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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1927년 이후 인기몰이 재담은 <박춘재놀음>이라 했다

[국악속풀이 232] 경기 명창 박춘재 이야기 <3>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박춘재 명창의 30세 전후까지의 활동상황을 이야기 하였다.
10세 전후에 홍필원, 홍진원 형제 명창에게 소리를 배우다가 당대 <추, 조, 박>으로 유명했던 박춘경 명창에게 본격적으로 경기소리를 배우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선생의 소리를 한번 들으면 그대로 부를 정도로 받아드리는 감각이 남달랐다는 이야기, 15~6세에는 궁중 가무별감이 되었으며, 20세에 협률사에 초빙되어 서도소리와 재담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다년간 발성연습 속에 30세 전후에는 일본 축음기상회에서 주관하는 녹음작업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이때의 동행자들이 김홍도, 문영수, 심정순 등 8명이었는데, 특히 심정순(1873~1937)은 박팔괘와 함께 충청제 가야금 산조의 1세대로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이야기, 일본에서는 총 100면의 레코드를 녹음하였는데, 이중 거의 절반은 박춘재 명창이 녹음을 하였고, 나머지는 7명이 분담하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때 박춘재가 부른 곡들이 서도민요의 대표적인 <수심가>와 <긴난봉가>, 경기의 긴잡가인 <제비가>, 휘몰이잡가인 <맹꽁이 타령> <곰보타령>, 민요의 <무당노랫가락>, 그리고 재담의 <장대장타령> <장님타령> <장사치흉내>와 같은 곡목들이라는 이야기, 또한 동행했던 판소리 명창 송만갑의 소리에 반주를 해 줄 정도로 북이나 장고도 잘 쳤다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32살 되던 1915년에는 박승엽이 ‘광무대소리’라는 부제와 함께 《무쌍신구잡가》를 펴냈는데, 뒷면에 ‘조선제일류가객 박춘재군’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이 실려 있다는 이야기, 그 뒤 지송욱의 《증보신구시행잡가》나 《신구현행잡가》에도‘박춘재 소리’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서 당시 그의 소리가 어떠했는가 하는 점을 짐작하게 만든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박춘재 제석타령이 맨 먼저 녹음된 지구레코드의 창부타령 걸작선(왼쪽), 장대장타령, 제석타련 등이 녹음된 지구레코드 "경기명창 박춘재" 음반

그가 34살 되던 1917년 이후부터 그의 활동은 더욱 활발하여 졌고 또한 공연 기회도 확대되어 갔다. 신문지상에는 연일 박춘재와 그의 일행이 벌이는 공연소식이 보도되고 있었으며 그들 일행의 공연 내용이 광고되고 있었기에 웃음을 잃고 사는 일반 대중들의 발걸음이 자연 그들의 공연장으로 모였던 것이다.

이들이 펼친 주된 공연의 내용은 주로 사람을 웃기는 재담이 중심이었고, 대중이 잘 알고 부르는 경서도 소리였다. 또한 무대는 주로 광무대와 단성사였다. 그러면서 음반 활동도 활발하여 25년 이후에는 일축이 국내에 들어와 녹음을 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박춘재 일행이 일본에 건너가 녹음을 하곤 했다. <제석타령>이나 <무당덕담> 등이 이 무렵에 취입된 소리들이었다.

그 후 1927년 이후에는 재담이 주된 분야가 될 정도로 일반 대중에게는 웃음과 해학이 넘치는 재담이 주 곡목이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그 인기도 폭발적이어서 그 소개도 아예 <박춘재 놀음>이라는 별명으로 통하고 있었다. 그래서 1930년 이후에는 아예 공연 명칭의 소개나 홍보를 <박춘재와 그의 일행>, 또는 <박춘재 놀음>으로 해야 관객이 들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의 재담은 기획행사를 통해서 또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점차 널리 활발하게 소개되었고 또한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박춘재의 장대장 타령은 현재 백영춘 명인과 노학순 등이 잇고 있다.

1942년은 그의 나이 59살 되는 해이다. 조선음악협회 내 경서도명창으로 조직된 조선가무단이 결성되었을 때, 여기에 참여해 지방공연을 하였는데, 이때의 동료들은 이일선, 심상건을 비롯하여 박천복, 고준성 등 재담가들과 줄타기의 명수 김봉엽이나 신인 만담가 장소팔과 같은 예인들이 함께 하였다고 한다.

이 당시 이창배는 20대 중반으로 이 단체의 사무를 맡고 있었다. 벽파의 초기 스승은 원범산으로 주로 잡가를 익혔고, 후에는 학강 최경식 명창 앞에 가사나 시조를 배웠다. 최경식의 스승이 조기준이다. 그러므로 박춘재의 스승이었던 박춘경도 조기준에게 배웠고, 이창배의 스승 최경식도 조기준이어서 조기준 문하의 동문수학한 입장이 되기에 박춘재와 이창배는 각별한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1944년, 61살이 된 박춘재는 신당동에 있던 신부좌, 혹은 왕십리에 있던 광무극장 등지에서 가끔 재담공연을 하였는데, 이 곳 왕십리는 서울소리 전문 재인들의 집합처가 되어 당시의 많은 명창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 이후 박춘재는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 노무자를 위한 공연을 마치고 부산에 체류 중일 때 광복을 맞이하게 되고, 그 이후 지방 순회 공연을 떠나있던 도중 전쟁을 만나 경기도 광주에서 세상을 떴다. 1950년, 8월 21일, 그의 나이 67살이었는데 전쟁의 와중이어서 그의 죽음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지 65년이 지났어도 아직 박춘재의 이름이, 그의 업적이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가 전대의 명인명창들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그들의 활약상을 잘 모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노래와 재담으로 어려운 시대를 이겨낼 수 있었다는 그 고마움을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