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음악칼럼리스트] 한때는 전통 차의 반격으로 주춤하던 커피의 인기가, 요즈음 시가지를 걷다보면 두 집 건너 커피점문점이 들어설 정도로 재 반격에 성공한 느낌이다. 아니 이젠 커피가 도심을 점령한 꼴이다. 6세기경부터 이슬람수도승들의 음료로 애용되던 커피가 이젠 전 세계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기호식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 지옥처럼 검고 죽음처럼 강하며 사랑처럼 달콤하다는 커피가 언제부터 우리의 입맛을 그렇게 사로잡았을까? 사실 우리나라에서의 커피역사는 매우 일천하다. 1895년 아관파천당시 아라사공사관에 피신한 고종황제가 한국인으로선 최초로 커피 맛을 보았다한다. 그 후 고종은 경운궁에다 아예 정관헌(靜觀軒)이란 다과공간을 짓고 그 곳에서 커피를 즐기며 음악 감상을 하였다. 그 즈음 생겨나기 시작한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도 당연히 커피를 판매 하였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이거나 고관대작을 대상으로 한 것 일뿐 아직 일반대중들은 언감생심이었다. 커피가 대중의 품으로 들어온 건 1920년대 들어서이다. 후다미라는 곳을 효시로 다방 붐이 일기 시작하였다. 당시 문화예술인들은 다방을 하나쯤 여는 걸 커다란 자랑으로 여길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일개 수병(水兵)인 안용복이 일본 어선이 울릉도와 독도를 넘보지 못하도록 일본까지 가서 호오키주 성주와 담판을 벌이고 일본 막부로부터 일본 어부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서계를 받아낸 것은 근본적으로는 조선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그렇게 하지 못하기에 보다 못한 안용복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나선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 정부로서는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울릉도에 백성들을 입주시켜 다시는 일본이 그런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조선은 188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울릉도에 다시 백성들을 입주시킵니다. 그 대신 조선은 울릉도를 비운 후 정기적으로 실시하다가 흐지부지된 수토(搜討) 정책을 다시 실시합니다. 곧 울릉도에 사람을 입주시키는 대신 3년에 한 번씩 울릉도에 관헌을 보내어 울릉도를 시찰하고 조사하게 합니다. 그러나 3년에 한 번씩 울릉도를 돌아보는 정도로 되겠습니까? ▲ 여객선을 타고 울릉도에 들어가며 찍은 울릉도 모습 실제로 일본 막부가 1697년(숙종 23)에 일본 어민의 울릉도 출입을 금하겠다는 서계를 조선 정부에 보낸 후에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지난번에 부산 출장 갔다가 수영사적공원 안에 있는 안용복 장군 사당에 들렀습니다. 사당 옆 관리실에는 안용복 장군에 대해 약간의 전시를 해놓았는데, 제가 자료를 관심 있게 보면서 질문을 하니까, 관리인이 저에게 책자를 하나 주더군요. 사단법인 안용복 장군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안용복 장군 其功不滅》이라는 책자였습니다. 其功不滅은 그 공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뜻이지요. 책자를 보면서 제 머리 속에 흐릿하게만 떠돌던 안용복 장군의 위용이 확실하게 잡혀갑니다. ▲ (사)안용복 장군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안용복 장군 其功不滅》 책 표지 안용복 장군은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나 경상좌수영의 함선에서 노를 젓던 수병이었습니다. 일개 수병을 장군이라 부르니 엄청난 진급이겠는데, 물론 이는 안용복의 행적을 흠모하고 그의 공적을 높이 산 후손들이 존경의 의미로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안용복 장군이라 부르게 된 것은 1954년 부산 대동문교회에서 안용복을 독전왕(獨戰王) 안용복 장군이라 부르며 추존식을 거행하면서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안 장군은 1693년(숙종 19) 봄에 동래 어부 40여명과 함께 울릉도로 고기잡이를 갑니다.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오늘은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얘기 하나 하겠습니다. 신유박해의 모든 것을 흰 비단에 써서 북경에 보내려다 들켜 능지처참형을 당한 황사영이란 천주교 순교자가 있지요. 이때 황사영이 처형당한 뒤 그의 아내 정명련(일명 난주)와 아들이 겪었던 얘기입니다. 황사영이 백서 사건으로 능지처참형을 당한 후 황사영의 아내와 아들은 노비로 전락하여 제주도 대정으로 유배 갑니다. 