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전에 대학로에 있는 아르코 미술관에 갔을 때, 미술관 앞 마로니에 공원에 한 잘 생긴 남자의 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바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던 김상옥 열사(1890. 1. 5. - 1923. 1. 22.)의 동상이었습니다. 동상 옆 안내문을 보니 김열사는 1923년 1월 22일 1천여 명의 일본 경찰과 접전하다가 최후의 한 발로 자결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김 열사가 발을 딛고 선 대리석에는 김 열사가 거사를 위해 상해를 떠나기 전 동지들에게 마지막 남긴 말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고.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그동안 김상옥 열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는 정도만 알고 있던 저는 이런 내용을 보고 부끄러워 집에 와서 김상옥 열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김 열사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14세부터 낮에는 철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하였더군요. 김 열사의 어머니 김점순 여사는 공부하고픈 아들의 소망을 들어주지 못한 것을 못내 가슴 아파합니다. ▲ 순국한 김상옥의사 부인과 어머니 김점순여사의 한식 성
[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국토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었다고 떠들썩할 때니까 1970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 식구는 서울 변두리 어느 달동네에 살고 있었다. 강원도 산골에서 올라간 빈농가정이 수도 서울에 발붙일 곳은 그런 판자촌밖엔 없었다. 전력사정이 나빠 걸핏하면 정전이 되어 자주 남포등을 켜야 하는 동네였다. 상수도 혜택은 더욱 알량하여 물지게로 산 아래 동네에 있는 공동수도에서 길어 와야만 했다. 갈수기엔 그나마도 공급이 끊겨 산등성이 너머에 있는 절(寺)이나 계곡으로 물을 찾아 헤매야 하는,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버텨야만 하는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비록 봉지쌀을 사다먹고 새끼줄에 꿴 낱장연탄을 사다 땔지언정 이웃 간의 인정만큼은 넘쳐흘렀다. 굶고 있는 집이 있으면 부족하나마 나누어 먹었고 이웃의 아픔도 내 것 인양 여기며 살았다. 나는 거기서 나를 평생 음악인으로 살게 해줄 한 사람을 만난다. 그는 나보다 대엿 살 위인 동네에서 하나 있는 대학생 이었다. 반딧불이 같은 별들이 하나 둘 하늘가에 날아들 때면 그는 늘 노란색 페인트가 칠해진 황금성교회로 나를 데리고 갔다. 산꼭대기에 자리한 교회마당에서 내려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가끔 독립운동사를 읽다보면 학교에서 국사를 배울 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훌륭한 인물을 알게 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드리려는 최재형 선생도 그런 분입니다. 최재형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암살을 뒤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분입니다. 안의사는 이등박문을 암살하기 전에 연해주에서 활동하면서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하여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의병을 조직하고 무기를 지원하고 자금을 댄 분이 최재형입니다. ▲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국가보훈처 제공) 1907년 왜놈들이 우리나라 군대를 강제해산 하고 난 후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의병들 가운데 많은 의병들이 왜놈들의 탄압을 피해 두만강을 건넜는데, 이런 의병들을 불러 모은 분이 최재형 선생이지요. 그런 자금력이 있었기에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질 때 임정에서는 최재형을 재무총장에 임명하기도 했었구요. 그럼 최재형이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 많은 재산을 모았을까요? 사실 최재형은 함경도 출신으로 노비의 아들이었습니다. 최재형은 1860년대 심한 기근으로 아버지를 따라 연해주로 건너가지요. 그러나 연해주로
