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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충주에서 충민공 임경업장군을 만나다

 

   
▲ 충렬사 안내판

   
▲ 충렬사 출입문
   
▲ 충렬사 사당 정문

   
▲ 비문

   
▲ 충렬사 전시장

   
▲ 전시장에 있는 임경업 장군의 칼

   
▲ 추련도 명문

   
▲ 장군의 행장

   
▲ 장군의 비각 정조의 친필로 쓰여진 비(어제달천충렬사비)

   
▲ 충렬사 강당, 충렬사에서 행사할 때 사람들이 모이는 곳

   
▲ 충민공 임경업장군사당

   
▲ 임경업 장군의 초상


[우리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조선조 중기를 넘어 임진왜란이 끝난 뒤 얼마되지 않아 또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토가 피폐해지고 인구도 급감하였다. 하지만 성리학만을 유일한 학문으로 숭상하던 조선은 왕조를 바꾸는 일만은 하지 못하고 선조가 계속 집권한 조선이 계속되었다. 국토는 피폐하고 민심은 돌아섰으면 왕조를 바꾸는 일을 하는 것이 세계사적으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조선은 감히 그런일을 하지 못하였다.

반면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은 수많은 조선의 문화재와 기술자들을 잡아가서 이를 바탕으로 자기들만의 세계적인 도자기산업을 이룩하여 세계에 팔게 되었고, 전쟁에 패한 책임을 물어 풍신수길의 막부정권이 도쿠카와 이에아스의 정권으로 바뀌었고, 명나라 임진왜란에 참가한 국력의 소모와 자체 관리들의 부패로 만주 동북에서 힘을 키운 만주족의 청나라에 의해서 국운이 기울었다.

이러한 격동의 시대에 태어난 무장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충민공 임경업장군이었다. 임경업장군은  1594년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시절에 태어나, 1618년 광해군 10년 무과에 급제하여 황해도 갑산의 소농보권관으로 부임하여 군량과 군기를 철저히 하여 그 공으로 절충장군이 되었다. 

 이후 인조반정시에는 반정공신 김류의 휘하에서 활약하였고, 공신등급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는데 공을세워 진무원정공신에 가선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1626년 행첨지중추부사 겸 우림위장이 되었다가 방담첨사가 되어 남도땅 낙안군수로 부임하여 자주출몰하는 왜구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평야지역에 석성을 쌓았고, 왜구의 출몰시에 군민들이 성안으로 피신하게 하여 백성들을 보호하였다. 지금 낙안읍성을 쌓은 공이 바로 임경업장군에 있다. 유비무환을 실천했던 그의 공으로 낙안읍성의 백성들은 이후 왜구들의 출몰에도 목숨을 잃는 일이 없어졌다.

정묘호란 이후 북방의 포기논의가 일어났을 때 장군은 정북방어사겸 안변부사로  부임하여 백마산성과 용골성을 수축하였고, 명나라의 변방에서 공유덕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여 명나라로부터 벼슬까지 받게 되었다.  이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임경업장군은 의주부윤으로 백마산성을 굳게 지켰다. 청나라는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돌아서 한양으로 쳐들어 왔다.

이후 청나라는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조선에 동맹군으로 출전을 요청하자, 조선은 어쩔수 없이 청나라 군의 동맹군으로 출장하게 되었고 그 장수는 임경업이었다. 그러나 임경업장군은 청군에서 빠져나와 오히려 명나라를 도와 청군을 공격하였으나, 명의 장군들이 싸우려는 자세가 없이 도망쳐 버리자 임경업은 결국 청에 포로가 되고 말았다.

청의 황제는 그동안 용맹하기로 이름있던 임경업을 자신의 휘하장수로 삼고자 하였으나 임경업의 거절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조선에서는 심기원의 모반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임경업이 심기원과 공모했다는 소문에 조선의 인조는 청나라에 임경업의 송환을 요청하였다. 청나라는 자신의 장수로 되기를 거부한 임경업을 조선에 돌려 보냈다.

조선에 돌아온 임경업은 심기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으나  당시 친청파인 김자점등의 임경업 장군에 대한 무고한 상소와  청나라의 원군으로 갔다가 무단으로 이탈하여 명나라에 원군이 된 것은 국법을 어기고 남의 나라로 들어간 것이므로 국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며 국문을 하였고, 그 고문끝에 억울하게 장살되고 말았다. 이때는 그의 나이 53세로 1646년 6월 17일 인조 24년이었다.

이후 1697년 숙종 23년 그동안의 장군에게 씌워졌던 죄목이 무고로 밝혀져 복권된 후 생전의 공을 인정하여 왕으로부터 충민공으로 시호를 받았고, 1726년 영조2년 이곳에 충렬사 를 세웠으며 1791년 정조 15년 왕이 직접글을 써 비석에 새기니 그 비가 "어제달천충렬사비"이다.

임경업장군의 사당을 돌아보면서 살아서 그 용맹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발휘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모함으로 죽게된 많은 한국의 장수들이 생각난다. 전란이 한창이던 임진왜란 중에도 가장 훌륭한 장수였던 이순신장군도 태장을 맞고 죽을 뻔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으로 궐기했던 많은 훌륭한 장수들이 모반할 것이라는 모함에 훌륭한 장수들이 죽어갔다. 인재를 길러도 시원치않을 때 인재를 역모로 몰아서 죽이고, 후세에 가서야 복권해주는 일들을 하지 말고, 훌륭한 인재를 인재로 잘 쓸 수있는 좋은세상,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유산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