정명련은 다산 정약용의 큰 형인 정약현의 딸이지요. 정약현이 처음 딸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황사영에게 시집보냈을 때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겠지요. ▲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모든 것을 흰 비단에 써서 북경에 보내려다 들켜 처형당한 황사영 백서 정명련이 유배 갈 때에 명련은 두 돌배기 아들 황경헌(황경한이라는 기록도 있다)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배가 추자도 예초리에 잠시 정박할 때에 명련은 뱃사공을 매수하여 아들을 물새울 황새바위에 두고 떠납니다. 아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가봐야 아들은 노비로서 클 수밖에 없으니, 차라리 추자도에 내려놓은 것이지요. 물론 명련은 아들을 내려놓을 때 아들의 이름과 출생일을 적은 쪽지를 아기
[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음악칼럼리스트] 우리 국토의 면적은 99,720㎢로 이웃 중국(9,596,961㎢)이나 미국(9,826,675㎢)에 견주면 약 100분의 1 정도이고, 일본(377,915㎢)과 비교해도 3분의1 정도밖엔 안 된다. 똑같이 나눈다면 국민 한 사람당 약 666평쯤 가질 수 있다. 면적으로만 따진다면 세계 109위 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이다. 그 좁은 나라에 태어나 반백이 되도록 살면서, 아직 우리나라도 못 가본 곳이 더 많은 필자이기에 세상의 태양은 다 똑같은 줄 알았다. 어쩌다 우연한 기회에 태양과 정열의 나라라 불리는 스페인을 여행하며 태양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햇볕이 얼마나 강렬한지 마치 주삿바늘에 찔리는 듯 따끔거렸다. 주로 안달루시아 지방을 돌아 다녔는데 그쪽은 남부에 자리 잡아 더 뜨거웠다. 선글라스 없인 눈을 뜨기도 힘들었고 자외선 차단크림도 무용지물이었다. 대리석을 깔아놓은 인도는 복사열로 인해 숯불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골목골목 구석구석 배어 있는 역사의 숨결이 모든 육체적 고통을 씻어 주기에 충분하였다. 스페인은 각 지방마다 독특한 지역 색을 지니고 있는데 안달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동락골 갔을 때에 성주대교로 낙동강을 건넜는데, 육신사(六臣祠)라는 이정표가 보이더군요. 6명의 신하를 모신 사당? 무언가 틀림없이 사연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뭘까? 예전에는 이런 궁금증을 풀려면 집이나 사무실에 들어와 인터넷을 검색했어야 하는데, 요즈음은 슬기전화(스마트폰)가 있으니 즉석에서 궁금증을 풀 수 있지 않습니까? ▲ 성주대교로 낙동강을 건넜을 때 보인 육신사 팻말 찾아보니 육신사는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이었습니다. 사육신을 모신다고?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무덤이 있는 곳에 의절사가 있고, 단종이 죽은 영월에 창절사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지만, 이곳은 과연 사육신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것이지? 여기엔 기막힌 사연이 있습니다. 사육신은 세조가 역적으로 몰아 처형한 신하들 입니다. 옛날에는 역적이라면 3족을 멸하여 그 후손들이 이어지지 못하게 하였지요. 여자들은 노비로 만들었구요. 그런데 사육신중 박팽년만은 유일하게 후손을 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요? 지금부터 알아봅시다. 박팽년이 아버지와 아들 모두와 함께 처형될 때,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는 임신 중의 몸으로 대구의 관비(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어제 자야 여사의 내 사랑 백석에 대한 글에서자야 여사의 본명은 김영한이고, 기생으로서의 예명은 진향, 법정스님이 붙여준 법명은 길상화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야(子夜)는 백석 시인이 붙여준 별명이지요. 그런데 제 글을 읽으면서 왜 별명을 자야라고 지었을까 궁금해 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루는 자야가 함흥 시내 백화점에 갔다가 책방에서 평소 애독하던 잡지 《문예춘추》와 《여원》을 사가지고 돌아서는데, 문득 자야오가(子夜吳歌)라는 《당시선집(唐詩選集)》이 눈에 들어오더랍니다. 자야는 그 타이틀이 너무도 아름답고 또 낭만적인 느낌이 들어서 대뜸 사가지고 와서 백석에게 보였답니다. 백석은 시집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갑자기 눈빛을 반짝거리며 자야를 바라보더니, 말합니다. 나 당신에게 아호(雅號)를 하나 지어줄 거야. 이제부터 자야라고 합시다! ▲ 산에는 꽃 피고 ⓒ 운곡 강장원 한국화가 자야는 당시선집에 들어있던 이태백의 시 자야오가에 나오는 중국 동진 시절의 여인입니다. 당시 중국은 북방에서 중국을 엿보는 북방민족(흉노, 선비 등) 때문에 백성들을 돌아가면서 징병하여 변방을 지키게 하였는데, 자야의 남편도 이렇게 변
