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6.25 한국전쟁 이후인 50~60년대 우리는 식량이 모자라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학교 갈 때 도시락을 싸가지고 갈 수가 없어서 점심시간에 친구들 몰래 수돗물로 배를 채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겨우 도시락을 싸간다 해도 대부분 도시락은 꽁보리밥에 반찬이라고 해야 김치 하나뿐인 그런 것이었지요. 그런데 당시는 세계적으로 먹거리가 모자라 식량 증산에 큰 관심을 보일 때 였습니다.
그래서 1960년 필리핀에 미국이 주도하여 동남아시아 쌀 연구의 전진기지인 국제미작연구소(IRRI)를 설립합니다. 이 국제미작연구소에서 가장 먼저 보급된 “IR8”이란 품종은 ‘기적의 벼’로 불리며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때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허문회 교수가 이 IR8의 개발에 참여했는데 IR8은 인디카 품종(남방벼)이었으므로 그대로 한국에 도입할 수는 없었습니다.
▲ 통일벼가 온나라에 퍼지면서 쌀 자급자족이 이루어졌다.(농촌진흥청 제공)
허문회 교수는 2년의 연수 기간 동안 한국에서 재배할 수 있는 IR8의 후손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지요. 이 품종은 한국에서 ‘통일’이라는 정식 이름을 얻고 1971년부터 농가에 보급되었고 어떤 기존 품종보다도 월등한 수확량을 자랑했습니다. 이후 전국적으로 쌀 생산은 꾸준히 늘어나서 드디어 1977년에는 쌀의 국내 총 생산량이 수요량을 앞지르게 되었으며, 정부는 이에 ‘녹색혁명 성취’를 선포하고, 전국적인 기념행사를 벌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이 통일쌀은 차진 밥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는데 다만, 먹걸이가 턱없이 모자라던 당시에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못되었고, 한국인의 배를 채워주던 귀중한 쌀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