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오늘날 일본에 고기식당으로 널리 알려진 야끼니꾸집(燒肉, 불고기집)의 등장을 일본 위키에서는 1960년대 전후로 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고기를 구워먹고(고기구이), 삶아먹고(편육), 쪄먹고(갈비찜), 부쳐 먹고 (고기전), 제사상에 올리는(고기산적) 한국과 같은 요리법이 발달되어 있지 않다.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에는 육식 금지령의 영향으로 피차별족이나 아이누족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포유동물인 고기를 먹는 습관은 없었다. 그러나 멧돼지를 약으로 먹거나 산간지방에 사는 일부 사람들이 수렵으로 잡은 동물을 종종 먹는 일은 있었다. 또한 에도시대까지는 토끼 고기를 흔히 먹었는데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8) 후기에는 모몬지야(ももんじ屋, 일종의 푸줏간)가 생겨 에도(오늘날 동경)와 같은 대도시에서 고기를 먹게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먹게 된 것은 명치시대(明治時代, 1868-1912) 이후이다. 이는 일본 위키사전에 나온 일본인들의 육류섭취 역사의 일부이다. 명치 때부터 일반인들이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고 치면 약 145년 정도가 육류섭취의 역사이다. 그래서 그런지 식구들끼리 삼겹살을 구워 먹는다든가, 중요한 날에 빠지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일본의 절이나 신사(紳士)에 가면 작은 나무판에 소원을 적어 걸어 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를 에마(繪馬)라고 한다. 에마는 개인의 소원을 적어 거는 소형에마와 여러 사람(단체)의 소원을 거는 대형에마가 있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 보면 절이나 신사에 살아있는 말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신메(神馬,しんめ)라고 하는데 말은 비싸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은 바치기 어려웠다. 한편 절이나 신사에서도 말을 시주로 받는 경우에는 관리가 어려워 말 대신에 나무나 종이 또는 흙으로 빚은 말 형상의 시주를 대신 받게 되었다. 지금과 같은 에마(繪馬)가 등장한 것은 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85) 때부터이다. ▲ 헤이안신궁, 청수사, 후시미나리대사에 걸린 에마들(왼쪽부터 시계방향) 그러던 것이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1336-1573)가 되면 나무판 뒤의 그림을 말(馬)에서 벗어나 다양한 모습을 그리게 되는데 교토의 후시미이나리신사(伏見稻荷大社)의 경우에는 여우를 그리기도 했다. 그 뒤 오다노부나가와 풍신수길 시대인 안도모모야마시대(安土桃山時代,1573-1603)가 되면 저명한 화가들이 본격적으로 에마 작업에 합세하게 된다. 서로 경쟁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교토시 기타쿠(京都市 北區 金閣寺町 1)에 있는 금각사(金閣寺, 킨카쿠지)를 찾은 것은 7월 23일 월요일이었다. 한 여름 수은주가 30도를 가리키는데도 금각사에는 금빛 찬란한 절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금각사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금각사는 고도교토(古都京都)의 문화재로 청수사(水寺, 키요미즈데라)와 함께 세계유산(世界遺産)에 등록 된 곳이다. 금각사를 다른 이름으로는 녹원사(鹿苑寺, 로쿠온지)라 부르는데 이 일대에는 과거에 서원사라는 절이 있었고 주변에는 요즘으로 치면 지체 높은 공무원(公卿)의 별장이 자리했던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무로마치시대 장수인 아시카가(足利義滿,1358-1408)의 화려한 별장으로 활용되다가 명치 이후에는 금각사로 개조 되어 지금은 손꼽히는 교토의 유적지로 자리 잡았다. ▲ 금빛 찬란한 금각사 전경 보기에 화려한 금박은 강렬한 자외선 햇살 탓에 10여 년이면 빛깔이 바래 다시 큰돈을 들여 칠(1986년에 1년 8달 동안 7억 4천만 엔 들여 개보수)을 해야 하는 문제가 있지만 거둬들이는 입장료 수입이나 교토의 이미지 제고에 더 없이 소중한 보물이다. 이곳이 세상에 크게 알려진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한여름 무더위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한국인들에게는 복더위가 먼저 떠오른다. 초복, 중복, 말복 말고도 더위를 나타내는 절기로는 소서, 대서도 있다. 이러한 무더위 때 일본인들은 친구나 친지, 가족을 생각하여 편지를 보내는 습관이 있는데 이를 쇼츄미마이(暑中見舞い)라고 한다. 