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미국 메릴랜드주에는 1695년에 설립된 세인트존스대학이 있습니다. 이 대학이 특이한 것은 몇 개의 선택과목을 빼고는 모든 교육과정이 동일한데 학생들은 4년 동안 100권의 고전을 읽고 토론을 통하여 학점을 딴다는 것이지요. 이 대학을 졸업하려면 해마다 방대한 수필을 써야 하고 졸업 논문을 써야 하며, 교수 앞에서 구두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모두가 고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과 끝을 이루지요. 학생들은 교수를 'Professor(교수)'가 아닌 'Tutor(지도교사)'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교수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대학 학생들은 강의를 듣는 것이 5% 정도이고 나머지는 읽고, 토론하고, 서로 설명하는 과정이 들어 있습니다. 책을 읽은 뒤 감상을 말하기는 쉬울 수 있으나 지은이와 생각을 공유하며 다른 학생 및 교수와 토론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어서 중도에 그만두는 학생도 많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생각을 위한 공부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 어떤 문명이든지 그 뿌리에는 문화의 저변에 깃들어 있는 의식세계와 정신세계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51) 서울 달 밝은 밤에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로되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쩌랴 아라비아 상인이었던 처용이 외간 남자와 있는 아내를 보고 부른 노래다. 처용은 신라 49대 헌강왕 때 아라비아에서 건너와 오랫동안 서라벌에서 신라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다. 처용은 아내를 용서했지만, 다시 혼인하지 않고 풍류를 즐기며 행복하게 지냈고, 죽어서는 동해바다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한다. 정혜원이 쓴 이 책, 《우리 역사에 뿌리내린 외국인들》은 생각보다 많은 우리 역사 속 외국인들을 차례차례 조명한 책이다. 흔히 ‘단일민족’이라는 인상 때문에 역사 속 외국인이 많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뜻밖에 역사에 발자국을 남긴 굵직한 인물들이 많다. 인도 아유타국에서 건너와 가야 김수로왕과 혼인한 허황옥 공주, 신라의 수호신이 된 푸른 눈의 아라비아 상인 처용, 베트남 왕실의 혼란을 피해 고려로 망명한 안남국 왕자 이용상, 조선의 유학을 사랑한 일본 장수 김충선, 《하멜표류기》로 널리 알려진 하멜이 그 주인공이다. 그뿐 아니라 외국에 뿌리내린 우리나라 역사 속 인물도 두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세상에 대한 나만의 관점을 형성하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세상은 유유상종이어서 벗 또는 동료처럼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는 친하게 지내지만 나와 다른 사람과는 멀어지거나 어정쩡한 사이가 되기 십상입니다. 60이 넘은 지금 지나온 삶을 반추해 보면 저 자신이 그렇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어쩌다 나는 누군가를 왜 그리도 미워하거나 두려워하는 어른이 되었을까요?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왜 동료를 적으로,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고 있었을까요? 나이가 들면서 아주 좁고 작은 창문들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눈높이 교육이라는 말이 한때 유행하였습니다. 그 유래는 이러합니다. 유럽의 한 박물관에 사지가 멀쩡한 젊은 여성 한 분이 앉은뱅이걸음으로 작품을 감상합니다. 의아하게 생각한 전시기획자가 묻지요. "왜 당신은 사지가 멀쩡하면서 앉은걸음으로 작품을 보고 있나요?" 그때 여성은 이렇게 답합니다. "저는 유치원 교사입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작품을 바라보면 어떻게 보일까 궁금해서요." 같은 그림을 보고도 사람마다 느끼는 감동은 다릅니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생각나는 장면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저는 학입니다. 저는 지금 프랑스 파리에 있습니다. 보통은 하얀 색이지만 지금 저의 몸에서는 황금빛 광채가 은은히 퍼지고 있는데 혹 보이시나요? 저는 가끔 두 다리를 곧게 펴고 날아오르기도 합니다. 