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高堂六月盛炎蒸 고대광실 오뉴월 푹푹 찌는 여름날에
美人素手傳淸氷 여인의 섬섬옥수 맑은 얼음 내어오네.
鸞刀擊碎四座편 칼로 그 얼음 깨 자리에 두루 돌리니
空裏白日流素霰 멀건 대낮에 하얀 안개가 피어나네.
滿堂歡樂不知暑 왁자지껄 떠드는 이들 더위를 모르니
誰言鑿氷此勞苦 얼음뜨는 그 고생을 그 누가 알아주리.
君不見 그대는 못보았나?
道傍갈死民 길가에 더위먹고 죽어 뒹구는 백성들이
多是江中鑿氷人 지난겨울 강위에서 얼음뜨던 자들이란 걸.”
▲ 장빙군(藏氷軍), 한강에서 얼음을 뜨던 백성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위 한시는 조선 후기의 문신 김창협(金昌協, 1651 ~ 1708)의 “얼음 뜨는 자들을 위한 노래(鑿氷行)”입니다. 처서가 지났지만 아직 더위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전 냉장고가 없던 조선시대엔 냉장고 대신 얼음으로 음식이 상하는 것을 막으려했지요. 그래서 한겨울 장빙군(藏氷軍)들이 한강에서 얼음을 떠 동빙고와 서빙고로 날랐는데 이들은 짧은 옷에 맨발인 자들도 있었다고 한시는 전합니다.
그렇게 저장된 얼음은 한여름 궁궐의 임금과 높은 벼슬아치들 차지였는데 그들은 얼음을 입에 넣고 찌는 듯한 여름에도 더위를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때 길가에는 굶주리고 병들어서 더위먹고 죽은 백성들의 주검이 나뒹굽니다. 그리고 그 죽은 백성은 지난 겨울 맨발로 얼음을 뜨던 백성이었음을 그들은 알리도 없고 관심도 없음을 시인은 고발하고 있지요. 김창협은 숙종 때 대사성 등의 관직을 지냈으나,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수항이 사약을 받은 뒤 관직도 사양하고 숨어살았습니다. 그는 문학과 유학의 대가로서 이름이 높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