우리말로 딱히 번역하기는 쉽지 않으나 무더위 안부 편지 정도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무더위 안부편지(쇼츄미마이)를 하나 보자. 무더위에 안부 말씀 올립니다. 장마가 개인 뒤 본격적인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저는 이번 달부터 건강을 생각해서 자전거 통근을 시작했습니다. 안하던 일이라 근육통이 생겼지만 비가 오는 날을 생각하여 우비도 준비했습니다. 무더위는 지금부터입니다. 모쪼록 건강을 스스로 잘 살피시길 빕니다. 성하(盛夏) 대개 엽서에 안부를 묻는 것이라 간략한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엽서를 받는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을 챙겨준다고 생각하기에 흐뭇한 마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나 역시 일본에 있을 때 안부엽서(쇼츄미마이)를 몇 십장씩 받았던 기억이다. 몇 십장 받았다는 것은 또 몇 십장을 썼다는 말도 된다. 안부엽서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바야흐로 여름마츠리의 계절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본의 여름은 마츠리(祭,matsuri, 축제)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특히 교토에는 예전부터 전해 오는 유서 깊은 마츠리가 많은 데 7월 한 달 내내 하는 기온마츠리(祇園祭)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다. 이 마츠리를 보려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호텔방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이만한 경제적 효자 상품도 없을 것이다. 기온마츠리의 유래는 전염병이 확산 되지 않도록 신에게 기도하는 의례에서 생겨났다. 지금부터 1,100여 년 전 교토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죽는 사람이 속출했는데 오늘날과 같은 전염병 대책이 없던 당시에는 전염병 발생을 신 곧 우두천왕(牛頭天王, 일명 스사노미코토)의 노여움으로 알았다. 그 노여움을 풀어주려고 기온사(祇園社, 현 야사카신사)에서 병마 퇴치를 위한 제사를 지냈는데 당시 66개의 행정구역을 상징하는 가마 66개를 만들어 역병(疫病)을 달래는 어령회(御靈會)를 지낸 데서부터 기온마츠리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스사노미코토가 신라의 우두신이란 기록이 있다. ≪교토 속의 조선(京都の中の朝鮮)≫을 쓴 박종명 씨는 서기 656년 가라쿠
[그린경제=이윤옥 기자]일본 역사에서 백제여인 고야신립이 제49대 천황인 광인왕(光仁天皇,재위기간 770-781)의 왕비이고 그 아들이 50대 환무왕이라는 것은 이미 밝혀진지 오래된 사실이다. 일본 위키사전에는 《속일본기, 続日本紀,797년》를 들어 백제여인 고야신립(高野新立)을 두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멀리 뫼절길(참도) 끝에 보이는 백제여인 고야신립의 남편 49대 광인왕 무덤 황태후 성은 화씨이며 위는 신립, 증정1위을계의 따님이다. 어머니는 증정1위대지조신진주이다. 왕비의 선조는 백제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이다. (번역 필자: 皇太后姓は和氏、諱は新笠、贈正一位乙継の女(むすめ)なり。母は贈正一位大枝朝臣真妹なり。后の先は百済武寧王の子純陁太子より出ず) 고야신립의 아들인 간무왕은 서기 794년 수도를 나라(奈良)에서 교토(京都)로 옮기고 일본문화의 금자탑을 이룬 헤이안시대(平安時代)를 이룩한 왕이다. 교토에서는 이 왕을 교토의 신(神)으로 떠받들고 있으며 해마다 10월 22일은 간무왕을 기리는 지다이마츠리(時代祭)을 열고 있다. 이쯤 되면 백제여인 고야신립의 위상을 자랑해도 될 만하다.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사카고우라이자에몽(坂高麗左衛門) 집안 최초로 여성 세습자가 나왔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13대 째를 이은 사카고우라이자에몽(坂高麗左衛門) 선생의 세습기념전(襲名記念展)입니다. 차도일여(茶陶一如)로 세상에 알려진 하기야키(萩, 하기도자기)는 이조도기(李朝陶技)를 계승하는 종가로써 400여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유서 깊은 명문도예 집안입니다. 이번 전시회는 작년에 13대 세습을 받아 처음 발표하는 다완(茶碗)을 중심으로 품격 높은 작품 50점을 선보입니다. 많은 관람 부탁드립니다. 위는 일본의 고급 백화점인 다카시마야(高島屋)에서 소개한 도자기전시회 안내문이다. 도쿄니혼바시 다카시마야(日本橋高島屋)점에서 작년 6월 열린 습명기념 13세 사카고우라이자에몬덴(襲名記念 十三世 坂 高麗左衛門展 전시회 주인공인 사카고우라이자에몽(坂高麗左衛門)은 임진왜란 때 도공으로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 이경(李敬)의 13대 손이다. 