▲ 《신흥무관학교》, 안천, 교육과학사, 1996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지난 6. 29. 안중근 기념관에서 열린 듀오 아임의 인문학 K 팝페라 갈라 콘서트에 갔을 때 안중근 기념관의 이혜균 부장으로부터 안천 서울교육대학 교수가 쓴 책 3권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 중 《신흥무관학교》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적혀 있더군요. 책의 제목은 신흥무관학교이지만 책은 신흥무관학교에 대해서만 쓴 것이 아니라, 안중근 의사와 그의 동생 안명근 의사의 활약,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선생의 활약, 청산리 전투의 숨은 주인공 서일, 김광서 투사 등에 대해서도 썼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제 눈길을 끝 것이 뮈텔 주교의 일기장입니다. 뮈텔 주교는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1890년 8월 4일부터 죽은 1933년 1월 14일까지 일기를 썼습니다. 이 일기장에서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던 사실이 드러났고, 안 교수는 이를 근거로 천주교의 반민족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도로 마지막 사형 집행 전에도 빌렘 신부로부터 미사를 집전 받지 았았습니까? 안 의사가 천주교를 믿게 된 것은 아버지 안태훈 진
[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가마솥처럼 달아오른 대지는 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먼지 냄새가 풍겨왔다. 벌써 보름 넘게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뜨거운 코피가 인중을 타고 흐르듯 아침부터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역사 천장에 매달린 바람개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정도면 사람들과 눈빛 마주치는 것조차도 짜증이 나겠지만 그날 용산역에서 경포대행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짜증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들 활기차게 떠들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지난 열흘간 바캉스비용 마련을 위해 막노동판에서 땀방울 깨나 흘린 우리 삼총사도 그 틈에 끼어 있었다. 우리를 태운 완행열차는 영주를 돌아서 하오가 돼서야 경포대역에 도착하였다. 망상과 정동진, 안인진으로 이어지는 해안철도도 절경이지만 솔밭으로 둘러싸인 경포대역은 그 가운데 백미 중의 백미요 압권이었다. 우리가 기차에서 내렸을 때 경포백사장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때마침 미스터 경포선발대회 결선이 진행되고 있어 그 열기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우린 번잡함을 피해 순개울이라는 한적한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밤늦게까지 기타를 치며 한여름 밤의 낭만을 만끽하다 잠이 들었다. 한참
▲ 《병자호란》, 한명기, 푸른역사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한명기 교수가 쓴 《병자호란》을 읽었습니다. 한 교수는 병자호란 발생 전부터 후까지 역사적 사실을 꼼꼼하게 파헤쳐 1권으로도 부족하여 2권으로 책을 냈네요. 책을 읽으면서 인조정권의 무능함에 혀를 차고, 쓸 데 없는 명분에만 사로잡혀 전쟁을 자초하더니, 전쟁이 발발하자 백성의 안전은 생각함이 없이 자기들만 내빼는 비겁함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강화도를 책임진 검찰사 김경징에 대한 글을 읽을 때에는 세월호 선장이 승객들의 생명은 아랑곳없이 자기만 살겠다고 내빼던 생각과 겹쳐 잠시 책을 덮고 분을 삭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병자호란》을 읽으면서 얘기하고 싶은 많은 부분이 많지만, 김경징에 대해서만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김경징의 멸공봉사입니다. 한 교수가 얼마나 한심했으면 제목을 이렇게 붙였겠습니까? 청군이 남진하자 인조는 며느리 강빈과 봉림대군 등 왕실의 피붙이들과 조정 대신들 가운데 늙고 병든 사람들로 하여금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먼저 강화도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인조도 강화도로 들어가려고 하였지만, 청군의 남진 속도가 예상보다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마포구 합정동에 가면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이 있습니다. 구한말 선교의 푸른 꿈을 안고 낯설고 물 설은 동양의 한 작은 나라에 와 기독교 선교를 위해 청춘을 바치다가, 이역의 땅에 몸을 묻은 외국인 선교사들을 위한 묘원이지요. 