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김호(金乎, 1884.5.25~1968.1.5) 선생은 1884년 5월 25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대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선생은 1912년 11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1914년 7월 25일 유학을 목적으로 도미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뉴욕이민국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의 보증으로 미국에 첫 발을 디뎠다. 1910년대 초반 당시 대한인국민회는 북미와 하와이는 물론 시베리아, 만주, 수청(현재의 파르티잔스크) 등지에 국민회 지방총회를 설립하였으며, 멕시코지역에도 지방회를 설립하는 등 해외한인의 최고통일기관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3년 6월 미국국무장관으로부터 재미한인의 대표기관으로 인정받는 한편, 1914년 4월에는 캘리포니아주정부의 인허를 얻어 완전한 한인자치기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에 입국하는 유학생과 한인들은 여권이 없을지라도 대한인국민회의 증서와 보증으로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선생 역시 대한인국민회의 보증으로 미국에 입국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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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도미 후 노동에 종사하면서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대한인국민회 재정에 필요한 자금을 의연하였으며, 1918년 4월에는 콜로라도 주 푸에불로 지방에서 김원용 등과 함께 동포 30여명을 규합하여 지방회 설립을 청원하였다. 그리하여 4월 14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산하에 푸에블로 지방회를 조직하고 서기로 임명되어 회원의 친목 유지와 한인사회 치안유지에 앞장 섰다.
이 시기에 선생은 한평생 동지인 김원용 함께 일하게 된다. 그 후 와이오밍주로 이주한 선생은 동년 8월 와이오밍 지방회를 설립하고 총무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은 북미지방총회의 미개척지인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지방회를 조직하는 등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조직 확산에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선생은 1918년 11월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에 천거되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선생은 잠시 생업을 뒤로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달려가 중앙총회장 안창호를 만나 자신의 뜻을 피력하였다. 이에 안창호는 선생을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중서부지역의 특파위원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당시 대한인국민회는 국내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회원 1인당 인구세 1달러와 애국금, 독립금 재정을 모금하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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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1917년 3월 17일부터 약 2개월동안 워싱턴주, 오레곤주, 아이다호, 네바다주, 와이오밍주, 콜로라도주, 뉴멕시코주, 애리조나주 등 9개주를 순행하며 동포를 심방하여 독립의연동맹회를 결성하는 한편, 10,000달러 이상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선생은 본격적인 민족운동 대열에 동참하였다.
그 후 독립 달성을 위해서 국제적 외교활동 역시 필요하다고 판단한 선생은 1919년 12월 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살음, 이범영, 이순기 등과 함께 노동사회개진당을 조직하였다. 노동사회개진당은 파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벌이던 조소앙을 후원하기 위해 조직된 독립운동 후원단체로서, 선생은 노동사회개진당의 선포문을 낭독하는 등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노동사회개진당은 동년 12월 중가주 다뉴바(danuba)에서 당 대회를 소집하고 세계인민연맹 결성에 한국대표를 파송할 것을 결의하고 조소앙을 대표로 선정하여 1920년 2월 조소앙에게 신임장과 경비 2500달러를 송금하였다. 이외에도 1923년 4월 기관지 [동무]를 간행하고 구미위원부를 후원하였다.
김형제 상회를 설립하여 재미한인사회의 백만장자 첫 세대로 이름 남겨
한편, 선생은 독립운동의 재정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1920년 5월 중가주 리들리에서 김형순과 함께 김형제 상회(kim brothers company)를 설립하였다. 김형제 상회는 처음에는 농산물 운송과 위탁판매업을 하는 한편, 복숭아 과수원과 화원 등을 경영하였다. 200여명의 한인노동자가 이 곳에서 일할 정도로 김형제상회의 사업은 성공하였으며 캘리포니아 일대에서 가장 큰 과일 농사를 지으며 연 100만불 이상의 수익을 올릴 정도로 번성하여 재미한인사회의 백만장자가 된 첫 세대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사업기반을 바탕으로 이 시기에 선생은 평생 동안 정치적 동지로 함께 한 김형순, 김용중, 김원용 등과 연을 맺게 된다. 후일 이들은 리들리(reedley)그룹으로 불리 우며, 국민회의 중도개혁세력으로 자리잡게 된다. 다만 이때 같이 일했던 송철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동지회의 핵심인물이었던 관계로 반(反)이승만 노선을 지향했던 리들리 그룹과는 멀어지고 말았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당선, 로스엔젤레스에 한인국방경위대 창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을 계기로 중국 관내에서 대일항전을 위한 통일전선 움직임이 일자, 선생은 동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재미한인사회의 역량을 집중하기 위한 연합회 창설을 제안하였다. 그 결과 1931년 11월 미주한인연합회가 조직되었고, 조직의 재무로 선임된 선생은 미국을 비롯한 멕시코와 쿠바지역의 한인들로부터 인구세를 모집하여 임시정부로 송금하였다.
그 후 김규식의 도미를 계기로 선생 등은 미주한인단체의 통합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36년 7월 대한인국민회총회의 기존 1인 회장제가 위원제로 변경되었고, 이는 이 후 북미지역 한인 중 유력자들을 국민회로 참여하는 발판이 되게 된다. 1937년 1월 대한인국민회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당선된 선생은 이후 북미한인사회를 국민회 중심으로 완전한 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선생의 전민족 통일단결방향은 임시정부 중심의 통일전선 실현에 있었다.
한편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북미의 국민회는 광복군후원특별의연금 모금운동을 결의하고 하와이의 국민회에 통합을 논의하였다. 1941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는 독립전선의 통일, 임시정부 봉대, 군사운동, 외교운동, 미국국방공작 원조, 재정방침,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설치 등 7개조의 사항을 결의하였고, 이 결의에 따라 1941년 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미주한인사회의 분산된 민족운동을 통일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였다.
또한 한인경위대를 창설하였으며 1943년 11월에 김용중이 워싱턴에서 한국사정사(korea affairs institute)를 설립하고 월보 [한국의 소리(the voice of korea)]를 간행하자, 선생은 재정부장으로 출판비용을 지원하였다.
1959년 선생과 김원용은 재미한인의 역사를 정리하여 출간하려 하였으나, 이승만이 정권을 잡고 있던 당시 현실에서 반(反)이승만 입장을 분명히 밝힌 책의 출판을 선뜻 응하는 출판사가 없었다. 그리하여 리들리에서 석판(石版)으로 일일이 정리하여 출간된 책이 바로 [재미한인오십년사]였다. 이 [재미한인오십년사]는 아직도 재미한인의 역사를 접하는데 하나의 길라잡이로서 그 명맥을 지키고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공적 내용>
○ 1914 미국으로 망명하여 대한인국민회 활동
○ 1919 노동사회개진당을 조직하여 임정지원
○ 1937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 1941 한인국방경위대 맹호군 창설
○ 1942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장
<자료: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