이경(李敬)보다 먼저 형 이작광(李勺光)이 일본에 건너갔는데 이작광은 당시 진주 근처의 관요(官窯)에서 일하다가 임진왜란 때 동료 도공과 함께 포로로 끌려갔다고 전한다. 훗날 가업을 잇게 된 동생 이경 (李敬,1568~1643)은 당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얼굴 생김새로 보면 일본인과 한국인 그리고 중국인은 그 차이를 알 수 없다는 서양인들이 있습니다. 한국인인 저 역시 이 세 나라 사람들의 얼굴 구분이 안 되는 때가 있는데 서양인들이 이 세 나라 사람을 구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특히 한국과 일본 이 두 나라 사람을 얼굴만으로 국적을 구분하기란 거의 불가능 할 것입니다. 외모에서 오는 친근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본인 가운데는 유달리 형제자매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에노미야코(上野都) 시인도 그 가운데 한분입니다. 요즈음 저는 그분을 미야코 언니라고 부릅니다. 친언니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한국인인 저보다 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은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가 피붙이처럼 느끼게 된 것은 미야코 언니가 쓴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를 읽고 부터입니다. 미야코 언니는 2002년에 나온 《바다를 잇는 소금물, 海をつなぐ潮》이라는 시집에서 황애시덕, 황신덕, 김마리아, 유관순 등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시를 써서 일본 언론에 큰 주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 미야코 시인의 새 시집 《땅을 도는 것、地を巡るもの》표지, 미야코 씨 모습 한국일보 2013년 3월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여기가 교토를 수도로 정한 환무왕(桓武天皇)의 어머니 무덤이런가? 그다지 넓지 않는 돌계단이 쭉 위쪽으로 나 있다. 거의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듯 무덤의 참배길을 오르려는 나를 근처 주택가를 거닐던 사람이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다보고 있다. 수필가 오카베 이츠코(岡部伊都子) 씨는 말을 이어간다. 환무왕의 어머니 고야신립(高野新笠)은 백제 왕족으로 광인왕(光仁天皇)의 부인이 되었다. 틀림없이 희고 고운 조선의 피부를 가진 꽤 아름다운 미녀였을 것이다. 일본의 50대 왕인 환무왕의 어머니인 백제여인 고야신립의 무덤을 찾은 오카베 이츠코 씨는 대나무 숲이 우거진 돌계단을 오르며 고야신립이 분명 아름다운 모습의 여인이었을 것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다. 그녀가 일본 역사 속에 크게 부각 되었던 여성들의 삶을 추적하면 쓴 것이 《여인의 경, 女人の京》이다. ▲ 《여인의 경, 女人の京》 책 표지(왼쪽), 일본 황후가 된 백제여인 고야신립 무덤(교토) 이 책에서 지은이는 고야신립이 백제왕족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혼자서 교토 오오에(大枝町)에 있는 고야신립의 무덤까지 다녀 온 것이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멸망한 백제의 후손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한 여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말임. 가야마스에코(香山末子, 1926-1996)라는 일본이름으로 《행주치마 노래》등 3권의 시집을 남기고 74살의 나이로 일본의 한센병요양소에서 1996년 숨을 거두었다. 김말임의 고향은 경상남도 진양군 진성면 온수리이다. 그 시절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연행길에 올라 큐슈 탄광지대의 중노동으로 시달렸거나 또는 조선총독부의 토지수탈로 논과 밭을 잃고 정처없이 떠나야 했던 것처럼 그는 먼저 건너간 남편 뒤를 따라 19살 꿈 많은 새댁으로 일본땅을 밟았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은 지독한 가난과 생활고에 이은 한센병 신세로 일본땅에 도착한지 3년 만에 어린 자식들과 헤어져 한센병요양소에서 지체장해와 실명이라는 불운으로 긴 투병생활에 들어간다. 썩어가는 몸과 눈까지 멀어버린 김말임의 수용소 생활은 필설로 구태여 옮기지 않아도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23살의 나이에 한센병요양소에서 그가 그리던 경상도 온수리 고향 하늘은 언제나 구세주였고 어머니 품이었으리라! 그 한의 세월을 줄줄이 노래로 엮어 49살 되던 해에 《쿠사츠아리랑》1권을 시작으로 74살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도라지 시(노래)》,《푸른 안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