얼마 전에 그 선교사 묘원을 돌아보면서, 많은 푸른 눈의 선교사들이 조선을 위해 자기 피와 땀을 바친 것을 보며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그중에서도 당시 최하위 계층이었던 백정에게도 차별 없는 사랑을 베푼 사무엘 무어(Samuel Forman, Moore, 한국명 모삼열, )에 대해서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 백정도 사랑한 사무엘 무어(Samuel F.Moore, 1860~1906) 선교사 미국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한 사무엘은 1892년 32살의 나이로 조선 땅을 밟습니다. 그리고 헌신적인 전도로 지금 소공동 롯데호텔이 들어선 자리에 곤당골 교회를 세우고, 학교도 엽니다. 이 학교 학생 중에 백정 박씨의 아들 봉출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무엘 선교사는 봉출에게서 아버지가 장티푸스로 다 죽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박 씨를 문병한 사무엘 선교사는 의료 선교사로 고종의 주치의를 맡고 있던 에비
▲ 《북유시집(北遊詩集)》을 쓴 세심당 백홍인 선생(1874~1952)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중학 동창 백승천으로부터 시집을 하나 받았습니다. 자신의 할아버지 세심당 백홍인 선생(1874~1952)이 쓰신 한시 원문과 번역시가 실린 시집입니다. 북유시(北遊詩)라고 하니까, 세심당 선생이 북쪽 지방을 유람하며 쓴 시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세심당 선생은 의분을 참지 못하고 항일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하고는, 경고서사(警告書社)를 써서 친지, 문하생들과 호남 각 군의 서사에 돌리며, 의거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승 최익현 선생을 뵙고 자신의 뜻을 밝히고자 1905. 11. 23. 고향 보성에서 길을 떠나 장흥, 곡성, 남원, 전주, 충주, 옥천, 공주, 청양 등의 유림과 친지를 순방하고, 면암 선생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는 1905. 12. 30. 귀향합니다. 북유시는 이 순례 기간 동안 쓴 220여 편의 시로, 세심당 선생은 집으로 돌아와 그 동안 쓴 시를 정리, 편집하여 1906. 1. 12. 북유시집을 만듭니다. 그 동안 북유시집은 한시집으로만 남아있어 일반인들의 열람이 어렵다가, 1986년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북한산 둘레길 1구간부터 4구간까지에는 애국지사들의 묘소가 많습니다. 1구간 소나무 숲길에는 손병희 선생의 묘소가 있습니다. 2구간 순례길에는 심산 김창숙,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 등 애국열사 12분의 묘소가 있고, 또한 동방석, 김유신 등 광복군 18분이 한 묘소에 같이 잠들어 있네요. 뿐만 아니라 순례길을 가면서는 4・19 국립민주묘지도 만나볼 수 있군요. 그리고 2구간이 끝나고 3구간이 시작되는 곳에는 이준 열사의 묘가 있습니다. 이 묘소들 중에는 아무래도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의 묘소가 제일 잘 단장되어 있고, 그 다음에는 우리에게 제일 많이 알려진 이준 열사의 묘가 잘 꾸며져 있습니다. ▲ 참 선비 심산 김창숙 선생 이분들 중에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1879~1962)에 대해 얘기해보려 합니다. 김창숙 하면 탤런트 김창숙씨를 먼저 떠올릴 분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서 김창숙을 검색하여도 탤런트 김창숙씨가 먼저 나오데요. 심산 김창숙 선생, 선생은 진짜 선비이셨지요. 단순히 옛것만 지키려는 보수적인 유학자가 아니라 새것도 받아들이려는 열린 유학자이셨습니다. 아마 조선이
▲ 김정호 지난 겨울엔 음반 표지 [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음악 칼럼리스트] 전설인줄 알았다. 픽션 같기도 하고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으로 오버랩 되기도 했다. 그날의 하늘은 예리한 칼날에 베여 벌어진 쌀부대처럼 이팝꽃 송이가 마구 쏟아져 내렸다. 태엽이 조여졌다. 시간도 서둘러 집으로 향하고 모든 게 앞당겨졌다. 택시부 광장엔 자정이 되기도 전에 이미 인적이 끊겼다. 조금 전 아베크 한 쌍이 말똥가리가 되어 이팝꽃덩이를 굴리다 뽀르르 사라진 게 인간이 남긴 마지막 잔영이었다. 해일처럼 내리붓는 이팝꽃은 금방 발등을 덮고 무릎을 넘더니 축시를 지나자 빨간 우체통마저 절반이나 묻어 버렸다. 세상이 두꺼운 이팝꽃 이불을 덮고 깊은 잠에 빠져들 때 나는 고적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허름한 이층 카페에 홀로 남아 있었다. 턴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김정호가 살아있었고, 마른멸치 몇 마리를 안주삼아 나의 소망대로 이팝꽃 더미에 묻혀갔다. 까가각 ! 강물 얼 때 얼음 갈라지는 소리처럼 쩡쩡한 까치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부비니, 아침햇살이 퇴락의 공간을 환등기처럼 환히 비추고 있었다. 수돗물 한사발로 사포 같은 혓바닥을 축이며 내다본 창밖 풍경은 양화점 지붕이며 약국 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