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조선 후기 문신 이시백(李時白, 1581/선조 14∼1660/현종 1)은 효종 때 영의정까지 올랐던 선비입니다. 이시백은 용모가 우람하고 기력이 장대했지만 지혜가 깊고 겸손한 것은 물론 자신이 처리한 정사에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하루 종일 근심하면서 잠을 못 이룰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백성을 사랑하고 부정과 불의를 용서하지 않았지요. 효종 3년에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도중 평양에 도착했을 때 성문 밖에서 아름다운 기생들이 열을 지어 그를 마중하는 것을 본 이시백은 평양 벼슬아치를 크게 꾸짖고 어린 기생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했습니다.
또 하루는 이시백이 퇴청하여 집에 들어오자 부인이 비단을 두른 방석을 만든 것을 알고 수십 년을 써와 쥐가 갉아 먹고 얼룩져 더러워진 부들자리를 내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들자리에 부인도 앉도록 하면서 “내 다행히 어진 임금님을 만나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소. 그래서 부들방석에 앉아도 오히려 마음이 불편한데 어찌 비단을 두른 방석에 앉을 수 있겠소”라고 한탄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부인은 방석에서 비단을 뜯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지요.
▲ 조선 후기의 문신 이시백 영정(문화재청 제공)
이시백은 영의정까지 지내면서도 청백리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인조반정에 큰 공을 세우고 병조판서 7차례, 이조판서 두 차례에 정승까지 지냈으나 그의 집은 가난한 선비 그대로였지요. 《현종개수실록》 1년 5월 3일 치에는 “일찍이 《소학(小學)》을 수천 번 읽어 집에 있을 때는 늘 그것으로 자신을 다스렸다. 38년 동안 벼슬하면서 청렴하고 공손하고 검소한 것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라고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그런 공직자가 그리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