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분화신문=김영조 기자] “대광통교 넘어서니 육주비전(六注比廛) 여기로다. / 일 아는 여리꾼(列立軍)과 물화 맡은 시전주인은 대창옷에 갓을 쓰고 소창옷에 한삼(汗衫)달고 / 사람 불러 흥정할 제 경박하기 한이 없다.”
위는 조선 현종 때 사람 한산거사(漢山居士)가 지은 <한양가(漢陽歌)> 일부입니다. 광통방(廣通坊, 현재 중구 서린동 근처) 부근에 있던 큰 다리 대광통교(大廣通橋)를 건너면 육주비전(六注比廛)이라 하여 나라로부터 독점적 상업권을 부여받고 나라가 필요로 하는 수요품을 조달하던 시전(市廛)이 있었지요. 이 육주비전에는 “여리꾼(列立軍)” 곧 거간꾼들이 있었습니다. “여리꾼”이란 “남는 이익(餘利)을 얻는다는 뜻”과 함께 종로 거리에 열 지어 서 있다가 손님이 나타나면 흥정을 붙인다는 뜻의 열립꾼(列立軍)인 것이지요.
당시 조선시대 시전상인은 대개 한 평 남짓한 좁은 터에 최소한의 상품을 진열하고 손님을 기다렸지요. 게다가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은 상호를 적거나 상품을 알리는 간판도 없었고, 심지어 값도 써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손님은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쉽게 찾을 수가 없어서 시전 거리에서 헤매곤 했는데 이때 상인과 손님의 틈새를 파고든 것이 바로 여리꾼인 것입니다. 여리꾼은 값을 비싸게 부른 다음 흥정을 붙이고 값을 조정한 뒤 상인이 원했던 것보다 높은 값을 받아서 그 차액을 챙겼던 것이지요.
▲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첩> 가운데 '시장", 독일 함부르크민족박물관
이렇게 여리꾼은 상인과 손님 사이에서 빌붙은 필요악이었는데 근대 이후 시장에 간판과 광고가 등장하고, 상품이 찾기 쉽게 진열되었음은 물론 현대적 개념의 상업으로 변모되면서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도 여리꾼과 비슷한 중개인은 여전합니다. 오늘날 중개상이라고 하면 무기 중개상 그리고 증권거래사 같은 직업이 있지만 특히 부동산 중개인 가운데 이른바 "떴다방"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옛날 여리꾼과 닮은 데가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