▲ 《내 사랑 백석》, 김영한, 문학동네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병호사]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나온 《내 사랑 백석》을 읽었습니다. 부제(副題)는 백석 시인과 자야 여사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 자야 여사가 백석 시인과의 사랑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입니다. 백석 시인(1912~1996)은 80년대 말에 해금될 때까지는 월북시인이라고 하여 우리에게는 잊혔던 시인이나, 소월을 계승하고 오히려 소월을 능가할 수 있는 민속적 감성의 풍부함으로 인하여 지금은 꽤 알려진 시인이라고 하겠지요. 사실 월북시인이란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백석은 해방 전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면서 고향인 평북 정주로 돌아온 것뿐이니 정확하게 말하면 재북(在北)시인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런 시인을 오랜 세월 남한에서는 묻어두었으니,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사상의 질곡 속에 살았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재북시인뿐만 아니라 남에서 북으로 올라간 시인들 중에도 월북이 아니라 강제로 납북된 시인들이 많은데, 그 동안 우리는 이를 싸잡아 월북시인이라고 하여 경원시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시인이 정지용 시인이라 하겠습니다. 백석 시인까지는 어느 정도 아는 분이라고 하더라도 자야여사(1916~1999)
[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김상아 음악칼럼리스트]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학년이 바뀌고 처음 맞는 조회시간 이었다. 교장선생님은 방학 동안에 학생들이 얼마나 국민교육헌장을 잘 외웠는지 알아보기 위해 무작위로 몇 명을 지목하여 교단으로 불러올리셨다. 두 번째 학생이 막 외우기 시작 할 무렵 갑자기 머릿속에서 윙하는 기계음이 들리더니 하늘이 캄캄해졌다. 내가 지구의 자전을 따라가지 못 했는지 아니면 역회전을 하였는지 나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말았다. 잠깐의 우주유영을 마치고 지구로 귀환하였을 땐 나는 급우들에 의해 나무 밑으로 옮겨져 있었고 담임선생님은 내게 물을 먹이고 계셨다. 조회가 끝나자 담임께서는 내 손을 잡고 교무실로 데리고 가서 얼음처럼 차가운 내 얼굴을 바라보며, 고기도 좀 먹고 과일도 먹어야 할 텐데 오늘은 일찍 집에 가서 쉬어.하며 조퇴를 하라고 하셨다. 3월 초라고는 하지만 봄이 일찍 찾아와 벌써 개나리가 노란 물감을 입안에 머금었고 아스팔트엔 아지랑이가 하늘거렸다. 어지럼증 여파로 가로수에 기대어 있다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버스에 오른 나는 눈이 얼음판에 자빠진 소 눈만큼 휘둥그레졌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 토크 갤러리 강의를 듣느라고 매주 월요일마다 갤러리 두에 갔습니다. 갤러리 두는 청담동 성당 옆에 있기에 강의가 있는 날이면 제 사무실에서 걸어가지요. 그런데 성당 뒤쪽으로 청담 근린공원이라고 조그마한 동산이 있습니다. 건물에 가려 큰 길에서는 뒤에 그런 공원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요. 매번 공부하러 갤러리 두에 가는데, 그래도 한번쯤은 뒤편 공원에도 들러주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지난번에 사무실에서 좀 일찍 출발하여 공원에 들렀습니다. 이 조그만 공원에 뭐 볼 것 있겠느냐 생각하며 공원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래도 제법 숲이 있고, 놀라운 것은 그 조그만 공원에 시냇물도 흐르고 약수터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조에서 직산현감을 지낸 권대균과 사헌부 감찰을 지낸 권옹의 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감탄하면서 숲속 길을 걷는데, 한쪽에 비석이 있습니다. 비석에는 큰 글씨로 홍순언과 강남녀의 전설이라고 쓰여 있네요. 응? 이게 뭘까? 내용을 보니 역관 가운데 드물게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훈되고 당릉군(唐陵君)에까지 봉해진 역관 홍순언(1530~1598)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제 봤더니 홍순언이 청담동 출신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