제가 있는 곳이 박물관 전시장의 진열창 속이고 제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오동나무 판이어서 이따금 날개를 펴고 솟아올라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재미가 좀 없습니다. 누가 봐주면 좋겠는데 여기 프랑스 사람들은 제가 여기 있는지를 모르는 지 거의 오지 않고요, 저의 존재를 알 만한 한국 사람들도 별로 오지 않으니까요.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이곳에 온 지 120년이 넘었습니다. 제 나이요? 학은 천 년을 살 수 있는 것 아시지요? 제가 처음 한국 땅에 내려온 것이 고구려 24대 양원왕陽原王(재위 545∼559) 때인데 그때는 막 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니까 그때부터 치면 1,500살이 조금 안 됩니다. 당시 왕산악 선생이 중국에서 온 7줄의 칠현금이란 악기 대신에, 밤나무로 밑판을 대고 그 위에 오동나무로 울림통 덮개를 덮은 6줄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기에 그것을 축하한다고 높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때 사람들은 검푸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유백색, 석간주색… 우리 문화유산에 쓰인 아름다운 색이 가진 이름들이다. 우리 고유의 색상이라고 하면 흔히 ‘백의민족’으로 대표되는 흰색을 떠올리지만, 사실 흰색은 다채로운 색깔 가운데 하나일 뿐 훨씬 다양한 색깔이 일상 속에 쓰였다. 그렇다고 파랑, 하양, 빨강, 검정, 노랑으로 이루어진 오방색만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우리 역사 속에는 자색, 석간주색, 비색처럼 아름다운 색상이 참 많았다. 하리라가 쓴 이 책, 《문화유산에 숨은 색 보물을 찾아라!》는 청룡, 주작, 백호, 현무, 황룡이 각자 색상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며 다양한 색을 알아가는 매력이 있다. 이미 잘 알려진 ‘오방색’ 말고도 우리 역사에는 아름다운 색깔이 많았다. 흔히 고려청자에서 나는 오묘한 푸른색을 뜻하는 ‘비색(翡色)’이 대표적이다. 푸르면서도 녹색 빛이 도는 신비로운 색감을 표현하기 위해 ‘물총새 비(翡)’자를 써서 ‘비색’이라 하였다. 물총새 또한 깃털이 푸르고 영롱한 초록색 빛이 도는 까닭이다. 대한제국의 황후가 입었던 ‘적의’에는 아주 깊은 푸른색인 ‘심청색’을 썼다. 순종의 황후인 윤 황후가 입었던 적의는 ‘12등 적의’라 하여 꿩 무늬 154쌍을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서포 김만중이 지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진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각각 그 말에 따라 리듬을 갖춘다면, 똑같이 천지를 감동하게 하고 귀신과 통할 수 있는 것이지 중국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자기 말을 내버려두고 다른 나라 말을 배워서 표현한 것이니 설사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 곧 "한국 사람이 한자로 글을 쓰는 것은 앵무새가 사람 말을 하는 것과 같다”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 당시는 한자 세대여서 한자가 한글보다 편했기 때문이었겠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의 정서를 우리글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기억>에는 교사가 스스로 사고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제 생각인 양 말하고 다니는 애들을 앵무새에 빗대어 비판합니다. 한편으로 공감이 가면서도 요즘 애들만이 그런 게 아니라 나 또한 앵무새가 아니었는가를 반성합니다. 앵무새의 말은 소통의 수단으로 쓰일 수 없습니다. 그저 어디선가 들려온 말을 따라 하며 의미 없는 반복적인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할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오리나무는 십 리가 떨어져 있어도 오리나무고 고향나무는 타향에 심겨 있어도 고향나무고 할미꽃은 아주 어려도 할미꽃이라고 불립니다. 옛날엔 할미꽃이 참 많았습니다. 밭둑이나 산소 주변에 쉽게 볼 수 있었던 꽃인데 요즘은 기후 변화 탓인지 흔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할미꽃은 나름대로 열심히 성장하고 꽃을 피우고 자라고 번성하는 꽃인데 자신이 할미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면 아마도 서운할 것입니다. 어쩌면 꽃이 시골 할머니의 꼬부라진 허리처럼 휘어져 있기에 붙은 이름이겠지요. 부끄러움의 결과인지 겸손의 미덕을 발휘하기 위함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태어나서 내내 고개를 숙이고 살다가 홀씨를 날릴 때가 돼서야 잠시 허리를 펴는 할미꽃은 우리 인생을 닮았습니다. 