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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고 묵계월 명창 1주기 추모 음악회 열려

[국악속풀이 226]

[한국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고 묵계월 명창의 1주기를 맞아 임정란을 위시한 그의 제자 일동이 준비한 추모 공연 이야기를 하였다. 10여 년 전 묵계월 명창은 자신의 능력이 한계에 다다라 예능보유자 자리를 물러나야겠다는 명퇴서를 써놓고 교정을 부탁했다는 이야기, 오뉴월 모닥불도 쬐다가 물러서면 서운한 법이라는데, 보유자 자신이 스스로 그 자리를 용퇴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결정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다.

또 그의 어머니는 딸에게 소리 공부를 시키기 위해 묵씨네 집안에 양녀로 보냈고, 소리선생 주수봉(朱壽奉)은 당대 속요계를 주름잡던 최정식(崔貞植)에게 보내주었다는 이야기, 묵계월은 어린 시절부터 노래 부르기를 무척이나 좋아해 종일 연습에 몰두했는데, 특히 그날 배운 소리는 그날로 완전히 암기하고 자신 있게 부를 수 있을 때까지 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1995년 제자들과 함께 공연하는 고 묵계월 명창

세상 사람들은 묵계월의 소리를 두고 <하늘이 낸 목>이라고 한다. 그만큼 그의 목청이 시원시원하고 힘차며 맑고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소리꾼은 좋은 소리, 즉 맑고 깨끗한 목청을 타고나야 한다. 특히 경서도 소리야말로 아름다운 목청을 타고나는 것은 기본이다. 그렇다고 누구나 명창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무리 좋은 목을 타고 났다고 해도 뼈를 깎는 아픔과 노력의 시간들을 담보하지 않았다면 그 경지에 오르는 일이 가능하였겠는가 말이다.

묵계월에 있어서도 단지 목이 좋아서, 운이 좋아서, 선생을 잘 만나서 명창이 된 것은 결코 아니다. 소리도 그렇고, 기악도 그렇고, 춤도 그렇다. 아니 세상만사가 다 같은 이치가 아니겠는가!   비단 목청만이 아니다. 윗소리와 아랫소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넓은 음폭을 지닌 점도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다. 위로 치솟을 때에는 강렬하면서도 역동적인 고음이 시원시원하고, 아래소리는 편안하고 넉넉한 소리가 안정감을 준다.

주변의 소리꾼들이나 제자들은 고 묵계월 명창의 장점으로“그는 장시간 소리를 해도 지칠 줄 모르는 명창”이었다고 평한다. 체력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체력을 타고났다기 보다는 어려서부터의 연습이 일상적으로 생활화 되어 있다는 말이 더 더욱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끊임없는 훈련과 반복적인 연습이 생활화 되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이룰 수 없는 조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묵계월의 지도를 받아 온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영향을 받아서 평소에도 잔 기교보다는 소리의 기본을 충실하게 다지는 발성이나 호흡법 등에 관심을 두고 노력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목청이나 음폭, 끊임없는 반복훈련, 그리고 소리를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 등으로 묵계월은 이미 그의 나이 20세 이전에‘소리 잘하는 젊은이’‘ 소리 잘하는 묵계월”의 이름을 세상에 점차 알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민요나 긴소리뿐만이 아니라 그 어렵다고 하는 송서(誦書)까지 잘 불렀다. 특히 송서는 이문원에게 배웠는데, 그가 아니었다면 자칫 단절의 위기를 맞았을지도 모를 분야를 묵계월이 있어 그 명맥을 오늘에 잇게 된 것이다.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생전에 묵계월 선생의 쾌유를 빌면서 그린 이무성 한국화가의 그림

묵 명창에게는 아름다운 미담의 사례가 많다. 특히 미국의 UCLA 민족음악대학에 한국음악과가 폐과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때마침 수상한 <방일영국악상>의 상금액 절반을 쾌척하였다는 사실은 국내보다는 미국 교포사회에 더더욱 알려져 있다. 90평생 소릿길을 살아오면서 배고픈 설움과 소릿 광대의 설움을 누구보다 더 뼈저리게 경험한 노 명창의 용기 있는 결단이었기에 더더욱 훈훈한 미담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묵계월 선생의 제자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말이 있다. 바로“말을 하기 전에 머릿속에서 바를 <正>자을 먼저 그린다음, 입을 열라”는 말이다. 평소에는 무척 과묵한 분이었으나 불의에는 팔을 걷어붙였던 묵계월 명창, 때로는 어머니처럼 강렬한 모성애를 지닌 명창이면서도 어렵고 힘든 이웃에는 눈물을 보이는 소녀 같은 순수성을 간직했던 명창이었다. 70여년을 한결 같이 소리와 함께 했음에도 아직까지 무대에 서면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눌 길 없다고 털어놓던 묵계월 명창,

벅차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니 참으로 어려운 것이 소리라는 것임을 조용히 깨닫게 해 주는 대명창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후배 명창들이나 젊은 국악인들이 음악을 신중하게 접근하고 대하는 그의 음악적 태도나 정신을 이어받기를 기대한다.

생전에 그는 수없이 많은 국내외 공연활동을 위시하여 방송, 음반작업, 후진양성 등 경기소리의 확산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 왔다. 그 많은 공연물 중에서도 그의 고희기념 공연이었던 <인생70, 소리60 >발표회나 <묵계월 1995, 끝없는 소리길>, 그리고 <묵계월 경기소리 및 삼설기 발표회> 등의 공연 기획물들은 많은 애호가들에게 그의 소리세계를 알리는 매우 의미 있는 무대로 기억되고 있다.

이제 그가 떠난 지금, 비어있던 무대는 그에게 배움을 청했던 많은 제자들이 마음을 담아 추모음악회로 채우고 있다. 선생의 첫 전수자요, 보유자후보였던 경기문화재 예능보유자 임정란 명창을 위시하여 임춘희, 조경희, 임수현, 최은호, 최근순, 김경아, 이명희, 이윤경 등의 큰 제자들과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1호 <경기소리>와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의 이수자, 전수자 및 장학생 등 무려 150여명이 함께 무대를 채웠던 것이다.

이들이 선생을 기리며 준비한 종목들은 좌창 <적벽가>를 비롯하여 민요<이별가>, 송서 <삼설기>, 그리고 회심곡, 경기도당굿, 경기놀량, 경서도의 대표적인 민요 등이었다. 여기에 김영운 교수의 해박한 해설과 이애주 교수의 특별출연이 무대를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내년에도 이와 같은 추모음악회는 제자들의 의해 지속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