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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사당 정면 솟을대문과 뒤로 사당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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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측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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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에 물들어가는 사당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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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주차장에서 본 사당 협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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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은 문이 잠겨있고, 현판조차 없이 쓸쓸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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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의 주변을 지키는 석인과 석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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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비석과 동자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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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에는 문인석이 관복을 입고 서있다. |
[우리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는 구한말 바람결에 촛불같았던 나라의 운명 앞에서 나라를 구하겠다고 뜻을 같이할 사람을 규합하고 목숨을 걸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선각자 김옥균의 사당과 묘가 있다.
김옥균은 1851년 태어나 1894년 43년의 짧은 삶을 살고 세상을 떴다. 그는 1894년 이국 땅 상하이에서 같은 조선인으로 그를 죽이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었던 동포의 총알에 비명횡사 한뒤, 그의 유해는 1924년 이곳에 묻혔다.
김옥균은 안동김씨의 후손으로 태어나 명석한 두뇌와 판단력은 있었다. 그의 집안은 구시대의 기득권에 안주하던 안동김씨와 노론의 세력이었으나 자기 집안의 번영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의 조류속에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뜻을 세우고, 이에 뜻을 같이하던 동지들을 규합하여 구시대를 바꾸고자 하였다.
그는 당시 개화사상에 깊은 공감을 하던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유대치) 등 학문적으로는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으나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중인계층들과 어울리면서 신식문명과 학문에 나라의 개혁에 절감하게 되었다. 김옥균은 1872년 22세에 알성시에 장원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하여 1874년 홍문관교리가 된뒤 개화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879년에는 당시 개화에 뜻을 두었던 이동인(스님)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의 신문명에도 큰 관심을 가졌으며, 국내에서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넓혀 나갔다.
1881년 30세에 스스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개화와 명치유신에 대하여 정보를 수집하였고, 1882년 국가를 지키던 군인들의 봉급에 불만을 품고 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급히 귀국하여 승정원 우부승지 이조참의 호조참판 외아문형판등 요직을 거치면서 나라의 자주적 근대화와 개화당의 세력확대에 진력하였다.
그는 일본이 영국을 본받아 모든 제도를 영국식 입헌군주국으로 가는 것을 보고 조선도 그리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자면 조선이 양반이라는 특권층만이 모든 권력을 잡고 있는 신분제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신분제 타파와, 국가제정의 개혁을 위하여 근대적 공업육성을 위한 공장설립, 선진과학제도 도입, 상업발전과 화폐개혁, 관세의 자주권확보, 농업 임업 목축업 발전과 철도 해운업 전기 통신업 도입 등을 주장하였고, 이를 위하여 신식학교설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청나라의 봉건적 속국으로 청나라에 사대를 하던 상황이라 자주적 개화를 주장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주와 개혁을 주장하며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조선은 청나라의 반대에 봉착하였고, 대원군의 개혁정책 또한 청나라의 반대로 개혁파 대원군을 청나라로 잡아가버리고 수구파의 중심이었던 민비가 집권함으로써 조선의 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김옥균은 1883년 수신사가 되어 박영효와 함께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각지를 시찰하고 조선의 유학생을 선발하여 일본학교에 유학시키기도 하였다.
1883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국왕의 위임장으로 국채를 얻어와 국가개혁의 자금을 모금하여 하였으나 수구파들의 방해로 국왕의 위임장이 위조되었다는 트집에 일본에서 아무런 성과도 없이 실패하고 귀국하고 말았다. 그는 국가개혁을 위하여 급변하는 국제정세속에 자신들의 잇권이나 챙기고 있는 수구파들을 두고서는 개화도 개혁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기로 하였다.
그는 1884년 신문명의 상징인 우정국청사 준공식에 당시 집권층 고관대작들을 초청하여 준공식에 참석한 이들을 한꺼번에 처단하고 개화파를 중심으로한 새로운 인물들로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는 갑신정변을 계획하였다. 그의 계획대로 우정국 청사 개관식에 참석했던 많은 수구파 대신들을 처단하고 새로운 내각을 조각하고 이를 국왕인 고종의 승인까지 받아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개화와 청의 속국에서 벗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청나라의 무력 개입으로 인하여 조선은 청의 제후국으로 조선왕의 허락도 없이 들어온 청나라군 1,500여명이 한성으로 진입하여 개화파 대신들을 잡아들이고 궁궐까지 난입하여 개화파 김옥균 일파는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갑신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으로 망명한 뒤로는 일본정부의 박해가 시작되어 1885년 오가사와라 섬으로 귀양갔다가, 1888년에는 북해도로 추방당하여 연금하였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1894년 3월 상하이로 다시 망명하였으나, 개화파의 위험인물로 낙인 찍힌 김옥균은 수구파의 자객인 홍종우에 의하여 상하이 여관방에서 피살되고 말았다. 그는 조국의 근대화 자주화를 갈구하고 한 몸 바치려 하였으나,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이국땅에서 비명에 가고 만 것이다.
이후 조선은 스스로 개혁하지 못하고 등거리 외교와 외줄타기로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를 오가면서 살아남고자 노력하였으나 결국 일본군에 패퇴한 청나라와 러시아가 물러간 후,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의 운명은 늘 풍전등화와 같다.
지금은 그나마 식민지에서 벗어나 경제발전을 거듭하여 세계 10대국에 들 정도로 경제발전을 이룩하였고, 피땀흘려 민주화를 이룩하였다고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보수와 개혁을 앞에 두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다. 그 치열한 국내 사정속에서 지금도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미국의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줄타기 외교에 우리만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형편이고 북에는 세계 유일의 세습왕조를 이어가는 중이다.
아산의 작은 언덕 위에 쓸쓸히 누워있는 고균 김옥균의 사당과 묘소를 둘러보고 120년이 지난 오늘의 우리를 되돌아 본다. 그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그는 무어라 할 것인가?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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