할미꽃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마도 동강할미꽃이 아닐까 합니다. 동강할미꽃은 생김새는 할미꽃을 닮았지만 보통 할미꽃과는 달리 하늘을 향해 화사한 꽃잎은 벌리고 있거든요. 한약방에서는 할미꽃을 백두옹(白頭翁)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아마도 할미꽃의 홀씨가 흰 머리카락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것입니다. 할미꽃의 뿌리는 매우 강한 독성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한약재로 사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올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열대야는 저녁 6시 1분부터 이튿날 아침 9시까지 기온이 25도 이상을 유지하는 현상을 말한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 8월 25일 아침 6시 12분에 서울의 기온이 24.9도까지 내려가 8월 24일 밤은 열대야가 아니었다고 한다. 이로써 34일간 계속된 서울의 최장 열대야는 끝났지만, 올해 여름에 서울에서 열대야가 발생한 날 수는 모두 37일로 이 역시 기상 관측 이래 제1위에 해당한다고 한다. ‘님이 그리워’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고 ‘날씨가 더워서’ 잠 못 이루는 밤은 해마다 반복되며 해마다 길어질 것으로 염려된다. 이처럼 열대야가 길어지는 것은 지구가 더워지는 지구온난화 현상 때문이다. 환경학자들은 산업 혁명 이후 지구의 평균온도가 빠른 속도로 높아지는 것이 관측되자 지구온난화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었다. 인류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일어난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해졌다. 모든 나라에서 경제가 발전하면서 화석연료의 소비가 늘어나고 연쇄적으로 이산화탄소의 발생이 증가하였다. 이산화탄소는 이른바 온실가스로서 태양열을 붙잡아두기 때문에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높아지면 지구의 온도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잠시 눈감고 바람소리 들어보렴 간절한 것들은 다 바람이 되었단다 내 바람은 네 바람과 다를지 몰라 바람 속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바람처럼 떨린다 ... <바람편지>, 천양희 그래 이제 길고 긴 더위에 지친 우리들이 눈을 감고 마음을 열어야 할 때가 되었다. 한여름 무더위가 언제 갈 것인가? 한낮부터 밤까지 땀을 흘리던 우리들의 바람은 이 바람이었다. 우리의 '바람'처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느새', 아니 '마침내' 오고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 늘 그렇지만 새해가 시작된 게 어제 같은데 한 해로 치면 3분의 2가 가고 있다는 뒤늦은 인식과 함께 온다. 이제 올해의 3분의 1이 남았을 뿐이라는 탄식과 같은 것 아닌가? 곧 9월이라 뜻이다. 푸른 옷 벗어 놓고 새 옷을 입는구나 한 철이 지나가고 새 계절 맞이하니 9월이 물드는 것을 그 누구가 막으랴 ... <물드는 9월>, 오정방 초복ㆍ중복ㆍ말복을 지나고, 입추와 처서도 지나고, 9월이다. 입추(立秋)에서 보름이면 처서(處暑)인데 그것도 지났으니 이제 계절로는 분명 가을이렸다. 아직 한 낮에는 그렇지 않지만, 최장의 열대야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5) “공주는 안으로는 밝으시지만 드러내지 않으시며, 재능이 있으시지만, 그 명예에 관심을 두지 않으셔 심덕의 온전함이 일부분만 나타났소. 공주의 글씨를 받아 보니, 선조 대왕의 필법에서 나온 듯하오. 필적이 웅장하고 건장할 뿐만 아니라 온화하면서도 두터워서 여인이 쓴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소. 필법에서 마음을 읽혀, 그 성정에서 깊이 감동하게 되니 가문이 엄숙하고 화목하겠습니다.” 정명공주. 선조의 늦둥이 공주로 태어나 여든이 넘도록 천수를 누린, 복 많은 여인이다. 오래도록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자손들도 크게 번창했다. 어찌 보면 조선왕실의 공주 가운데 가장 많은 복을 누린, 운 좋은 여인이기도 하다. 다만, 이런 날이 있기까지 유년기에 엄청난 고생과 실망과 좌절이 있었다. 이복 오라버니이자 선조의 뒤를 이어 임금으로 즉위한 광해군은 정명공주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서궁(오늘날의 덕수궁)에 유폐시켰다. 정명공주도 이때 어머니와 함께 죽은 듯 숨죽여 살며 갖은 고생을 다 했다. 박성호가 쓴 책, 《화정- 정명공주 이야기》는 이런 극적인 공주의 일생을 소설 형식으로 담담하게 풀어낸 책이다.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