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형조판서 김취로의 말을 듣건대 반인이 한 짓이 매우 해괴하다 합니다. 북부의 장의동 주위에 금송의 정령이 행해지지 않기에 사람을 시켜 살펴봤더니 반인의 무리가 생솔을 함부로 베어가기에 사람들이 잡으려 하니 도끼로 사람을 찍고, 성을 넘어 도주하여 그대로 반촌 안에 숨었는데, 모든 금란에도 반쪽에 감히 들어갈 수 없었기에 잡아낼 길이 없다하니 참으로 민망한 일입니다.”
위는 《영조실록》 6년 10월 11일에 나오는 우의정 조문명의 말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금란(禁亂) 곧 소나무 벌채금지, 임의적 도살 금지, 양조(釀造, 술빚기) 금지는 나라에서 엄히 금하던 것이었는데 그 가운데 소나무 벌채를 한 사람을 쫓으니 치외법권 지대인 반촌으로 들어가 숨어 잡을 수가 없다는 내용입니다. 반촌은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 성균관(成均館)으로 들어가는 길 양쪽에 있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외부인들과는 혼인은 물론 사귐도 없었습니다. 반촌에 사는 반인들은 송도(개성)에서 온 사람들로 여러 풍속도 서울 사람과 달랐다고 하는데 이들은 백정은 아니지만 한성 안에서 소를 잡고 파는 것을 독점한 것은 물론 세금으로 바칠 고기를 성균관 학생들의 반찬을 하고 성균관 노비가 되어 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 한성도성도 부분, 성균관으로 들어가는 길 양쪽에 동반촌, 서반촌이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라 반촌은 성균관 유생들이 방을 잡아 공부하는 하숙촌이기도 할 정도로 성균관과는 끈끈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나무를 베다가 도끼를 휘두르고 도망갔던 반인들을 잡으려고 반촌을 뒤지자 유생들이 권당(捲堂) 곧 성균관 식당에서 밥 먹기를 거부하는 스트라이크를 벌여 영조 임금이 달래야 했을 정도입니다. 반인들은 소를 도살하는 사람들이이어서 외부 사람들은 이들을 천대했을 것이고 반면에 이들은 성균관 유생들을 배경 삼고 똘똘 뭉쳐 해방지구를 만들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