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이는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 의사가 죽음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강우규 의사는 65살의 고령의 나이에 폭탄의거로 순국의 길을 걸은 분입니다.
▲ 서울역 앞에 세워진 강우규 의사 동상
강우규 의사는 지금으로부터 96년 전인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남대문역(서울역)에 도착한 사이토마코토 총독을 향해 힘차게 폭탄을 던집니다. 강 의사는 왜 젊은 사람들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폭탄의거에 뛰어든 것일까요? 강우규 의사는 1885년 함경남도 홍원(덕천) 출신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강제로 강탈당하자 식구들을 이끌고 북간도로 건너가, 한인촌을 건설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민족운동을 전개합니다. 3·1만세운동 직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되지요. 이때 강 의사는 조선에 신임 총독이 부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러시아로부터 영국제 폭탄을 구입하여, 1919년 6월 1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8월 4일 서울에 도착, 9월 2일 거사에 이릅니다.
의거 당일 강 의사는 폭탄을 명주수건에 싸서 허리춤에 차고, 두루마기 차림에 파나마 모자, 가죽신, 양산, 수건 등을 갖추고 사이토 총독을 환영 나온 군중 틈에 섞여 있다 폭탄세례를 퍼붓습니다. 그러나 폭탄은 사이토가 있는 자동차에 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채 폭발해 버려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의 의거는 일제의 조선침략에 대한 조선인의 강한 정신을 보여주는 의거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 의거로 강 의사는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의 길을 걷습니다.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은 있는데,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말입니다. 모레 29일은 강우규 의사가 순국한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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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규 체포"라는 <매일신보> 1919년 10월 7일 기사 |