고 무려 6년 동안이나 시묘 생활을 하였구요. 이런 효행을 들은 성종이 경연을 불러 사재감(司宰鑑, 조선시대 궁중의 어류・육류・소금・땔나무・횃불 따위 일을 맡아보는 관청) 주부를 내리고, 이후 이산 현감의 벼슬도 주었습니다. 그보다 한참 뒤 숙종은 경연의 효행을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효촌리에 효자비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청주에서 문의 가는 큰길가에 그 효자비가 비각 안에서 비를 피하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지요. 경연은 자신만 효자였을 뿐 아니라 인근
[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고추잠자리가 늦여름 하늘가에 표산(飄散) 하던 날 헌릉 근처 호젓한 사행(蛇行)길을 빨간 승용차 한 대가 물방개 헤엄치듯 느리게 기어가고 있었다. 차 안에는 친구사이인 청년 둘이 타고 있었고 때마침 서쪽하늘에 걸린 새털노을은 두 사람의 얼굴을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마음은 시(詩)를 닮고 시심은 가을로 향하고 바람은 이미 여름을 떠나가고 둘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렇게 한참동안 가을맞이를 하다가 운전대를 잡고 있던 이동원이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명함만 하게 접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모 여성지에 실린 시 한편이었다. 한 줄 한 줄 시를 읽어 내려가던 차종태(딕 훼밀리 보컬) 눈에는 어느새 붉은 노을이 녹아 뺨을 타고 흘렀다. 이동원은 대모산 기슭의 어느 허름한 대폿집에 차를 세웠다. 양은주전자를 사이에 놓고 마주앉은 두 사람 사이엔 또 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나뭇잎들이 다가올 갈색 세상에 대하여 소곤거리는 소리를 안주삼아 막걸리 몇 사발로 목을 축인 차종태가 먼저 침묵의 장막을 열어젖혔다. 동원아, 이 시는 네 노래다. (최)종혁이 형에게 곡을 맡기자. 편곡은? (신)병하 형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
[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앵두 알 만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악수를 마친 교육대장이 한 발짝 옮겨서라는 손짓을 보냈는데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태어난 이래 가장 힘든 일주일이었다. 차라리 논산에서 한 달 더 훈련받는 게 낫지 수경사 보충교육은 정말 못 받겠다고 아우성들 쳤지만, 막상 퇴소식을 마치고 나니 그간의 고생은 간데없고 우리 모두의 흰 눈자위는 빨갛게 봉숭아 물감이 들어 있었다. 퇴소 후 우리 동기들은 각 예하부대로 뿔뿔이 흩어지고 서너 명만이 나와 동행했다. 우리가 당도한 곳은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사령부였다. 나는 그 곳에서 평생 기억에 남을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된다. 근무할 처부가 정해지고 겨우 부대 내 건물의 위치를 알아갈 즈음 내가 DJ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처부에서 처부로 번져 나갔다. 나를 예쁜 아가씨라 생각하고 한 번 읊어봐. 이 하느님께서 졸리시는데 잠 쫓는 멘트를 시작한다. 실시! 말년 병장들은 훈련과 근무에서 열외 되어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아주 좋은 소일거리였다. 너 연애편지도 잘 쓰지? 일과 끝나고 나를 알현한다. 알겠나? 나는 대장보다도 높다는 자칭 오성장군의 명을 받들어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도미부인 이야기를 하다보니 개로왕이 백성의 아내를 강탈하기 위하여 참 못된 짓을 많이 한 임금으로 생각되네요.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구려가 백제를 치기 위하여 고구려 첩자가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당시 고구려왕은 남진정책을 펼치는 장수왕이었는데, 장수왕의 남진정책에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평양성 근처까지 쳐들어와 증조할아버지 고국원왕을 죽인 원한을 갚겠다는 것도 많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장수왕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고 바둑을 잘 두는 도림이라는 스님을 첩자로 파견합니다. 개로왕은 도림의 바둑 실력에 반하여 도림을 상객(上客)으로 삼아 도림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요. 개로왕의 신임을 얻은 도림은 대궐이 너무 좁다, 제방을 제대로 쌓아야 한다는 등으로 개로왕에게 큰 토목공사를 부추깁니다. 가뜩이나 재정이 빈약한 백제는 이러한 토목공사로 나라 곳간이 비고, 백성들도 생활이 어려워져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 검단산에서 내려다본 한강 장수왕은 드디어 때는 왔다 생각하고 백제를 침공하여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이지요. 이로서 한성 백제는 망한 것입니다. 개로왕은 자신의 잘못으로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전에 고교동창들과 팔당대교 쪽의 안창모루에서 검단산을 올랐습니다. 안창모루 바로 옆 마을은 바깥창모루입니다. 마을 이름이 특이하죠? 창모루는 창고 모퉁이 나루의 준말이라고 합니다. 옛날 세미(稅米)를 하역하여 보관하던 창고가 이 근처에 있었기에 생긴 땅이름이지요. 검단산 근처에 이런 재미있는 지명이 또 있습니다. 팔당댐 근처의 검단산 밑 마을 이름이 배알미동입니다. 관리가 낙향하거나 귀양 갈 때 여기서 임금이 계신 한양을 향해 마지막으로 배알(拜謁)하였다 하여 생겨난 지명이랍니다. 검단산을 오르다 잠시 쉬면서 한강 건너 예봉산과 예빈산, 적갑산을 바라다보고, 발밑으로 한강이 흘러가는 것도 내려다봅니다. 팔당대교에서 팔당댐 쪽으로 조금 오른 곳은 예전에 도미나루가 있었던 곳입니다. 오늘은 도미나루에 얽힌 이야기를 해보지요. 도미나루라는 이름은 도미부인이 이곳에서 개로왕의 추격을 피해 배를 탔다고 하여 도미나루라고 부른답니다. 도미부인! 많이 들어보셨지요? ▲ 검단산에서 한강을 내려다 본 전경 백제 개로왕 시절에 아름답고 행실이 곧은 도미부인에 대한 소문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개로왕은 도미를 불러 네 부인이 아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